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급 C , 그리고 D 그리고..
C가 자퇴한 해 겨우겨우 담임을 끝내고 다음 해에도 다시 고 1 담임이 되었다. 다시 처음부터 시작이었다.
그 해에도 아이들은 참 대단했다. 화장실은 담배 연기가 자욱해서 비흡연자 아이들은 흡연실에서 볼 일을 보는 것과 같은 경험을 해야 했다. 선생님들이 화장실을 불쑥불쑥 검사하니 복학생 중 어떤 아이는 교실의 다른 아이들을 다 나가라 한 후 혼자 교실에 남아 담배를 피우다 적발되는 경우도 있었다.
매일 그런 문제로 아이들을 적발하고, 상담하고(사실 싸우고), 징계 위원회 소집 서류를 작성하다 보니 내가 과연 교과 전문성을 가진 교사인지, 청소년 대상 경찰인지 헛갈리는 느낌이었다. 그 시절 난 경찰이었다. 그것도 되게 능력 없는 경찰.
그래도 1학년 교무실의 모든 선생님들이 다 비슷한 처지였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 위로하며 버텼다. 각자 독립적으로 일하는 편인 교사들은 보통 다른 교사의 일을 잘 모르기 때문에 자기 일이 힘든 것을 강조하고 싶어 한다. 담임의 경우에는 자기 반이 제일 힘들다고 어필한다. 그런데 우리 학교만은 좀 달랐다. 수업에 들어가면 다른 반의 아이들이 워낙 심각한 것을 보기에, 각자의 힘듦을 잘 알고 있다. 그러다 어느 날 다른 담임 선생님이 나에게 우리 반이 제일 힘든 반인 것 같다고, 나보고 고생한다고 한 적이 있었다. 다른 학교 같으면 교사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일지도 모르나 나는 발끈했다. “무슨 말씀이세요. 저기 5반이 더 심각해요.”
5반 선생님과 작년부터 동고동락하며 친하기 때문에 장난스럽게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러면 5반 샘도 발끈해서 받아친다. “샘 반에 비하면 우리 반은 민사고지, 뭔 소리야.” 서로 이런 디스를 날리며 하루하루를 버틴다. 그러니 종합해 보면 우리 반과 5반이 최고 힘든 반, 탑 2라는 이야기이다. 물론 1등은 5반이라고 난 진심으로 생각했지만.
그러던 어느 날, 5반의 여학생 D가 임신 8개월임을 알게 되었다. 5반이 단연 원탑으로 등극하는 순간이었다. 어떻게 학교에서 8개월까지 모를 수 있냐고 하면 할 말은 없다. 다만 D의 가족들도 학교가 알기 전에 몰랐다는 이야기로 항변을 대신하고 싶다. D가 친구에게 털어놓았고, 그 친구가 자기 반 담임선생님께 말하면서 학교에서 인지하게 되었다. 담임선생님을 통해 D의 부모님도 딸의 임신을 인지하게 되었다.
알고 보니 D는 입학할 때부터 임신 상태였다. 마른 체형에 배만 나온 스타일이라 더 눈치채지 못했다. 워낙 사복을 입고 다니는 아이들이 많은 학교였는데 D 또한 입학 때부터 주로 박스티를 입고 다녔고 평소에는 주로 자기 자리에만 앉아 있었다. 뒤늦게 한 달 전 있었던 체육대회 사진들을 찾아보니 체육복 위로 볼록 배가 나온 게 보였다. 그런데 아무도 몰랐다.
교직 생활 중 처음 경험하는 일이라 어안이 벙벙했고, 그 아이의 인생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또 태어날 아기의 인생은 어떻게 되는 거지? 이런 걱정들에 더해 매정하다 할지 모르지만 직업인으로서 5반 담임선생님 걱정도 되는 것이 사실이었다. 5반에는 그 아이 말고도 힘든 아이가 너무 많았다. 조회가 끝나고 1교시 시작할 때 등교해 있는 학생이 절반이 될까 말까 한 반이었다. 자해하는 아이, 수업 중에 뛰쳐나가는 아이 등 담임 정신을 쏙 빼놓는 학생들이 이미 많았다. (사실 이 모든 것은 우리반도 마찬가지다) 그 와중에 조용히 앉아만 있는 문제없는 아이라고 생각한 학생이 임신이라니. 나는 퇴근하면서 5반 담임선생님께 또다시 우리 스타일의 위로를 던진다. “역시 선생님 반이 짱이었어요. 힘내요.” 5반 선생님은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리고 다음날 출근 후 부장님이 내게 말을 거신다.
