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리학과 형이상학의 성립]
파르메니데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과 형이상학의 성립]
저자 : 안재오
서문
형이상학은 그간 부당한 공격을 많이 받아왔다. 독일의 위대한 철학자 임마뉴엘 칸트(I. Kant)가 형이상학을 독단적인 이론으로 낙인을 찍은 후부터 이 학문은 비과학적이고 초월적인 대상을 이러쿵 저러쿵 서술한다고 간주되어왔다. 형이상학은 이른바 신(神), 영혼(靈魂) 그리고 자유(自由)에 대한 자의적(恣意的)인 믿음을 표출한다는 비판이었다. 이런 비판은 나름대로의 합리적인 이유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2500년 역사를 가진 서양 철학과 또 형이상학을 살펴보면 이런 류(類)의 주장이 일방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신(神), 영혼 그리고 자유 등의 주제가 형이상학의 모든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들은 형이상학의 일부 주제에 불과하다. 이들은 소위 특수 형이상학이라고 불린다. 이들은 형이상학의 응용학문이다. 진정한 형이상학은 「일반 형이상학」 혹은 존재론(Ontology)라고 한다.
[각주 1: 이런 분류를 한 사람은 독일의 철학자 크리스티안 볼프(Christian Wolff)이다]
일반 형이상학 혹은 존재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유명한 문장, 즉 「있는 것을 있는 것으로 다루는 학문」이다. 그리고 이런 학문은 지금도 마음대로 비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형이상학의 고유한 주제는 이처럼 신(神)도 아니고 영혼(靈魂)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존재를 존재」로 -being qua being- 다루는 것이다.
또는 존재 일반을 다루는 학문이 형이상학 내지 존재론이다.
더 나아가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제는 파르메니데스의 공리(公理), 즉 「있음은 있다, 없음은 없다」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는 변화와 생성 그리고 비존재 혹은 무(無)를 논리적으로 부정한다. 파르메니데스는 무(無)를 부정한다. 그러나 그런 만큼 무(無)에 대한 많은 고찰을 보여준다. 따라서 역설적으로 그가 그토록 부정한 무(無) 혹은 비존재(non-being)가 그 다음부터 철학의 심오한 주제의 하나로 그 격상된다.
서양철학 2500년 역사의 큰 이정표인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과 『논리학』의 형성 과정을 추적하는 것이 이 책의 목표이다. 그런 과정에서 무(無) 혹은 비존재(non-being)의 문제가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를 밝히는 것이 또한 본 연구의 중심적인 과제이다.
파르네니데스의 사상은 철학사적으로 대단히 중대하다. 그의 업적을 밝히는 것이 본 저서의 목적기기도 하지만 미리 간략히 말한다면 크게 다음의 4가지 이다: ①프로타고라스로 대변되는 소피스트들의 궤변론의 논거를 제공했다. ②다원론자들의 궁극적인 실재(reality) 즉 원자, 원소 등의 개념 형성에 기여했다. ③플라톤의 형상이론에 큰 기여를 했다. ④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과 『형이상학』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서도 파르메니데스가 종종 등장한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아리스토텔레스는 파르메니데스와의 치열한 대결을 통해서 그의 사상의 기초를 놓았다. 그는 존재 개념을 통하여 진리론을 정초하고 비존재 개념을 통하여 가능태, 현실태 등의 형이상학적인 개념을 정초한다.
그러나 『형이상학』의 전제가 되는 것이 『소피스트』이다. 지금까지는 『소피스트』를 플라톤의 저서로 보았기 때문에 존재와 비존재에 관한 정확한 이해가 불가능했다. 그가 학문적인 거인 파르메네데스의 존재-일원론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해체하여 내 놓은 결과가 『형이상학』의 성립이다.
다시 말해서 『형이상학』의 준비 혹은 형이상학과 대등한 아니 어떤 경우는 형이상학을 능가하는 것이 『소피스트』이다.
특히 존재(being)와 비존재(nonbeing) 그리고 존재(being)와 일자(one) 등의 상호관계에 대한 엄청난 분석이 『소피스트』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따라서 그간 플라톤의 저작으로 알려진 『소피스트』 대화편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돌리는 것이 합리적이다.
[각주 2 “무(無)가 ㅡ어떤 의미에서는ㅡ 있다”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뿐만 아니라 『논리학 logic(=organon)』 그리고 『물리학 (physics)』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존재와 무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두 기둥이다.]
