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죽아에게 배틀을 신청합니다
"기본 컵 아메리카노 한 잔을 얼마 정도 가격이면 사 먹을 것 같아요?"
백반집 맞은편에 앉아 점심을 먹던 (전)직장 동료가 물었다.
회사 건물 1층에 새로운 커피숍이 들어선다고 한다.
카페임을 짐작하게 하는 네온사인이 외벽에 걸리고, 내부는 인테리어 공사가 한창인지 불투명한 필름지에 가려져 있었다.
다들 점심시간마다 비슷한 커피숍을 번갈아 도는 일에 지루해 있었을 때였다. 가까운 거리에 새로운 카페인 충전소(?)가 생긴 것에 다들 들떠 보였다.
"음 글쎄요... 한 3500원?"
동료는 내 대답이 썩 만족스럽지 않은듯했다. 주변에서 2천원대 대용량 커피를 파는 카페를 손쉽게 찾아볼 수 있었으니까.
가격 싸고 양 많고 맛 적당한 커피가 보통 직장인들이 찾는 커피니까.
흥정하듯 희망 가격을 500원, 1000원 내린 뒤에야 비로소 동료는 납득이 된 듯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나의 커피에 대한 사랑은 고등학교 때부터 시작됐다.
고3 때 다녔던 수학학원 근처에는 로스팅 커피로 유명한 카페가 하나 있었다.
간판에 그려진 곰돌이와, 실제로 곰돌이를 닮아 덩치가 있으신 사장님이 섬세하게 커피를 내리던 모습이 인상적인 개인 카페였다.
그 카페에서는 어린 내 나이에는 생소했던 '드립 커피'라는 것을 팔고 있었다.
제일 인기가 많은 메뉴라는 사장님의 추천에 인생 처음으로 드립 커피를 시도했다.
첫 드립 커피는 커피 아로마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하고 처음으로 느꼈던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이전까지 커피는 쓴맛에 오묘한 맛을 얹은 느낌이었다면, 드립 커피는 쓴맛을 압도하는 시고 고소하고 달콤한 아로마가 가득한 맛이었다.
지금이야 개인의 취향에 따라 원두를 고를 수 있도록 한 카페를 심심찮게 볼 수 있지만, 그때만 해도 어느 카페마다 커피 맛은 비슷비슷했으므로 그 커피의 맛이 더 충격으로 다가왔을지도 모른다.
진짜 커피의 맛을 깨달은 그때의 나는 이후 학원에 갈 때마다 종종 그 카페에 들렀고, 도장을 20개 찍을 수 있었던 쿠폰을 반쯤 채울 때쯤에 수능을 봤던 기억이 난다. 수능을 본 뒤에는 그 카페 근처에 갈 일이 없었지만, 이후에도 꽤 오랫동안 그 카페에 다시 우연히 들릴 날을 꿈꾸며 쿠폰을 지갑 속에 지니고 다녔다.
이후 나는 커피의 맛을 진심으로 즐기는, 자칭 '커피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살아왔다.
어떤 사람은 하루 4잔씩 마시며 커피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나는 하루에 커피를 한 잔만 마시는 편이다.
한 잔만 마시는 이유는 건강상의 이유도 있고, 카페인이 잘 드는 체질이라 잘못하면 쿵쾅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밤을 새워야 했던 경험상의 이유도 있다.
하루에 한 잔의 커피를 제대로 즐기기 위해 자주 근방의 내 취향을 저격하는 커피 맛집을 찾아다닌다.
적당한 산미, 가벼우면서도 풍부한 꽃 향이 가득한 커피도 좋아하고, 보디감이 묵직하면서도 고소한 맛의 커피도 좋아한다.
커피를 마시기 가장 좋은 순간은 나른하고 졸린 오후, 점심시간이 끝난 후 여유로워진 그 순간이다.
주말에는 아침에 미적거리다 거실로 나오는 오전 10시쯤이 최고의 커피 타이밍이다.
갓 내린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한 입 마시면, 입안을 가득 덮는 산미와 아로마가 잠든 뇌를 부드럽게 주무르는 기분.
더운 여름, 카페 점원의 주문 확인 멘트를 들으면서도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다.
왜 겨울에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사람을 이르는 말인 '얼죽아'는 있어도, 여름에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사람을 위한 단어는 없을까?
나와 비슷한 커피 취향을 가진 이들을 위해 더죽아(더워 죽어도 아메리카노)라고 이름을 붙여줘야지.
아직까지 내 비슷한 또래 중에서 더운 날에도 핫 아메리카노를 시키는 취향의 사람을 발견하지 못했다.
커피 = 카페인으로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고집스러운 '더죽아' 커피 취향을 지켜온 사람을 만난다면, 함께 에어컨 밑 시원한 자리를 차지해 김이 나는 아메리카노를 호로록 즐겨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