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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도 맑음 Nov 30. 2024

투명 플라스틱 컵 속의 호야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야!

내가 근무하는 건물 이 층은 우리 사무실만 입주해 있다. 따라서 이 층에 있는 화장실도 몇 안 되는 우리 팀원들만 사용한다. 


지난주에 무심코 화장실을 들어서는데, 뭔가 화장실에 평소와 다른 기운이 느껴졌다. 화장실을 둘러보던 나의 시선은 창가에 놓인 화분에 머물렀다. 투명한 플라스틱 컵 안에 흙이 화초 뿌리에 덩어리째로 붙어있는 작은 화분 두 개가 나란히 창가에 놓여 있었다. 멋진 화분에 심어있는 것도 아니었고 풍성하게 자란 화초도 아니었지만 공연히 기분이 좋아졌다. 그날 화장실에 있던 두 개의 화분은 적어도 내게는 삭막한 사무실 안에서 청정한 공기를 뿜어내는 공기청정기 같은, 후덥지근한 여름밤 훅 불어 보는 시원한 한 줄기 바람 같은 그런 존재였다.  

        

그 후로 나는 화장실에 가면 늘 화분 앞에 서성거리며 얼마나 자랐는지 확인해 보았다. 하지만 나의 관심과는 달리 화초는 늘 제자리였다. 때로는 물을 주었고, 때로는 햇빛을 좀 더 많이 받도록 위치를 조금 움직여주기도 했다. 사무실은 동향이기에 아침에 출근하면 따사로운 햇살이 사무실 안에 가득 차 있었지만, 화장실 창문은 동북향이어서 해가 깊게 들어오지 않는다. 나는 햇빛이 부족한가 싶었지만 어쩔 도리는 없었다. 그렇게 오가며 지켜보았지만, 화초는 늘 그대로였다.      

    

나는 화초 기르는 것을 좋아한다. 어린 시절 집에 많은 화분을 보고 자란 탓이다. 하지만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은 달랐다. 나는 화초 기르는 것을 좋아하지만 잘 기르는 편이 못되어 종종 화초를 죽였다. 몇 년 전에는 집안 인테리어를 위하여 큰 화분 하나를 산 적이 있었다. 화분이 마음에 들었던 나는 거실을 오가며 눈에 띌 때마다 화분에 물을 주었다. 집에 들인 지 서너 달이 될 무렵 진한 초록색의 넓적한 잎들이 가장자리부터 누렇게 변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물이 부족해서 잎에 누렇게 뜨는 줄 알고 계속 물을 주었다. 하지만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다. 오히려 누렇게 뜬 잎들이 힘없이 떨어져서 나갔고, 잎이 몇 개 붙어있지 않은 앙상한 가지만 남게 되었다.          


나는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역할에 충실한 지역 커뮤니티 사이트에 화분 사진을 올렸다. 누군가 ‘과습’이라고 대답해 주었다. 아! 내가 너무 물을 많이 주었구나, 뒤늦게 깨달았다. 그 후에는 물 주는 것을 게을리하리라, 마음먹었다. 그리고 한동안 화분의 존재도 잊고 살았다. 시간이 한참 흐른 후 이번에는 화초의 잎들이 도르르 말려있는 것을 발견했다. 한눈에 보기에도 수분이 부족해서 잎이 넓적하게 펴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제는 일주일에 한 번씩 물을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잊지 않으려고 물 주는 날을 주말로 정했다. 이후에 잎들의 상태는 좀 나아졌지만 예전만은 못했다. 그게 작년 가을 일이었다.

          

겨울이 되었다. 어느 날 나무 끝에 새싹이 수줍게 정수리를 내밀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드디어 새싹이 나오는구나, 이제 건강한 청록색 잎이 활짝 펼쳐지겠지, 생각했다. 일주일에 한 번, 물 주기도 열심히 했다. 그런데 새싹이 자라기를 멈춘 듯했다. 연말 지나고 새해가 되었고 2월이 지났다. 지난 겨울 초에 정수리를 비쳤던 새싹은 더 자라지도, 활짝 펴지지도 않고 늘 같은 상태였다. 이대로 죽은 것이 아닌지, 조바심이 났다. 아깝게 화분을 또 죽였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가끔 창문을 열어 통풍이 잘되게 해 주는 것, 날이 좋은 날 직사광선이 내리쬐면 반투명 시폰 커튼을 드리워 주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또 시간이 지났다.          


지난 일요일 방 청소를 하다 무심코 화분을 보았다. 새싹이 훌쩍 자라 있었다. 전에는 어린 새싹이 수줍게 머리를 내밀었다면, 이젠 새싹이라고 하기 머쓱할 정도로 키가 훌쩍 커 있었다. 그때 깨달았다. 화초는 겨우내 새싹을 키우기 위하여 흙 속에서 뿌리들이 열심히 양분을 빨아들이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필사의 노력을 했다는 것을. 건조하고 추웠던 지난 겨우내 화초는 새 생명을 키우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했던 것이다.           

언젠가 읽었던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글귀가 떠 올랐다. ‘날씨가 좋으면 좋은 대로, 날씨가 궂으면 굳은 대로 다 이유가 있다’며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고 거실에 놓인 화분이 내게 말해주는 듯했다.          

오늘 낮 미화 여사님과 복도에서 마주쳤다. 나는 화장실에 있는 화분이 너무 이쁘다고 화장실 분위기가 달라졌다고 말해주었다. 여사님은 내 말에 반색했다. 다른 층에서 화분을 버렸는데 화초가 죽은 것 같지 않아서 플라스틱 컵에 넣어 가져다 놓았다고 묻지도 않은 설명을 덧붙였다. 나는 사무실로 돌아와 화장실에 있는 화초 이름을 검색해 보았다. 인터넷에 올라온 '호야' 사진과 비슷했다. 호야. 가만히 발음해 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지금 흙 속에 있는 호야의 뿌리들도 살아내기 위해 최선을 다 하고 있는 중일 거라고. 언젠가 컵이 비좁아지도록 자라면 집에서 빈 화분을 가져와 분갈이를 해 주어야겠다고. 오래도록 호야를 볼 수 있도록.     


(2023년 1월에 쓴 글이다. 이 글을 쓰고는 왠지 공개하지 않고 비공개로 '작가의 서랍'에 넣었는데, 오늘 거진 일년 반만에 브런치에 들어와보니 많은 글이 '작가의 서랍'에 보관되어 있었다. 다시 고칠 것도 아니면서 왜 글을 쓰고 비공개로 보관하고 있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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