“선생님, 들었어? 5반에 D ~” “아~ 임신한 거요? 당연히 들었죠. 어제 퇴근하면서 5반 샘한테도 위로하고 갔어요.“ “아니 그거 말고, D 임신한 아이 아빠가 C래.” “네? C 요? 작년 우리 반 C? “”
가뜩이나 자퇴 후 연락이 없어 궁금했던 C의 소식을 이렇게 들었다. C는 작년에도 여자친구가 있었다. 학년에서 제일 예쁘다고 소문난 아이랑 사귀어서 안 그래도 C의 매력이 뭔지 의아해한 적이 있었다. (C에게 정이 많이 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데 D랑은 언제 사귀었다는 거지? 작년에 D는 중3으로 우리 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이었는데.. 혼란스러워하는 나에게 부장님이 한 마디 더 보태셨다. “5반 샘이랑 이제 사돈이네.” 어제 5반 선생님께 5반이 제일 힘드네 어쩌네 하고 퇴근한 내 입이 부끄러워졌다. 올해가 아닌 작년 우리 반이지만, C는 우리 반이다. 우리 학교에서 모두가 아는 C의 유일한 담임이 바로 나다.
그 뒤 5반 선생님이 임신한 D를 상담하면서 의문이 조금 풀렸다. 중 3때 D는 C와 어떻게 만났는지 모르지만 사귀기 시작했다. 그러다 C는 전편에서 다룬 사건 때문에 학교를 자퇴한 후, 얼마 안 있어 소년원에 들어갔다고 한다. 무슨 일 때문인지 6개월간 있었다는데, 그것 때문에 내게도 연락이 없었던 것이다.
C가 소년원에 들어간 것 자체는 그다지 놀랄 만한 소식은 아니었다. 다만 소년원에 들어가기 전에 C는 D가 임신한 것을 알게 되고, 자기가 본인 아버지에게 말했으니 일단 믿고 기다리라고 한 뒤 소년원에 들어갔다. C가 어린 시절 집을 나갔다가 모든 걸 잃고 다시 집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된 그 아버지 말이다. C의 아버지는 아들의 이야기를 귓등으로라도 듣긴 한건지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몸의 변화를 느끼고 배가 불러왔을 텐데 D는 정말 C오빠의 말만 믿고 기다렸다. 그리고 막달이 가까워져서야 이 사실을 D의 주변인들이 알게 된 것이다.
D의 부모가 어떻게 딸의 임신을 모를 수 있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세상엔 그런 부모도 많다. 교직 생활 중 그런 부모를 종종 보았고, 애석하게도 그 학교에 있을 때 특히 많이 보았다. 생계를 위해 장시간 일하는 맞벌이 부부들이 많은 곳이었다. 자식을 사랑하겠지만, 대화 시간이 거의 없는 부모도 많았다. D의 부모도 그중 하나였을 것이다. 아버지는 멀리서 일하셔서 한 달에 한두 번만 올라오신다 했고, 어머니는 바빴다. 가족과 자식을 위해 바빴다. D의 언니는 간호조무사라 했지만, 언니도 동생의 신체적 변화를 몰랐다.
20대 후반이던 당시 나는 D에 대해 특히 놀랐다. 어떻게 남자친구의 말만 믿고, 만삭이 다 되어가도록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기다릴 수 있지? 이렇게 대책이 없다고? 그런데 계속 생각하다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청년은 미숙하다. 요즘 아이들 똑똑하다는 말 많이 하지만,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다. 소년도, 소녀도 미숙하다. 좀 정도를 지나쳐 미숙할 때도 있다. 멀리 갈 필요 없이 20대 초반의 나 자신을 돌아본다. 당시로선 고작 몇 년 전 일이다. 고등학교 시절 공부 말고는 딱히 하는 게 없던 내가 세상에 나온 것은 스무 살인 셈이다. 그 시절 고작 두세 살 차이 선배를 대할 때, 미련하게도 그 오빠 말이 다 맞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가스라이팅이지만, 그 오빠 말대로 그냥 참아야 하는 줄 알았던 일들이 많다. 두세 살 차이면 세상 이치를 다 아는 어른인 줄 알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들 또한 고작 20대 초반이었다.
D도 그런 게 아닐까. 산전수전 겪은 자기 보다 2살 많았던 C오빠가 무언가 해결해 주지 않을까 막연히 믿지 않았을까. (실제로 담임선생님께도 그렇게 말했다고 들었다.) 불안한 마음이 올라올 때마다 그렇게 생각하며 애써 현실을 외면했을지도 모른다. 나중에 알고 보니 D도 중학교 시절 한가닥 했던 ‘센캐’였다. 그런 센 소녀도 이렇게 ‘미련한’ 짓을 한다. 조선시대 여인처럼, 그저 남자말을 믿고 기다린다. 답답했지만, 그게 소녀들, 그리고 소년들의 또 한 면이구나 생각했다. 당시 내가 참여하던 독서모임에서 천명관의 소설 ‘고래’를 읽으며 토론한 적이 있는데, 소설 속 여자 주인공 춘희가 임신한 상태로 바보처럼 남자를 기다리는 부분이 있었다. 현실성이 떨어져 납득하기 힘들다는 모임원도 있었지만, 난 그냥 D 자체를 보는 것 같았다.
