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자단위로 쪼개서 감상해야 함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의 나열입니다. 정리하기엔 너무 방대한 책이고, 파트별로 나눠서 댓글 달 수도 있는 책이기 때문에, 의식의 흐름으로 나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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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병 속에서 태어나는 아이들+부모의 개념 없이 키워지는 사회 시스템
나는 이것과 완벽히 똑같은 미래 사회를 구상한 적이 있다. 이런 주제로 소설을 써보면 어떨까 했는데 초반 설정이 내가 생각한 것과 완전히 똑같음+훨씬 더 구체적이라(계급별로 태아 개체수를 맞추는 것, 유전적으로 우성과 열성을 나누어서 계급 이동의 싹을 잘라버리는 것 등) 역시 나는 아직 소설을 집필할 짬바가 안 되는 구나를 여실히 느꼈다. 내가 한 창의적인 생각은 이미 누가 했는데, 내가 아직 모르는 것임. 게다가 고전이니까, 아주 오래전부터 이만큼 진보된 세상을 논할 수 있었다는 작가의 과학적 선구안에 놀랄 따름이다. 내가 뭔가 해 아래 새로운 것을 만들어 보려면 적어도 1000년 뒤는 예상할 수 있어야 할 듯하다.
2. 사다리가 없는 계급 사회, 그래서 완벽한 안전과 평화가 가능한
태어날 때부터 정해지는 유전적 계층+조건반사적 훈련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을 감사히 받아들이는 사람들. 사실 사회의 안정성 측면에서 보자면 이만한 태평성대가 없기는 하다. 노예가 자신의 지위에 만족하는 완벽한 계급사회! 알파는 알파의 일을, 엡실론은 엡실론의 일을 하며 어떠한 충돌도 없는 사회.
어느 사회나 엡실론의 역할은 필요하다. 우리나라는 이제 그 역할을 하고자 하는 사람이 전혀 없어서, 사회의 대부분의 위험 or 고강도 or 워라밸이 보장되지 않는 or 저임금의 노동은 거의 해외 이주노동자들이 해내고 있는 현실이다. 그들이 없다면, 이 사회는 절대로 굴러갈 수 없다. 너무나도 필수불가결한 노동인데, 늘 사회의 최약계층이 감당해야 하는 현실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 불합리한 세상. 아무도 엡실론이 되기 위해 교육받지 않고, 아무도 엡실론으로 삶을 마감하고 싶어 하지 않는 대한민국. 위험과 불쾌함의 외주가 없이는 더 이상 돌아가지 않는 대한민국. 사회는 여전히 불평등을 기반으로 돌아간다. 주장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고, 하루하루를 막아내야 하는 절벽 끝의 사람들의 어찌할 수 없는 노동으로 굴러간다. 이주노동자, 사회 초년생, 저학력 노동자라는 이름을 단 누군가의 희생으로. 이 구조를 바꿀 수 있는 길은 정말 없는 걸까? 분명히 반드시 필요한 존재들인데, 어째서 모든 자본주의 국가들의 빈부격차는 점점 심해지는 걸까? 기본적인 노동으로, 그럭저럭 괜찮은 삶은 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 노동이 정당한 대우를 받는다면, 그것으로 부의 재분배는 어려울까? 왜냐면 그마저도 감지덕지한 더 어려운 형편의 누군가가 계속해서 유입되기 때문에? 게을러서, 노력을 하지 않아서, 정보에 느려서,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해서 도태될 수밖에 없는 사회는 정당한가? 어째서 노동은 늘, 천대받는 것일까.
3. 모두가 알파계급이 되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 삶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알파 계급은 사회에서 중요한 결정을 한다. 그들도 노동을 한다. 하지만 다른 대우를 받는다. 헬리콥터를 타고 이동한다. 휴가 때 어디든 갈 수 있다. 일의 고단함을 털어버릴 수 있는 소마(일종의 마약)가 제공된다. 물론 소마는 모든 계급에게 제공된다. 만인은 만인의 것이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구속받지 않고 원하는 사람과 쾌락을 나눌 수 있다. 유일한 고민은 휴가 때에 어디를 갈 것인가, 정도이다. 현재의 알파 계급과 뭐가 다르지?
알파 계급은 현재도 알파다. 알파계급은 심지어 늙지도 않는다. 온갖 현대 과학의 정수들을 때려 박아 자신을 관리한다. 세월을 거스른다. 멋진 신세계의 알파계급과 현재의 알파계급의 삶은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누구나 원하는 삶, 100년 전에도, 100년 후에도 원할 모습의 삶은 이런 것이다. 하지만 난 늘 궁금하다. 그래서 이 삶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나는 세상의 모든 좋은 것을 소비할 수 있어. 나는 세상의 중요한 문제를 결정할 수 있어. 나는 모든 종류의 욕구(식욕과 성욕을 비롯한 모든 호기심, 쾌락 등의 감각)를 충족할 수 있어. 나에겐 부족한 것이 없어. 나의 삶은 충족과 만족과 행복뿐이야.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어. 그것이 물건이든 사람이든 상관없이. 이 삶은 어떤 의미일까?
