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늘도 맑음 Feb 24. 2023

롤케이크 한 조각의 행복

지난 일주일의 수고를 스스로 보상해 주세요 

그날의 사무실 풍경도 여느 때와 다르지 않았다. 창을 통하여 따사로운 햇살이 비치는 실내엔 컴퓨터 자판 소리만 불규칙적으로 들려올 뿐이었다.     


“점심 어떻게 하실 거예요? 써브웨이 시켜 먹는 거 괜찮으세요?” 정적을 깨고 그녀가 내게 물었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열한 시 반이 넘었다. 

“어. 좋아.” 내가 대답했다.


이십여 분 후 우리가 주문했던 점심이 도착했다. 우리는 사무실 한쪽 테이블에 엇갈려 앉아서 말없이 샌드위치를 먹었다. 짧은 식사가 끝난 후, 각자 자리로 돌아갔고 오후 업무가 시작되었다. 사무실은 다시 적막감에 묻혔다. 

코로나 확산이 잦아들었다고 더 이상 치명적이지 않다고 하지만, 며칠 전 사무실 근무자의 확진 소식 이후 우리는 외식도 대화도 자제한 채 각자 업무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날 나는 퇴근 전까지 예산 변경 사항을 정리해서 제출해야 했다. 숫자와 관련된 업무는 언제나 신경을 곤두서게 만든다. 한창 업무에 집중하고 있을 때, 그녀가 조용히 내 옆에 다가와 뭔가를 내밀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접시에 롤케이크 한 조각이 올려져 있었다. 


롤케이크가 선물로 들어왔는데 집에는 먹을 사람이 없어서 사무실로 가져왔다, 는 한마디를 남기고 그녀는 자리로 돌아갔다. 풍성한 연보랏빛 크림을 둘러싸고 있는, 부드러워 보이는 카스텔라 빵의 단면이 눈에 들어왔다. 크림 위에는 푸른 기가 채 가시지 않은 딸기 하나가 촌스럽게 올려져 있었다. 색감이며 딸기 장식이 요즘 케이크처럼 세련되지 않았다. 인스타에 등장하는 세련된 케이크보다는 70년대 복고풍 케이크에 가까운 외형이었다. 

     

‘너무 달지 않을까? 크림 색깔이 너무 촌스럽잖아?’ 속으로 생각하며 나무젓가락으로 조심스레 롤케이크 한 조각을 떼어 입 안에 넣었다.

 

앗! 맛있다. 너무 맛있어서 정신이 바싹 들었다. 유치한 단맛일 거로 생각했던 크림은 과하게 달지 않으면서 입 안에서 솜사탕처럼 녹아들었다. 연보랏빛 크림을 둘러싸고 있는 빵은 구름처럼 가벼우면서도, 부드럽고 폭신한 질감이 입 안에서 은은하게 느껴졌다. 외형만 보고 70년대 복고풍의 롤케이크 맛일 거라고 단정했던 내가 민망할 지경이었다. 


롤케이크 한 조각을 입에 넣은 순간 나는 행복감에 가득 찬 나머지 주변의 모든 것이 사랑스러워졌고, 어떠한 문제도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은 너그러움이 부풀어 오르는 빵 반죽처럼 내 마음에 차 올랐다. 

     

“가영 씨! 롤케이크 너무 맛있어. 잘 먹었어.” 그녀에게 잘 먹었다는 인사를 했다. 진심이었다. 그날 그녀가 가져온 롤케이크 한 조각은 여느 날과 다를 것 없는 평범하고 무미건조했던 나의 하루를 특별한 하루로 만들어주었다.          




롤케이크 한 조각을 입에 넣었을 때의 환희를 잊을 수 없어서, 다음날 집에 가는 길에 백화점에 들러 롤케이크를 샀다. 사무실 직원이 가져왔던 딸기 장식이 화려하고 유치한 색감의 크림이 들어있는 롤케이크를 사고 싶었으나, 내가 들른 제과점은 빵 겉면에 크림이 묻어있지 않은, 그저 빵에 잼을 바르고 돌돌 말아놓은, 일반적인 롤케이크뿐이었다.  그것도 괜찮았다. 전날 롤케이크 한 조각을 입 안에 넣었을 때의 그 행복감을 다시 느낄 수 있다면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롤케이크를 사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설레기까지 했다.     


어린 시절 나는 늘 토요일을 고대했었다. 토요일 저녁엔 엄마가 일품요리를 만들거나 아빠가 통닭을 사 오셨기 때문이었다. 특별한 저녁을 먹고 난 후에는 둘러앉아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이 우리 가족의 즐거운 토요일 저녁을 보내는 방법이었다.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토요일 저녁이 더없이 행복했고, 그 행복감은 지금도 내 어린 시절 기억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되돌아보니 너무 오랫동안 무미건조한 일상을 보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먹을 것이던, 입을 것이던, 생활 속에 소소한 물건이던 언제든지 원하는 대로 손에 넣을 수 있는 일상이 되니 소소한 것이 주는 행복감을 느끼지 못한 지 꽤 오래된 것 같았다. 그날 사무실 동료가 준 롤케이크 한 조각에서 잊고 있었던, 내 어린 시절 토요일 저녁의 행복감이 소환되었던 것이다.     


집에 돌아와서 내가 사 온 롤케이크 한 조각을 떼어 입에 넣으며 생각했다. 지금부터 내 일상을 좀 더 살펴보고, 소소한 것에도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습관을 키워야겠다고. 어린 시절처럼 토요일 저녁마다 일주일을 고생한 나 자신에게 작은 선물을 하는 것도 좋겠다. 케이크 한 조각이던, 잘 익은 제철 과일이던, 새롭게 개봉한 영화 한 편이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