비존재를 다시 존재로 끌어 올리는 일은 또한 굉장히 힘든 길이었다. 왜냐하면 「비존재가 있다」 혹은 「무(無)가 있다」는 언어적 표현은 자기 모순을 ㅡself-contradictionㅡ 범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이유로 파르메니데스는 비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 문제는 아직도 실은 완전히 풀린 것이 아니다.
따라서 형이상학의 위대한 주제는 바로 존재, 무(無) 그리고 생성(生成)이다. 이런 개념들에 대해서 사고하는 것이 형이상학의 본령(本領)이다.
이런 지평에서 출발하여 다시 변화, 생성, 소멸하는 현상계와의 관련성을 추구하는 것이 또한 형이상학의 할 일이다. 그런 가운데 위에서 말한 특수 형이상학도 등장한다. 그러나 그건 것들이 현실에서 아무리 중요하긴 해도 형이상학의 지평에서 볼 때는 하나의 파생학문 내지는 응용학문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 지식들은 공격을 당할 요소가 많이 있다. 아마도 칸트의 말처럼 과학적 철학으로 불가능할 지도 모른다. 그들은 경험의 한계를 넘어가는 부분이 있다.
파르메니데스에서 비로소 시작하는 존재론 혹은 일반-형이상학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엄청난 사유의 노력을 통해서 비로소 그 완성된 모습이 나타난다.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이란 저서이다. 「존재를 존재로서 탐구한다」 즉 어떤 특수한 존재가 아니라 존재 일반에 대한 과학적 진술의 체계인 것이다. 필자의 관점에서 이런 형이상학은 바로 파르메니데스, 플라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를 통하면서 비로소 그 모습이 파악이 된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이 『파르메니데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ㅡ논리학과 형이상학의 성립』이다.
그러나 파르메니데스의 존재 일원론은 위에서 말한 바 프로타고라스로 대변되는 소피스트들의 궤변론의 논거를 제공했다는 것도 큰 문제였다.
이 문제를 푸는 과정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비존재 혹은 무(無)의 의미를 변화시킨다. 그것은 ① 분리(分離) ② 다수(多數) 란 것이다. 즉 비존재란 문자 그대로 비존재, 없음이 아니라 「분리와 다수」라는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즉 「무엇이 없다」는 것은 진짜 없다는 것이 아니라 예를 들어 「어떤 장소에 없다」는 것이다. 또 「무엇이 아니다」 라고 할 때 이는 무엇이 아닌 다른 많은 것들을 지시한다는 뜻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철수는 없다」 라고 할 때 이는 「철수가 집에 없다」 혹은 「철수가 학교에 없다」라는 상황에서 말하는 것이다. 철수와 학교 라는 두 개의 존재가 결합이 안 될 때 우리는 없다 라고 한다. 또 「하늘이 푸르지 않다」라고 할 때 이는 단순히 푸르지 않다와 더불어 실은 그와 다른 색깔임을 의미한다. 즉 하늘이 푸른 색이 아니라 그 밖의 수많은 다른 색들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이를 후대에는 무한판단
이라고 한다.
[각주 3 : 임마뉴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B 97 참조 「영혼은 가사적(可死的)이 아니다」라고 할 때 이는 영혼이 가사적이다(mortal)를 부정하지만 동시에 불가사적인(immortal) 어떤 다른 것의 집단에 포함시키다는 긍정적인 의미가 있다.]
비존재(nonbeing)는 또한 부정(negation)과 연결된다. 즉 「아닐 비(非)」는 부정을 말한다. 이를 통해서 비존재 혹은 부정이 존재의 속성이 될 수 있다. 이른 비존재를 결성(privation) 이라고 한다. 비존재가 –어떤 의미에서- 존재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이것이 이제는 존재(실체)의 한 속성으로 전락한다. 여기서 비로소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의 큰 특징인 현상계의 변화와 운동을 폭넓게 인정하게 된다. 가능태와 현실태의 사상이 이런 부정과 비존재의 인정과 맞물린다. 결론적으로 비존재와 부정의 인정이 형이상학과 논리학의 초석임이 드러난다.
그러나 이런 과정은 헤겔이 말한 바와 같이 「세계 역사의 무시무시한 노동」 –die ungeheure Arbeit der Weltgeschichte) 을 통해서 이루어 진 길이다.