모든 사람들은 정말로 이렇게 살기를 바랄까? 그런 것도 같아. 온갖 곳에서 돈, 돈, 돈, 이거 하면 얼마 더 벌게 해 줄게, 이거 하면 평생 일 안 하고도 살 수 있어, 이거 안 하면 바보야, 다 떠먹여 줄게, 인생 달라지는 거야,라고 외친다. 열광한다. 배우고 싶어 한다. 무엇을 위해서? 알파 계급으로 살기 위해서. 더 많이 갖기 위해서. 더 많이 물려주기 위해서. 누구에게? 나의 자손에게. 그런 점에서 <멋진 신세계>의 본인의 자녀가 없는 삶은 꽤 괜찮은 것 같기도 하다. 자본주의의 대부분의 문제는 자본주의 자체라기보다 세습에 더 큰 문제가 있는 것 같기도 하니까. 사실 물려줄 대상이 없는 부는 그다지 매력적이지도 않아. 하지만 몰두할 대상이 없는 삶이 더 매력적이지 않으니, 자녀가 없는 삶은 괜찮지 않을 것 같기도.
나는 늘 생각한다. 인생은 모르니까 재밌는 거라고. 불행이 찾아와도 만족할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이 연륜이고, 작은 것에서 행복을 찾는 것이 관찰력이고, 어제와 다른 나를 발견하는 것이 성장이라고. 그렇지만 늘 하늘에 떠 있는 삶, 그래서 모든 자극이 심심해지는 삶, 더 거센 쾌락을 찾아 헤매는 삶, 이거 어디서 많이 보지 않았어? 사회면에 자주 나오잖아. 돈이 많고, 권력이 많고, 인지도가 높은 사람들의 이해할 수 없는 일탈.
나는 그래서 늘 내가 돈이 많지 않았으면 좋겠어. 돈이 많고 싶기를 원한 적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내가 그 자유를 좋은데 쓰지 않을 인간이라는 것을 나는 너무 잘 알아. 돈이 많아지면 분명히, 더 큰 만족을 주는 것들을 찾아 헤맬 거고, 더 이상 어지간한 것에는 매력을 느끼지 못할 것이고, 그래서 결국 이 세계의 것이 아닌 쾌락에 손을 대 버릴 것이란 것을, 나는 그만큼 유혹에 약하고, 호기심이 있고, 쾌락을 즐기는 사람이라는 것을 너무 잘 알아. 나의 부유함이 딱 맛있는 디저트 찾아다니면서 한 개씩 먹어볼 수 있는 수준이라 너무 다행이야.
내가 너무 보수적이야? 고리타분해? 하지만 나에게는 이미 정해진 도덕률이 있어. 세상이 변한다고 해도, 어떤 신기한 콘셉트의 유행이 돈다고 해도, 욜로니, 파이어니, 딩크니, 싱크니, 진보니, 보수니, 어떤 것들이 들이닥쳐와도, 일단 들어보고 부분적으로 반영할 수는 있겠지만(그 와중에 열린 척 보소) 변하지 않을 중심이 있어. 그래서 나는 모든 사람들이 알파계급처럼 살고 싶어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모든 것이 안정되고, 모든 욕구를 채울 수 있는 삶을 갈망하지는 않아. 나까지 그렇게 살아야 한다면, 인간의 소원이 그것뿐이라면 너무 서글퍼.
4. 그래서 천국은 뭘까?
멋진 신세계는 인간의 이성과 고도의 통제된 과학으로 안정과 번영을 누리는 유토피아를 건설했다. 하지만 결국은 인간의 자유의지(물론 자유라고 모두가 믿고 있지만, 사실은 세뇌교육의 결과인)가 거세된, 사유를 허용하지 않는, 적당한 유희와 쾌락의 반복인, 의미를 탐구하지 않는 사회이다. 물론, 모두가 적당한 노동을 하고(나름의 자아실현), 모두가 보편적인 여가를 누리며(소마의 배급으로 합법적 마약이 가능), 모두가 자신의 삶에 만족(조건반사적 훈련으로 계층 이동을 꿈꾸지 않음)하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죽는 순간까지도 젊은 신체를 유지하다 행복하게 죽음을 맞이함)이 없다. 사실 유토피아적이긴 하다.
