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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재오 Sep 28. 2020

루소의 종합

루소는 데카르트의 나(cogito)의 철학과 영국의 경험론을 종합한다. 루소의 에밀의 “사보이 신부의 고백”은 독일 관념론 철학의 탄생의 비밀정원이다. 


루소는 우선 자기의식이(cogito)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다음으로는 이 자기의식이 무언가에 의해서 작용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안다. 영향을 받는 것은 감각을 통해서이다. 눈으로 무엇을 보고 귀로 듣는다는 것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생각하는 나(Ich)가 세상을 보는 나와 같이 있다는 것이다. 나와 함께 세상도 주어진다. 이를 루소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In the first place, I know that I exist, and have senses whereby I am affected. 
무엇보다도 나는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나는 그것에 의해서 내가 영향을 받는 감각들을 가지고 있다. -에밀


사과

이런 면에서 루소는 대륙의 합리론에 영국의 경험론을 접목시키고 있다. 그는 데카르트의 “생각하는 나”에서 바로 “감각하는 나”로 도약하고 있다. 이것은 탁견(卓見)이다. 이는 후일 독일에서 칸트나 피히테에 의해서 변화, 발전되어 독일 관념론 철학의 집대성을 이루는 효시(曉示)가 된다. 생각하는 나의 존재만큼은 절대적이지는 않지만 감각하는 나의 존재 역시 분명하다. 그 이유는 감각에 의해서 사유가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사실 이것을 문장으로 보면 간단하다. 즉 나는 사과를 본다 I see an apple. 주어와 동사 그리고 목적어의 관계에서 잘 드러난다. “I” 의 존재를 발견한 사람은 데카르트이고 “see an apple”를 발견한 사람은 루소이다. 물론 이때 감각의 주체가 데카르트의 순수한 자아와 일치되는지 하는 문제는 남아 있다. 이를 후일 독일 철학이 더욱 분석하고 규명하여 엄청난 시스템을 만들었다. 일단 루소는 순수 자아(cogito)와 경험적 자아를 일치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런데 경험과 감각을 등장시킬 때 루소는 로크와 버클리 그리고 흄까지  인용한다. 지난 브런치 강의에서 우리는 루소와 영국의 경험론을 다루면서 로크부터 흄까지의 철학사를 정리했다. 

     

경험론의 시조 로크는 외부 경험과 내부 경험을 구분하나 버클리는 모두가 내부 경험이라고 한다. Esse est percipi. 루소는 그래서 “나의 감각은 모두 내부적이다” My sensations are all internal라고 한다. 이런 면에서 루소는 로크보다 버클리와 일치한다. 

그러나 루소는 여기서 머물지 않고 내부 경험의 원인이 외부에 있다고 한다.  이 점에서 루소는 버클리와 작별을 한다.  감각 혹은 지각이 모두 내부적이라고 한 점에서 버클리를 따라갔으나 그 지각의 원인은 (나의) 외부에 있다고 함으로써 오히려 로크의 학설을 따라간다. 그는 “감각의 원인은 외부적이고 나와 독립적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나의 동의 없이 나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라고 한다. 


루소가 로크보다 더 나은 점은 그가  감각 혹은 지각이 왜 정신(의식)에 독립적인지를 밝혔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바로 위의 구절, “그들(감각)은 나의 동의 없이 나에게 영향을 미친다”라는 사실이다. 로크는 감각 독립적인 사물의 존재를 상정하면서도 왜 그런지는 설명을 못했다. 따라서 루소는 '모든 감각은 내부적이다'라고 버클리의 관념론적인 입장을 받아들이는가 싶더니 곧 그것이 내부적이기는 하지만, 생각하는 나(cogito)와 무관하게 있는 것을 알고는 “감각의 원인은 외부적이고 나와 독립적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나의 동의 없이 나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게 루소의 천재적인 발상이다. 또한 감각 혹은 지각의 생산과 파괴(소멸)는 나에게 의존하지 않는다. 따라서 감각의 원인은 (생각하는 나의) 외부에 있다. 루소는 로크의 외적 경험과 내적 경험의 구분을 무시하더니 곧 그쪽으로 돌아온다. 


