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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꼬양 Aug 18. 2015

바다의 어멍, 제주 해녀들의 삶 엿보기

특별한 제주여행. 제주해녀박물관

여름이면 대부분 바다로 더위를 피해 휴가를 떠난다. 

관광객들로 가득 찬 제주의 바다는 여름을 만끽하는 그들이 꼭 주인공인 것 같다.


우리는 여행으로, 마음의 위안을 얻고자 가는 바다지만, 

어떤 이에게는 거칠고 험한 제주의 바다가 삶, 그 자체다.


어쩌면 바다의 어멍(엄마), 해녀들이 제주바다의 주인공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제주가 고향이라 자주 가고, 바닷가 동네에 살고 있기에 해녀들을 자주 봐왔다.

동네바닷가에서 문득 물질을 하는 해녀 할머니들을 보니 왠지 모를 울컥함이 치밀어 올랐다.


그리하여 찾은 해녀박물관.

입장료 1,100원인데, 왠지 모르게 돈을 더 내야 할 듯한 기분도 들었다.


그 속에는 제주도도, 해녀도, 모두 다 있었다.

해녀의 살림살이

해녀박물관에서는 제주의 세시풍속과 해녀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해녀의 집에 전시된 유물은 이남숙 해녀(1921~2008)가 사용했던 생활용품이다. 


이남숙 해녀는 일제강점기 제주시 구좌읍 평대리에서 태어나 한 평생을 보냈다. 

13세부터 80세까지 물질을 한 상군해녀였다. 

23세 살 때 결혼을 했지만 제주 4.3 사건으로 남편을 잃고 

어린 두 딸을 데리고 물질을 하며 억척같이 생활을 꾸려나갔다. 

구룡포, 백령도, 남해 등 한반도 일대에 물질을 하면서 그렇게 고된 삶을 살았다.


해녀의 살림살이는 단출하고 소박하다. 

이남숙 해녀는 비록 저 세상으로 갔지만, 

손 때 묻은 세간용품이 그나마 여기에 오롯이 남아 해녀의 삶이 어떠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제주의 마을은 육지, 뭍과는 사뭇 다른 풍경을 보여준다. 

특히 어촌 마을은 바다와 관련한 세시풍속이 발달했고, 제주만의 독특한 풍속을 보여준다. 


섬을 덮고 있는 바람을 이기기 위한 얕은 초가집, 

현무암을 이용한 돌담은 제주만이 갖고 있는 풍경이다. 

제주의 향토음식

  박물관에는 제주의 향토음식도 전시해 놓았다. 

제주의 음식문화는 해산물을 활용한 음식들이 특징이다. 

관광객들에게는 생소한 음식이지만, 나에게는 추억을 돋게 해 주는 그런 음식들이었다. 

물론, 이렇게 전시된 먹지도 못할 음식을 보는 것보다 직접 먹어봐야 그 맛을 알겠지만 말이지...


  나는 바닷가에서 깅이(게), 보말, 소라를 많이 잡으면서 놀았다. 

오래전부터 아빠는 바닷가에서 항상 톳과 돌미역을 캐 왔고, 

지금도 꾸준히 타지 생활을 하는 나에게 톳을 보내주신다. 

덕분에 톳무침은 식탁에서 제주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유일한 반찬이 되었다. 

물론, 나만 먹지만... 


'저승에서 벌어 이승에서 쓴다.'라는 속담이 있다.

해녀의 물질 작업이 매우 위험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말이다.

해녀들은 언제나 바다를 관장하는 용왕신에게 의지한다. 

바닷가에는 해신당에 있고, 

해녀들은 수시로 그곳에 찾아가 제물을 준비해 안전과 풍요를 기원한다. 


바닷가에 가면 해신당을 종종 볼 수 있다.

해녀들의 간절한 바람을 담은 성스러운 곳이라 할 수 있다. 



전통 해녀옷 '물소 중이'.

물질할 때뿐만 아니라 속옷으로도 많이 입었다고 한다. 

입고 벗기가 편했고, 물소중이와 물적삼은 고무옷이 등장하기 전인 1970년대 초까지 입었다.


그리고 해녀가 쓰는 도구인 물안경, 테왁망사리, 빗창, 까꾸리 등을 볼 수 있다.


제주 해녀들의 생명줄이라 할 수 있는 테왁망사리에 자꾸 시선이 갔다. 

바다에서 작업할 때 몸을 의지해 쉬기도 하고, 작업하는 위치를 알려주기도 한다.


차고 험한 바닷물속에 이 테왁망사리 하나에 의지해 작업하는 해녀.

바다에 그들은 목숨을 걸었고,

해녀의 손끝에는 가족들의 생계가 걸려있었다.


테왁망사리가 가득 찰수록, 해녀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고, 

그 기쁨에 해녀는 물질을 한다.

제주해녀항일운동. 조선일보, 1932년 1월 14일

척박한 환경 속에서 힘든 물질을 하며 이어온 삶.

하지만 제주의 해녀들은 물에서도 뭍에서도 힘들게 살  수밖에 없었다.

수탈과 착취의 대상은 늘 해녀였고, 

해녀들은 억척스럽게 자신들의 삶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일제시대에는 수확한 해산물을 빼앗가 가는 일이 더 빈번해졌고 악랄해지기 시작했다.

해녀들은 일본의 경제수탈에 맞서 투쟁하고, 적극적으로 저항했다.


1932년 1월 7일 세화리 장날을 이용해 시위를 전개했고, 

1월 14일 제주도지사가 해녀의 요구를 수용하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일제는 사건의 조사와 함께 제주도내 청년운동가들을 검거했고,

이를 저지하려는 해녀들의 시위가 일어났지만 일제에 의해 진압되고 말았다. 


17,130명 238회의 집회 및 시위를 전개한 대규모 투쟁, 

우리나라 최대 어민운동이자, 1930년대 최대의 항일운동이었다.


하지만 이 운동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최근 EBS 다큐프라임에서도 해녀항일운동에 대해 심도있게 다뤘고,

요즘 이에 대한 관심이 조금 높아진 것같아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해녀작업장 - 물질 나가기전 불을 쬐며 물질 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


저승에서 벌어 이승에서 쓰는 물질.

테왁망사리를 한 가득 채우는 기쁨과 뿌듯함에 해녀들은 물질을 한다.


거친 파도 속에서 숨을 참으며 캐온 전복, 소라 등은 자식들의 대학을 보낼 밑천이 되었고,

자녀들이 다 크고 나니 물질을 하루라도 안 하면 허전함이 느껴질 정도로

바다와 물질은 하나인 것이 되어버렸다.


거친 제주의 바다를 닮아 해녀들의 삶도 거칠  수밖에 없었다.

끈질긴 생명력으로, 강인한 정신력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그들... 


해녀들을 보면서 '바다의 엄마'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바다의 어멍(엄마)이라 불러도 전혀 어색함이 없는 해녀.

그 삶을 이곳에서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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