농사짓는 법보다 농부의 마음가짐을 이야기하다
내가 목판화가를 해야지 마음먹었을 때
처음으로 나무에 새긴 그림이 농부였어.
나는 농부가 좋았어.
길을 가다가도 들판에서 일하는 농부를 보면 그림을 그리고 싶었지.
흙을 밟고 곡식과 채소에 둘러싸여
땀 흘려 일하는 농부가 멋있어 보였나 봐.
_이윤엽
텃밭이나 농사일을 다룬 논픽션 그림책들이 제법 많다. 크게는 자연·생태 분야로 묶이는 책들이다. 구성은 비슷비슷하다. 계절에 따라 주요 에피소드가 나오고, 농기구와 다양한 작물들에 꼼꼼한 설명을 곁들인다. 그림은 사실적인 톤이거나 아예 유머러스한 만화 스타일인데 둘 다 ‘착하고 순한’ 이미지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림책으로서의 완성도가 결코 떨어지는 것이 아닌데도, 나는 이런 책들에 별로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처음 <나는 농부란다>를 봤을 때 어마어마하게 놀랐다. "이건 네가 생각하는 그런 그림책이 아니야, 인마!" 하고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다 읽자마자 처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보고, 또 보고 그렇게 연달아 세 번을 읽었다. 판화가 이윤엽의 목판화는 강렬하다. 그러면서도 어딘가 짠하다. 툭툭 던지는 농담 같기도 하다. 산 너머에서 밭을 지켜보는 커다란 고라니나, 능선 위에 웅크리고 겨울잠을 자는 반달곰, 그림 중간중간 들어간 짧은 문장들이 그렇다. 글이 주는 느낌도 그림과 비슷하다.
무엇보다 멋지다고 느끼는 것은 이 책이 농사짓는 법이 아닌, 농부의 마음가짐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독자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첫 번째 목적이 아니라는 듯한 태도. 물론 논픽션 그림책이기 때문에 정보를 완전히 걷어낼 수는 없지만, 작가는 그 이전에 ‘농부님들’에 대한 사랑을 담고 싶었던 것 같다. 장면마다 행간마다 책 장 사이사이마다... 나는 그렇게 느꼈고, 감동을 받았다. 본문 그림과 글을 조금 옮겨 본다.
먹는 건 땅에서 나와. 땅은 참 신기해. 콩을 심으면 콩이 나오고, 고추를 심으면 고추가 나와. 땅은 모든 걸 받아 주고, 모든 걸 키워줘. 농부는 땅을 알고, 때를 잘 아는 사람이야. 내가 바로 농부란다.
땅은 다 달라. 참깨가 잘되는 밭이 따로 있고, 콩이 잘 자라는 밭이 따로 있어. 어느 밭은 땅 힘이 좋아서 고구마가 잘돼. 그렇다고 고라니가 자꾸 훔쳐 먹는 자리에다 심으면 안 돼. 나는 어느 땅에 무얼 심을지 훤하게 알지.
아까시나무 꽃 내음이 퍼지고 뻐꾹뻐꾹 뻐꾹새가 울 때면, 온 마을에 연둣빛이 넘실거린단다. 이제부터 한시름 놓고 장에도 가고, 가까운 데로 놀러도 가. 사람들은 농부가 맨날 일만 하는 줄 아는데, 그렇지 않아. 일할 때가 있고, 쉴 때가 있고, 놀 때도 있는 거야.
씽씽 달리는 차가 아무리 좋아도, 컴퓨터가 아무리 좋아도 먹을 수는 없잖아. 우리가 먹는 건, 땅에 씨앗을 뿌린 농부의 거친 손에서 나와. 날마다 풀을 뽑느라 호미처럼 휘어진 농부의 허리에서 나오지.
큰비가 쏟아지고 태풍이 닥치면, 벼와 고추와 토마토와 옥수수가 물에 잠기고 흙에 파묻혀. 어린 열매가 떨어지면 내 마음도 무너져. 하지만 슬프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농부는 날마다 보살피고 가꾼 것을 포기하지 않아.
깊은 산 반달곰이 겨울잠 자는 겨울이야. 나는 열매 가운데 가장 튼튼한 놈을 골라 둬. 내년 봄에 씨앗으로 쓸 거야. 한동안 쓰지 않을 호미며 경운기도 깨끗이 정리해 두고, 이른 봄에 쓸 거름도 쉬엄쉬엄 마련해. 그동안 애쓴 땅이 하얀 눈을 덮고 쉬고 있어. 나도 좀 쉬어야지.
글머리에도 짧게 옮겼지만 이윤엽은 작가의 말에 농부에 대한 마음, 마을의 농부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이웃하며 지내는 이야기들을 썼다. 어르신들은 몇 년 동안 그가 뭐하는 사람인 줄 잘 몰랐는데, <나는 농부란다>가 나오니까 그제야 아셨다고... 그림책뿐 아니라 삽화나 개인 작업들도 굉장히 매력적이다. 기회가 된다면 꼭 같이 일해 보고 싶은 작가.
*덧붙이는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