이런 면에서 루소의 사상은 독일의 피히테를 선구하고 있다. 자아가 비아를 정립한다는 피히테의 지식학(Wissenschaftslehre)의 기초의 제1, 2 원리를 미리 보여주고 있다. 


“자아(自我)는 스스로를 정립한다. 비아(非我)가 자아(自我)에 대립되어 스스로 정립한다”

이 사상은 루소의 데카르트 해석에 힘입은 바가 크다. 헤겔 역시 이런 사정을 알고 그의 “정신현상학”을 집필했다. 


피히테의 “학문 이론(Wissenschaftslehre) 서적

루소는 데카르트에 의해 발견된 자기의식 혹은 생각하는 자아의 원리를 영국 경험론의 지각 이론과 결부시킨다. 또한 흄의 관념(Ideas) 역시 나 밖의 존재로 보게 된다. (의식 초월적)

나뿐만 아니라 나의 감각 그리고 감각의 대상까지도 실재하는 것으로 정립된다. 


나의 감각들은 모두 내부적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나로 하여금 나의 존재를 지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각의 원인은 외부적이고 나와 독립적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나의 동의 없이 나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그들의 생산과 파괴를 위해서 나에게 의존하지 않는다. 나는 그래서 명백히 생각한다, 즉 감각은 내적이지만 그것의 원인 혹은 대상은 외부적이다. 즉 감각과 그 대상은 서로 다른 것이다. 
My sensations are all internal, as they make me sensible of my own existence; but the cause of them is external and independent, as they affect me without my consent, and do not depend on my will for their production or annihilation. I conceive very clearly, therefore, that the sensation which is internal, and its cause or object which is external, are not one and the same thing. 
Thus I know that I not only exist but that other beings exists as well as as myself; namely, the objects of my sensations; and though these objects should be nothing but ideas, it is very certain that these ideas are no part of myself.

여기서 루소는 대단히 천재적인 발상을 보여주고 있다. 데카르트가 발견한 최후의 분명한 대상으로서의 나의 존재, 생각하는 나의 존재를 발견하기는 했지만 이 역시 감성적 존재들을 부정하는데서 찾은 것이다. 따라서 생각하는 나의 존재는 실은 감성적인 경험에 의존한다고 볼 수 있다.  단, 그런 것들이 외부에 존재하는 실재(reality)가 아니라 나의 지각으로만 간주되면 이를 의심할 필요는 없다. 꿈이나 환상의 경우 그 객관성은 없지만 주관적 현실성마저 무시할 수는 없다. 꿈이나 환상의 경우 이들이 모두 내부적이다. 마찬가지로 “나의 감각들은 모두 내부적이다(혹은 내  안에서 일어난다)”. 우리는 꿈속에서도 나 자신을 의식한다. 즉 꿈의 세계의 주인공도 나 자신이고 나의 의식이다. 

지각의 세계 혹은 꿈의 세계에서도 우리는 감각적 이미지를 통해서 “나”라는 의식을 가진다. 감각은 내 안에서 일어나고 그로 인해 나는 나를 의식한다. 

     

결국 이 말은 ‘감각이 있으면 내가 있다’는 뜻이다. 이는 굉장히 의미심장한 말로서 엄청난 해석이 가능하나 우리는 당시 철학가들의 루소 수용을 통해서 대략 이해를 하자. 

     

우선 위대한 근대 철학자 독일의 칸트가 있다. 칸트는 보통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을 종합했다고 하는데 이게 실은 루소의 공로 덕분이다. 바로 위의 문장이 그것이다. 

     

이 점에서 루소는 칸트에 앞서 데카르트와 영국의 경험론을 결합시킨다. 또한 이것이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의 최고의 원리인 “내가 생각한다는 사실은 나의 모든 표상을 수반할 수 있어야 한다”를 예표(豫表)하는 것이다. Das: Ich denke, muβ alle meine Vorstellungen begleiten können. (KdrV. B 131~2)


꿈의 세계에도 “나”는 존재한다.

루소는 데카르트와 정반대로 지각 혹은 꿈 때문에 자기의식(cogito)이 생긴다고 본다.  지각(감각)이나 꿈이 없이는 자기의식도 없다는 것이다. 

