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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생담 Mar 03. 2022

어머니의 손

에세이

초등학교 3학년 때의 일이다. 어머니가 학교에 다녀오더니 나를 불러 앉히고 훈계하셨다. 선생님께 나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오신 모양인데 내용이 무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 무렵 난 숙제를 안 해 가서 자주 혼나곤 했는데 그런 이유가 아닌가 싶다. 어머니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씀하셨지만 앞에 앉아 듣는 나는 아무 감동도 느끼지 못했다. 별일 아닌데 왜 저렇게 진지하실까, 의아할 뿐이었다. 그런데 흘끗 보니 놀라운 광경이 눈에 띄었다.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며 말하시지 않는가! 왜지? 하는 의문과 함께 곧바로 내 마음을 움직이고 싶어서 그러는구나, 하는 대답이 떠올랐다.

“손이라도 좀 잡아주고 말하지. 그러면 내 마음이 움직일 텐데…….”

나는 생각했다. 내게는 어머니의 눈물보다 따뜻한 손이 더 필요했지만 그 말을 입 밖에 꺼내 놓을 수는 없었다.

우리 집은 언덕 위에 있었고 그 아래에 넓은 콩밭이 펼쳐져 있었다. 도시 외곽이어서 아직 공터가 남아 있었다. 고등학교 선생님이었던 아버지의 월급이 당시에는 넉넉하지 않았고 건사해야 할 식구는 많았기 때문에 어머니는 남의 땅인 그 밭을 빌려 콩과 상추 농사를 지어 살림에 보탰다.

어느 날 나는 대문 앞 언덕에서 콩밭을 바라보며 친구들과 함께 연 멀리 날리기 경쟁을 했다. 얼레에 감긴 무명실을 다 풀었지만 다른 연보다 멀리 가지 못했다. 무명실은 얼레에 감긴 부피도 컸고 연을 날리면 줄이 축 늘어져서 보기에도 안 좋았다. 친구들은 나일론실을 썼기 때문에 실의 부피도 적었고 연줄도 팽팽했다. 다들 신식 나일론실을 쓰는데 나만 구식 무명실을 쓰고 있어서 속이 상했다. 나도 친구들처럼 깔끔하고 가벼운 나일론실을 쓰고 싶었다.

“엄마, 우린 나일론실 없어?”

내가 마당에 대고 소리치니 어머니가 있다고 말하며 광에 가서 수세미처럼 엉킨 실뭉치를 들고 나왔다. 그러고는 대문 앞에 앉아 엉킨 실을 하나하나 풀었는데 실이 모두 심하게 구부러진 데다가 짧게 끊겨 있었다.

어머니는 참을성 있게 앉아 엉킨 실을 풀고 서로 이어서 내 연줄에 묶어 주기를 반복했다. 올려다보니 내 연줄은 누더기처럼 수많은 매듭으로 이어진 나일론실과 축 늘어진 무명실로 양분되어 허공을 장식하고 있었다. 참 볼품없고 누추한 꼴이었다.

어머니는 농사 외에도 솜뭉치 같은 것에서 실을 뽑아 납품하는 가내수공업도 했다. 사시사철 허름한 옷을 입었고 외출복이라 해도 월남치마에 슬리퍼 차림이었다.

‘남들은 다 번듯하게 사는데…….’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우리 사는 모습이 도시적인 친구들네 가족과 어딘가 달라 보였다. 친구들은 피서철만 되면 새옷에 알록달록한 튜브를 어깨에 메고 해수욕장에 다녀왔고, 어린이날에는 카메라를 목에 두른 부모와 놀이동산에서 놀고 오기도 했다. 물론 우리 남매들은 단 한 해도 그런 호사를 누려 본 적이 없었다.

깔끔한 양장에 선글라스 차림으로 학교에 드나드는 어머니들과 월남치마를 입은 우리 어머니는 대조되어도 너무 많이 대조되었다.