결국 D는 C가 소년원에 있을 때 딸을 낳았다. 교감선생님은 왜인지 D가 자퇴를 하고 아이를 낳도록 종용했다.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D는 어차피 다음 해 1학년으로 다시 복학했다. 알고보니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는 법이 없는 활발한 아이라 했다.) 아이는 D의 부모님 밑으로 출생신고되었다. 주말드라마의 설정처럼 D는 자기 딸의 언니가 되었다.
C는 소년원에서 나온 후 나에게 드디어 연락을 해 왔다. 학교를 한 번 찾아왔고, 나뿐만 아니라 교무실 선생님들께도 아이 사진을 보여주며 너무 귀엽지 않냐고 자랑도 했다. 아이는커녕 결혼할 날도 멀었던 당시의 나는 대충 이쁘다고 맞장구 쳐주며 이제 아빠가 되었으니 잘 살아야 한다고 C에게 말했다. “당연하죠!” C는 말했다. 그리고 얼마 후 C와 D는 각자 따로 새로운 여자친구와 남자친구가 생겼다. 그리고 또 얼마 후 C는 다시 집을 나갔고, 학교에 있는 모두와 연락이 끊겼다. D를 포함해서 말이다. C의 아버지는 아이 양육비를 보태주겠다 했다지만, 점차 연락이 안 되었다.
D의 임신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나는 이 모든 과정이 커다란 불행처럼 느껴졌다. 내가 담임일 때 C를 더 잘 챙겨줬다면 이런 일이 안생기지 않았을까 계속 생각했다. 하다 못해 피임교육이라도 제대로 시켰다면 이런 일이 없지 않았을까. 거의 매일을 C 때문에 고민하고 C와 대화하고 C가 저지른 일을 수습하는 담임 생활을 했지만, 그 아이가 피임 없이 잠자리를 즐기며 누군가를 임신시킬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난 그 사건 이후 성교육 시간에 피임 교육을 꼭 해야 한다고 우겨 마침내 모 단체와 연계해서 1학년 특별활동 시간에 관련 수업을 진행했다. (그러나 내 기대만큼 피임교육 위주로 수업을 해 주시진 않았다.) 내가 내 몫을 했다면, 이런 일이 안 생기지 않았을까. 더 솔직히 이야기하면, 당시 난 C와 D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불행한 인생을 살 것이라고 결론을 내려놓고, 그 아이에게 고통스러운 인생을 주는데 내가 일조했다고 자책했다. 인간의 삶을 내 멋대로 규정한 것이다.
거리의 아이 C는 자신의 아이가 생겼지만 다시 거리로 사라졌다. 다시 가출해서 연락이 두절된 것이다. 아이는 D의 몫이 되었다. 십 년이 지나 늦은 나이에 이제 막 아이를 낳아 키우고 있는 지금의 내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그 아이의 존재 자체를 불행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너무 미안하다. 너무나 예쁘고 소중한 아이였을 것이다. 지금 나의 아이가 하듯, 젖병을 보면 반가워하며 빨리 달라고 팔다리를 흔들고, 엄마와 할머니에게 너무나 예쁜 웃음을 지어 주고, 옹알옹알 말도 하면서 자라났을 것이다. 힘든 가정에서 우울한 아이들이 많이 나오는 것을 많이 보아 왔던 나는, 내가 본 몇 장면으로 한 생명의 불행을 단정해 버렸다. 아빠가 있든 없든, 엄마가 누구든 아이로서 얼마나 소중하고 예쁘게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나의 속단이 부끄럽다.
최근 들어 부모가 아이를 낳자마자 살해하는 경우들을 접하게 된다. 베이비박스에 맡겨진 아기들을 다큐멘터리에서 보면서 눈물을 펑펑 흘리기도 했다. 직접 가정의 울타리에서 아이를 키우기로 생각한 D와 D부모님의 결정이 얼마나 대단한지 비로소 실감하게 된다.
이제 막 열 살이 넘었을 D의 동생 같은 딸은 잘 지내고 있을까. 부디 가정과 사회가 그 아이를 지켜주길. C를 가정과 사회가 지켜주지 못하고 거리로 내 몰았지만, 그의 (생물학적) 딸은 사회의 도움을 받아 엄마가 둘이나 있는 따뜻한 가정에서 행복하기를 바란다. 나의 부끄러운 속단을 비웃으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