덧붙여 이미지가 없는 “순수한 사유의 세계”, 예를 들면 말이나 문장 같은 것 “지구는 태양 둘레를 돈다”, 혹은 “2 + 2 = 4” 같은 순수 사유의 경우 나 혹은 자기의식이 필요하다.  

 

대략 이런 것이 루소의 짧은 문장들의 내용이다. 

이처럼 루소는 데카르트와 정반대로 감각이나 꿈속에서  도리어 자기의식(=나=cogito)을 찾아낸다. 이것은 획기적인 발상이다. 이를 통해서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의 핵심인 “통각의 근원적, 종합적인 통일”과 그 후의 독일의 관념론이 근본적으로 가능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들은(=감각나로 하여금 나의 존재를 지각하게 만든다”. 


데카르트의 경우 생각하는 나 cogito의 원리 하나를 발견한 다음은 바로 세계의 존재를 정립하는 방향으로 나간다. 즉 그는 “나“를 발견하고는 그다음 나의 추론을 통해서 신(神)을 도출한다. 그리고 이번에는 신을 통해서 외부 세계의 실재성을 도출한다. 


“하나의 무한하고 전지전능한 존재로서의 신(神)은 외부로부터의 지각 작용에서 온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유한한 존재로서의 내가 어떻게 완전한 무한자적 본질을 나 홀로의 힘으로 짜낼 수 있는가” (쉬퇴리히 세계철학사 하(下)권 58쪽)  또한 데카르트는 “완전한 존재란 언제나 필연적으로 성실함을 그 속성(屬性)으로 하고 있다”라고 하며 외부 세계의 실재성을 인정하고 있다.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라는 철저한 문제의식에  비교하면 그의 외부 세계 도출은 논리적으로 좀 엉성하다는 느낌을 준다. 


루소 역시 처음에는 데카르트의 원리를 긍정하고 그에 대한 타자로서의 감각을 긍정했으나 곧 그는 정반대로 감각에서 출발하여 거기서 나의 존재를 도출한다. 루소의 생각이 다소 변화된 듯하다. 


루소는 감각이 나를 느끼게 해준다고 한다. 그는 또 감각의 원인은 내 안에 있지 않다. 그 원인은 외부적이고 독립적이다 라고 하다. 그 이유는 그들이 나의 동의를 받고 있지 않다. 곧 내가 나의 감각을 생산하거나 파괴할 수 없다 따라서 그들의 원인은 내 밖에 있다. 루소는 감각의 “원인”을 동시에 “대상(object)”이라고 한다. 어쨌든 감각의 원인 혹은 대상은 독립적이고 외부적이다. 그 이유도 명백하다, 곧 감각이 나에 의해 창조되지도 않고 파괴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사실 여기서 엄청난 논리적인 도약이 있다. 이들 즉 루소가 말하는 감각의 원인이나 대상은  칸트의 어법을 따르면 물자체(物自體) Ding an sich에 해당하는 것이다. 

칸트는 이 물자체(物自體) Ding an sich에 대한 인식은 불가능하다고 보는데 루소는 그렇지 않다. 뒤에 나오는 서술들을 보면 물질(matter) 운동(motion) 등이 바로 감각의 원인이나 대상에 해당한다. 칸트 같으면 이런 개념들은 물자체가 아니라 경험적 혹은 감성적 개념에 해당한다. 


루소는 또한 감각의 원인 혹은 대상을 관념(idea)라고도 한다. 이 관념 역시 당연히  감각이나 지각은 아니다. 


요약하면 루소는 “감각은 주관적이나 그 원인 혹은  대상은 객관적이다”라고 한다.  칸트는  이와 달리 대상의 대상성 확정을 위해서는 통각이 범주를 감각에 투입한다는 이론을 제시한다. 이는 칸트의 위대한 업적이 된다. 루소는 거기까지는 가지 못했다. 


루소의 원인 = 물질 = 칸트의 물자체


루소는 칸트와 달리 대상 즉 물자체가 바로 물질, 운동 등의 개념이라고 한다. 

이 역시 중대한 사상이다. 여기에 대한 후세의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우리는 일단 루소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따라가자. 감각의 원인으로서의 대상(object)은 관념(idea)인데 그 중요한 관념이 물질이다. 이런 면에서 루소는 흄을 반대한다. 