그런 누추한 가족의 모습이 마음속에 오래 자리잡고 있어서인지 커가면서 나는 열등감에 사로잡히곤 했다. 사실은 마음먹기 나름인데 그때는 환경 탓을 했었다. 5학년에 올라가자 이웃집 담장 너머로 주일이네 어머니가 나를 그룹 과외에 넣자고 제안했다. 그때도 어머니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거절을 했고 그걸 옆에서 바라보던 내 마음은 더 한층 누추해졌다.

어른이 되어 실패와 좌절을 겪을 때마다 나는 어머니의 훈계를 듣던 그날의 장면을 떠올렸다. 어머니가 그때 내 손을 잡아 주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쉬워하며. 마음속에 아직도 어린애가 자라지 않고 고스란히 앉아 있었던 탓이다.

이후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은 뒤에야 어머니의 사정을 짐작하게 되었다. 어머니가 남들에게 손을 내미는 일을 부끄러워하셨다는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우리 다섯 남매가 가려워하며 등을 내밀면 어머니는 손바닥을 편 채로 옷 안에 손을 넣어 긁어 주셨다. 온통 트고 굳은살이 박인 어머니의 손바닥은 손톱 못지 않은 역할을 했지만, 남에게 반가움이나 애정을 표현하기 위해 내밀기에는 적당하지 않다고 스스로 생각하셨던 듯하다. 그런 심정으로는 아무리 자녀라 해도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선뜻 손을 내밀기 어려웠을 터이다.

부모가 최선을 다해 키워도 자녀는 불만을 품곤 한다. 자녀는 부모가 전지전능한 조물주처럼 자신의 모든 욕구를 채워줄 거라 기대하며 자란다. 그 무의식적인 기대가 남아서 어른이 된 뒤에도 간혹 부모가 자기와는 다른 완벽한 사람이라는 착각에 빠지기 십상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어머니는 나보다 더 나은 여건에서 태어나지도 않았고, 부모에게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자라지도 못했다. 오히려 운 나쁘게도 일제시대와 해방, 6.25 전쟁과 독재 정권 같은 어려운 시대를 지나느라 살아 남기에도 힘겹기 그지없었고, 개인이 누려야 할 권리와 욕구를 제한당하는 경우도 많았을 터이다. 어머니는 나보다 더 많이 배우지도 못했고, 더 좋은 대우를 받거나 더 존중받으며 살지도 못했다. 더 쾌적한 일을 하지도, 더 맛있는 음식을 먹지도, 더 편리한 집에서 살지도 못했다. 게다가 나이도 기껏해야 나보다 20여 세밖에 많지 않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무엇이든 최선을 다해 베풀었고 철없는 자식이 내뱉는 불만과 부당한 요구조차 넓은 아량으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이 글을 쓰다 보니 우리가 주의해야 할 일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자칫 이 시대의 많은 여성에게 강요될 우려가 있으니 희생적인 모성애를 찬양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세대의 모성애가 있을 수 있고 그에 관해서는 따로 논의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지금 나는 우리 어머니의 모성애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토록 어렵고 힘겨운 삶을 살며 나를 키워 주신 은혜를 생각하면 가슴이 찡하다. 어머니는 더 이상 어찌 할 수 없을 만큼 최선을 다해 나를 키워 주셨다. 연 날리는 아들 옆에 앉아 참을성 있게 엉킨 나일론실이라도 풀어 이어 주셨다.

어머니가 불완전한 사람이라는 걸 내가 알게 된 뒤에도, 어머니의 키가 나보다 작아지고, 힘도 약해지고, 몸도 불편해진 뒤에도 어머니는 혼신의 힘을 다해 나에게 베풀기를 계속했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눈물이 난다. 나는 내 자녀를 어떻게 키우고 있나 돌아보게 된다.




<이 글은 '연꽃 마을'이라는 신문 제374호에 게재한 글로 무단 전재나 부당한 활용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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