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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고작 그 정도의 일을 할 줄 몰랐어

by 세준희

고등학교 남자 동창이 내게 한 말이다. 그 말은 나를 깎아내리기 위해 한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나를 위하고 인정하는 마음에서 한 말이었다. 자기가 아는 사람들 중에 가장 똑똑하고 포부가 크고 마음먹은건 다 하는 내가 어른이 되면 어떨지 정말 궁금했었는데, 어른이 된 내가 고작 이 정도의 일을 할 줄 몰랐단다. 그리고 그 이유가 내가 여자로, 엄마로 살고 있기 때문이란 걸 알기 때문에 안타까우면서도 이해가 된다고, 자기도 자기 부인의 일을 최대한 서포트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세계라도 정복할 정도의 포부를 갖고 있었다. 지금도 내면이 많이 다르지는 않다. 지금도 매일 큰 꿈을 꾸고 있다. 그런데 현실은 다르다. 어릴 때부터 엄마가 되고 싶었던 나는 늦지 않게 29세에 계획임신했다. 그때는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게 얼마나 내 모든 걸 갈아 넣어야 하는 일인지 몰랐다.


그때 이미 부동산 투자와 주식 투자를 취미로 오랫동안 해온 상태였는데 지금은 취미생활을 즐길 여유가 없어서 전부 놓은 상태다. 커리어는 발전시키지는 못하고 유지는 하고 있다. 세상의 중심이라고 느껴온 뉴욕에서도 아이들을 위해 이사 나왔다. 미국 대기업에 다니고 있는데, 서부에 살면서 동부시간으로 일을 해서 새벽 6시에 일을 시작한다. 2시에 퇴근해서 아이를 픽업하고, 저녁을 차리고 정리를 하고 아이와 시간을 보낸다. 요리를 정말 싫어했었는데 아이가 까탈스러워서 많이 늘었다.


더 나은 직장에 갈 기회가 있어도 2시부터 아이와 시간을 함께 할 수 있는 직장을 찾기 힘들기 때문에 지금 직장에 계속 다니고 있다. 일이 재미없어도, 집안에 필요한 일들 전부 다 처리하고, 아이 병원 전부 내가 직접 데리고 다니고, 아이에게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아무 때나 연차 쓸 수 있는 지금 직장을 떠날 수가 없다. 지금 직장도 그런 직장이 아니었지만 내가 열심히 해서 그렇게 만들었다. 일을 잘해서 내가 없으면 안 되게 만들어서 재택으로도 근무할 수 있게 회사와 협의했다.


더 재밌고 날 펼칠 수 있는 일을 너무 하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 아니 그러지 않기로 선택했다. 뉴욕에서 풀타임으로 회사에 출근할 당시, 아이와 보내는 시간이 적어서 기관에서 거의 모든 시간을 보냈던 아이의 발달이 늦었다.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은 지금은 발달이 빠른 편이다. 뉴욕에 있을 때는 정신이 없어서 아이에게 곰팡이 핀 음식을 모르고 먹인 적도 있었다.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부모만 바라보고 있을 아이가 너무 가슴이 아팠다. 지금 우리 집의 모든 사람들은 내가 직접 장보고 직접 요리한 건강한 음식을 먹고, 워킹맘이지만 마치 전업주부같이 아이와 하루의 반을 함께 보내고 있다.


더 재밌는 일을 하고, 자아를 실현하고, 돈을 더 많이 버는게 내가 하고싶을 지는 몰라도 지금 내 가족에게 필요한 건 내 시간이라고 되뇌며 매일 스스로를 누른다. 지금 내가 잘하고 있는 거라고. 남편이 잘하고 있지 않느냐고. 자기 위안해 보지만 남편이 자기 일 잘하는 게 내 만족으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내 커리어 실현을 포기하고 가정을 위한 결정을 내리는 게 항상 아쉽지만 후회하지는 않는다. 무뚝뚝한 남편은 항상 모든 걸 내가 선택한 거라고만 생각하고 전혀 내 마음을 헤아리거나 위로할 줄 모른다. 그래서 친구가 내게 그렇게 말했을 때, 이해받는 것 같아서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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