여기서 루소는 흄의 인상과 관념의 관계를 역전시키고  있다. 흄에 의하면 생생한 경험이 인상(impression)이고 이 인상들을 우리의 의식이 복사한 것이 관념(idea)이다. 


그러나 루소는 그 반대이다. 관념이 오히려 인상(=감각)의 원인이다. 이 주장이 옳은 지는 별개로 해야 한다. 어쨌든 루소의 주장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루소는 자기의식과 감각 그리고 감각의 대상(원인)의 상호 연관성을 밝혔다. 그래서 루소는 종래까지 서로 대립되었던 유물론(실재론의 일종)과 관념론을 화해시킬 수 있다고 자랑한다. 그는 우선 자신의 감각에 작용을 가하는 것을 물질이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물질이 개체화된 것을 몸이라고 한다. 


유물론과 관념론의 대립은 허상이고 또 현상(appearance)과 본체(reality)의 대립 역시 근거가 없는 것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아래의 문장이 말하는 것처럼 “나 밖에서 내가 지각하고 나의 감각에 영향을 주는 것을 나는 물질이라고 부른다” 이기 때문에 유물론과 (버클리류의) 관념론의 대립이 해소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는 필자의 생각에는 여전히 의문점이 남아 있다. 즉 “나 밖에서 내가 지각하는 것”이라는 표현이다. 이는 의식 초월을 말하는 것이고 독단적이라는 비난을 받을 수 있다. “의식의 초월과 내재”라는 테마는 여전히 논쟁 중이다. 


루소의 유물론과 관념론의 지양은 칸트에 와서야 비로소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루소의 관념론-유물론 대립 극복은 칸트의 사상을 선취(先取)하는 것이다. 칸트는 자신의 “순수이성비판”을 통해서 유물론이나 관념론 등 종래의 각종 사상들이 그 지반을 잃을 것이다 라고 주장한다. 

Now everything that I perceive out of myself, and which acts upon my senses, I call matter; and those portions of matter which I conceive are united in individual beings, I call bodies. Thus all the disputes between Idealists and Materialists signify nothing to me; their distinctions between the appearance and reality of bodies being chimerical. (관념론과 유물론의 대립 지양)


◉ 루소와 칸트


위에서 본 것처럼 루소는 데카르트의 자기의식 원리를 수용하나 즉시 감각에 의해서 자기의식이 영향을 받고 있다고 하고 그다음에는 그 감각의 대상은 의식 밖에 있다고 한다. 실제로 이것이 칸트의 이성비판의 근본 사상이다. 즉 자기의식은 감각과 항상 결합되어 있다. 감각은 그 대상을 자기밖에 가지고 있다. 칸트의 위대한 종합적 사유의 원리가 바로 이것이다. 


이것이 칸트에 가서는 모든 감각(표상)에 동반하는 자기의식( Ich denke, cogito)라고 나타난다. Das: Ich denke, muß alle meine Vorstellungen begleiten können. 여기서 표상이란 관념(idea)과 같은 말이다. 이를 통해서 칸트는 대상과 의식을 교묘하게 결합시킬 수 있었고 이를 통해서 의식의 확실성도 확보하여 독단론의 비난을 벗어나서 객관적 지식의 가능성을 철학적으로 규명한 업적을 정초한 것이다. 이런 칸트와 그 후의 독일의 관념론 발전을 가능케 한 것은 모두 루소의 에밀에 나타난 사보이 신부의 신앙고백이라는 작은 부분 덕분이다. 

칸트에 관한 에피소드 중 그가 새벽 5시에는 산책하는 습관을 평생 한 번도 깬 적이 없었는데 한 번은 루소의 저서를 읽다가 그 유명한 습관을 깨트린 적이 있다고 한다. 그게 바로 루소의 에밀이다. 

또한 이를 통해서 칸트 철학의 전기 독단주의에서 흄적인 회의주의의 세례를 받고 방황하다가 다시 학문적인 철학을 하게 한 근본적인 통찰을 루소가 만들어 준 것이다. 

즉 감각을 통해서 감각 안에서 오히려 나(cogito)를 알 수 있고 둘은 항상 붙어 있다는 것, 뗄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감각의 원인은 나 밖에 있다는 루소의 교훈이 독일 철학의 발전을 가져온 근본적인 원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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