그런데 그래서, 천국은 어떤 모습일까? 모두가 죽지 않는다. 어떠한 갈등도 없다. 창조주와 함께하며 온전한 충만을 누린다. 이것이 영속된다. 인간의 육체를 입은 나의 이성으로는 한걸음도 상상할 수가 없다. 이 땅의 어떤 좋은 것으로도 그려지지 않는다. 온전한 평안과 온전한 사랑과 온전한 감사로 영속되는 삶을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또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다. 젊음은 때가 있어 빛나고, 삶은 끝이 있어 소중하고, 행복은 결핍을 극복하며 얻어지는데, 그 모든 것들이 완전히 충족된, 영원한 공간? 세계? 는 도저히 그려지지 않는다.
예전에는 천국이 개개인의 방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는데, 개개인의 만족을 충족하는 모든 요소들이 갖춰진 1인 1 세계라고 생각했는데, 그렇다면 그것은 환각과 무엇이 다른가. 밤새 꾸는 꿈과 무엇이 다른가. 실존하지 않는 타인들과 나의 이성에 갇혀버린 정신병동과 무엇이 다른가.
나의 머리로는 아무것도 그려낼 수가 없다. 인간의 언어로, 나의 오감으로, 극한의 상상력으로, 무엇을 동원해도 전혀 감이 안 잡힌다. 본연의 모습으로, 창조된 목적대로, 온전하다는 것은 어떤 감각일까..
5. 헤게모니를 따르지 않는 이방인에게 허락된 유일한 자유는 죽음
유일하게 신의 존재를 믿던, 불행해질 자유조차 선택하고 싶어 하던, 기계와 다를 바 없는 인간들의 움직임을 혐오하던, 육체의 들끓는 정욕을 제거하기 위해 자해조차 서슴지 않는, 사유할 수 있는 이성을 지녔던 이방인은, 그래서 결국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선택을 했다. 헤게모니에 반하는, 그래서 나만이 다른, 고독을 택하고 싶음에도 사람들의 1차원적인 관심을 끊어낼 수 없는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자유는 결국 죽음인 걸까.
체제에 반항하는 사람들, 체제를 받아들이기가 너무 버거운 사람들, 체제 속에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벗어나고 싶어 한다. 헤게모니를 따르지 않고 자신으로 살아가고자 하지만, 물리적으로 벗어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다. 그들은 도피한다. 그러다 숨을 곳을 찾지 못하면, 더 이상의 희망이 없음을 확인하고 나면 미련 없이 목숨을 버린다. 그것은 투쟁이다. 자신의 손으로 선택한 마지막 반항. 괴로움과 외로움, 고독함,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고통의 표현이다. 격렬한 투쟁임과 동시에, 무기력한 항복이다. 벗어난 사람들끼리의 유대는 더욱 어렵다. 모두의 사정은 다르고, 모두의 통각은 같지 않다. 그들 사이에 새로운 도덕률을 세우기는 더욱 어렵다. 결국 고립된다. 분열한다. 다시 홀로 된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헤게모니를 따라 살게 되는 것은 살고자 하는 의지이다. 이 세상에서 어떻게든 살아보고자 하는. 이것을 세속적이라 하기에도 어려움이 있다. 그들은 민첩하고 영민하며, 흐름을 읽을 줄 알아 선두를 차지한다. 잠시 잠깐 투쟁하던 이들은, 곧 후발대가 되어 대부분은 이 흐름으로 다시 돌아오고 만다. 곧은 나무들은 모두 꺾인다. 헤게모니는 유지된다. 사회가 안정된다. 이게 맞나..?
멋진 신세계는 어떤 주제로 대화를 해도 하룻밤은 거뜬히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직 다루지 못한 주제도 많은데 예를 들면 6. 조건반사적 훈련으로 세뇌되었다고 하여도 만인은 만인을 위한 이성애적 사랑이 가능할까? 7. 하나는 전체를 위하고, 전체는 하나를 위하는 사회라고 하지만, 개인적으로 중요한 타인(현재로서는 부모나 배우자와 같은)이 한 명도 없이 온전한 평안을 누리는 것이 가능할까? 8. 평생 건강한 신체와 건강한 사회생활을 하게 된다면, 죽는 타이밍은 누가, 언제 정하는 걸까? 그들은 어째서 영생을 선택하지 않고 죽음을 기뻐하도록 설계했을까? 9. 유일하게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총통(이 사회의 최고권력자, 안정과 만족을 위해 이성과 사유를 거세한 장본인)은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지는 않았을까? 결국 알파계급은 더 많은 스트레스를 받게 되지 않을까? 10. 엡실론이 엡실론의 지위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것을 그렸는데, 자기의 일을 사랑하고 계층이동을 바라지 않는, 예를 들면 자기만족을 잘하는, 행복의 역치가 낮은, 삶에 대체로 바라는 것이 없는 사람들은 그저 아둔하고 멍청한 자라고 생각하는 것은 과연 옳을까? 등이 있다.
나와 이 책으로 독서토론을 하고 싶은 사람은 댓글을 남겨주길 바란다. 각자가 생각하는 유토피아가 궁금하다. 당신이 그릴 수 있는 최대한의 천국을 나에게도 보여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