형이상학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존재를 존재」로 다루는 학문이기도 하지만 그런 과정에서 형이상학은 존재(存在)의 대립자 즉 무(無) 혹은 비존재(非存在) 문제를 함께 탐구한다. 그리고 존재에서 무로의 이행(移行) 즉 생성(生成)이 있다. 그런 면에서 형이상학은 존재, 무, 생성에 대한 학문이다.
[각주 4 : 「생성」 부분이 따로 독립하면 물리학 혹은 자연철학이 된다.]
근대에 와서 헤겔의 철학 시스템이 이런 사정을 잘 반영한다.
[각주 4: 헤겔의 형이상학 시스템인 『논리학, Wissenschaft der Logik』은 이런 질서와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즉 유(有)-무(無)-성(成)으로 진행된다.]
그러나 존재와 무에 대해서 서술한다고 해서 그런 시도가 다 형이상학이 되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과학 혹은 학문에 대한 기초가 필요하다. 즉 지식론 혹은 인식론이 우선적으로 규명이 되어야 한다.
[각주 5: 과학과 학문은 같은 말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과학은 자연과학을 말하고 학문은 인문 과학을 말하는 수가 많으나 실은 둘 다 서양의 science를 옮긴 말이다.]
이런 시도를 처음으로 한 사람은 플라톤이다. 특히 그의 비교적 초기의 저서 『테아이테토스』와 『에우튀데모스』에서 이런 일이 수행되고 있다.
이런 플라톤의 학문을 더 발전시킨 사람이 아리스토텔레스이다. 후자가 쓴 『소피스트』 편에서 지식의 문제가 더 탐구된다. 『소피스트』 편에서 중요한 도약적인 발전은 비존재를 인정한 것이다 : 그의 스승 플라톤은 파르메니데스주의를 벗어나지 못했다. 즉 그는 「무는 없다, 그것은 인식할 수도 말할 수도 없다」 는 파르메니데스의 일원론을 답습한다. 그런 이유로 플라톤은 그가 시도한 인식론을 완성하지 못하고 난제(難題) aporia로 남겨 두었다. 그 이유는 파르메니데스의 존재 일원론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테아이테토스』에 나타난 새장의 비유를 보면 플라톤은 오류를 착각으로 본다. 즉 A를 B로 보는 것이 오류의 원인이라고 본다.
그러나 문제는 한 때 A를 알고 있던 사람이 무슨 이유로 그것을 알지 못하고 B라고 아는 경우이다. 즉 소크라테스를 심미아스라고 인식하는 경우이다. 다시 말하면 착각 현상은 실은 무지(無知)로 환원된다. 여기서 말하는 무지는 원천적인 무지가 아니라 한 때 안 것을 다른 때에 모르는 것이다. 이를 작중의 소크라테스는 “보는 사람이 맹인이 되어 보지 못한다” 고 표현한다. 사실 이런 경우는 일상 생활에서 종종 경험하는 현상이다. 또 더 나아가서 무지(無知)란 것이 우연적인 현상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 즉 영혼 속에도 있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런 면에서 플라톤의 인식론은 한계에 부딪힌다. 그러나 플라톤은 이 문제를 더 깊이 고찰하지 않고 바로 이데아론으로 비약한다. 스승이 다 풀지 못하고 버려둔 무지와 거짓말 혹은 오류의 문제를 다시 꺼집어 내어 발전시킨 것이 결국 소피스트 편 즉 「비존재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형이상학의 발전사라는 측면에서 필자는 『국가』보다 『테아이테토스』를 더욱 중요하게 본다.
뒤에서 자세히 서술하겠지만 플라톤이 『테아이테토스』를 쓴 목적은 다시 유행하던 소피스트들의 궤변 즉 「거짓말은 없다」, 「오류란 없다」 혹은 「무슨 말이든 다 진리이다」는 사상을 반박하기 위해서였다.
파르메니데스의 존재 일원론이 중요한 이유는 위의 모든 논변들이 거의 다 그의 사상 즉 「있는 것은 있다, 없는 것은 없다」, 또 「있는 것은 알 수 있고 말할 수 있다 없는 것은 알 수 없고 말할 수 없다」 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소피스트들 역시 이를 이용하여 그들의 상대주의 논변을 펼쳐 나갔다. 즉 「없는 것은 생각할 수도 말할 수도 없다」는 파르메니데스의 주장을 이용하여 「말할 수 있는 것은 다 진리이다, 거짓이 없다」, 「무슨 주장이든 다 참이다」 등으로 비약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