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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석훈 May 06. 2024

옷의 여행

이 옷이 당신에게 닿기까지

자주 입는 카디건이 있다. 무난하지만 심심하진 않은 디자인에 어떤 바지와도 잘 어울려서 손이 많이 간다. 잠이 덜 깬 상태에서 주섬주섬 옷을 입었다. 순간 멍해졌고 시선이 멈춘 곳에 그 카디건이 있었다. 입으려 꺼냈는데 잠깐 까먹었다. 카디건 조직감이 보인다. 실을 꼬아 한자 八 모양으로 쭉 나열되어 있다. 그래서 이 원단을 일본어 숫자 8, 즉 하찌라고 부른다.


이걸 풀어내면 그냥 실뭉치가 되는 거지. 내 옷장에 걸리기 전, 이 카디건은 옷가게 행거에 걸려있었다. 그전엔 창고에 있었으려나, 그전엔 본사, 공장, 그전엔 실뭉치였을 것이다. 그전엔. 다음에 알아보자. 아무튼. 여러 과정을 거치며 옷은 비싸진다. 옷이라고 해봤자 결국 실뭉치다. 그런데 왜 800그램짜리 헤비웨이트 스웻셔츠가 돼지고기 800그램보다 비쌀까. 돼지를 기르는데 돈이 더 들 텐데. 


가공, 유통, 마케팅, 디자인 등의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보편적으로 의류가 비싸지는 가장 큰 이유는 유통이다. 세상엔 너무 많은 옷이 있고 그 옷들이 우리 눈에 띄려면 오프라인, 온라인 가리지 않고 걸려있어야 한다. 찾아보면 돼지고기보다 싼 옷이 있다. 보통 그런 옷은 눈에 잘 띄지 않는, 변두리 헹거에 걸려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게 아니라면 팔고 남은 재고일 것이다. 옷은 트렌드에 굉장히 민감하다. 옷가게 맨 앞줄에 걸린 새 옷도 팔리지 않은 채로 1년이 지나면 가치가 절반이 된다. 반대로.  없어서 못 사는 옷은 정가보다 비싸게 리셀 된다.


옷은 원가 대비 소비자 구매 가격이 비싸다. 브랜드 입장에서 좋은 원단을 공들여 가공해서 싸게 유통한다면. 그건 좋은 기업이 아닐 것이다. 돼지를 기르는 데 돈이 더 든다고 했지만 아닌 경우도 있을 것이다. 환경에 민감한 희귀 품종의 양을 사육하려면 큰돈과 인력이 들어간다. 그렇게 얻은 털을 고르고 골라 가공해 옷을 만든다. 비싸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또 어떤 옷은 무형의 가치를 지닌다. 디자이너의 고뇌와 진념이 옷에 담기고 그 가치가 인정된다면 그 옷은 원가 이상의 가치를 얻는다. 업계의 흐름에 올라탈 수도 있고 운과 실력이 더 따라준다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할 수도 있다. 그렇기에 같은 옷이라도 가격이 수 십, 수 백배 차이가 난다.


옷의 가치는 유동적이다. 싼 옷도 비싸질 수 있고 비싼 옷도 저렴해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본인이 그 가치를 아는 것. 비싼 옷이 왜 비싼지 알 수 있다면 쓸데없이 비싼 옷을 피해 정말 그 가격만큼의 가치를 지닌 옷을 구매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저렴한 옷의 가치를 안다면 괜찮은 옷을 저렴한 가격에 득템 할 수 있다. 옷의 여정을 할 수 있다면 우리는 더 합리적인 소비를 할 수 있다. 고작 실뭉치에 불과한 그 옷들을 조금 더 애정 어린 눈으로 볼 수만 있다면. 이 옷이 당신에게 닿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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