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에어컨을 켜지 않은 아침이다. 충만한 햇살과 맑고 파란 하늘이 이제 장마는 지나갔음을 말해준다. 날씨 어플을 보면 10시밖에 안 된 이 시간에도 바깥 온도 30도를 가리킨다. 하지만 습도가 높지 않아서인지 집 안은 선풍기 바람만으로 제법 견딜만하다. 창문을 모두 조금씩 열어두고 자연 상태의 공기를 만끽한다. 에어컨 없이 살기가 어려워진 세상, 자연의 공기를 누릴 수 있는 것만으로 감사하게 된 삶이라니. 마치 미래사회를 그려낸 어느 SF영화의 한 장면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다. 문을 전부 닫아둔 실내에서 인공 바람에 의지하는 우리들. 당연했던 여름의 장면들을 이제는 추억 속에서만 찾아내야 한다. 해가 뜨거운 날도 그늘 아래에 서면 절로 땀이 식어 시원해지고, 한껏 땀 흘린 뒤에도 샤워 한 번이면 견딜만했던 날. 밤이면 서늘한 공기를 느끼며 동네를 산책하거나 에어컨 대신 수박과 얼음 동동 띄운 미숫가루와 아이스크림 하나로 즐거웠던 내가 알던 여름은 이제 다시 오지 않을 것 같다. 아이에게 “예전에는 말이야~” 하며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이나 TV채널이 서너 개 밖에 없었던 시절을 이야기하듯 계절의 추억을 이야기하는 날이 올 것만 같다. “우리나라는 사계절이라는 것이 있었어~” 어쩌고저쩌고.
며칠 전 아는 동생이 ”언니는 온도와 습도에 예민한가 봐요.“ 하고 말해주어서 내가 그렇다는 것을 알았다. 집의 공간마다 온습도계가 있고 어플로 날씨도 수시로 챙긴다. 오늘처럼 하루종일 해가 쨍할 것으로 확인되는 날에는 아침에 무조건 세탁기를 돌려 빨래(특히 이불)를 밖에 널어두는 일이 큰 미션이자 즐거움이다. 지인이 비가 오는 것을 ‘느낌’으로 체크해서 우산을 챙긴다는 얘기에 ”일기예보를 보면 될 텐데~“하고 엄청 웃었던 날이 생각난다. 나에겐 당연한 것이 누군가에겐 낯선 것일 수 있겠다. 아이가 어릴 적 아토피를 심하게 앓아서 그때부터 생긴 습관일까? 식물을 돌보다 보니 온습도에 예민해진 것일까? 아니면 그냥 나의 (강박적인) 성격 혹은 불안증 탓일까? 그 근원을 알 수는 없겠지만 아무튼, 식물이 자라기 좋은 환경은 인간에게도 좋을 것이라는 믿음은 굳건하다. 창문을 꼭 닫아놓은 환경에서 잘 자라는 식물은 없다. 해가 없고 물이 적어도 살지만 바람이 없이는 안된다.
최근 나의 화두는 ’에어컨을 언제 어떻게 얼마나 켜고 끄느냐‘ 하는 문제였다. 복층 빌라에서 살게 되고, 날씨가 이렇다 보니 집에 사람이 몇이 있든 위 아래에어컨을 모두 켜야 하는 날이 많아지는 것이다. 특히 2층 옥탑은 낮에 올라가면 30도는 그냥 찍는다. 찜질방이 따로 없다. 호르몬주사 영향으로 추위와 더위가 내 몸을 분 단위로 관통하다 보니 잘 때 안방 에어컨을 켜야 하는 날도 생긴다.
뉴스에서는 연일 ’에어컨 전기세 폭탄 예방하는 법’을 알려준다. 요즘의 인버터 방식 에어컨의 경우 자주 켰다 껐다 하는 것보다 한번 켜놓은 뒤 일정한 온도(권장 26도)로 쭉 유지하는 것이 전기세 절약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실외기가 처음 가동될 때 가장 전기를 많이 소모하기 때문이란다. 심지어 장시간 외출이 아니라면 켜두고 나가는 것이 더 도움이 된단다. 남편도 에어컨을 잠깐 켰다가 시원해지면 끄던 나의 습관에 늘 잔소리를 했기 때문에 지금은 뉴스에서 시키는 대로 하고는 있다. 매번 온도를 신경쓰지 않아도 되고 외출했다 들어오면 시원한 집에서 땀을 식히고 쉴 수 있어서 여러모로 편리하다. 하지만 여전히 정서적으로는 동의가 어렵다. 이론적으론 맞겠지만, 경제적 측면에선 합리적이겠지만 환경에는 좋을까? 기계를 오랜 시간 가동하면 수명이 줄어드는 문제는? 전기세는 절약되겠지만 바람이 통하지 않는 환경에서 사람이 건강할 수 있을까? 지구와 인간 모두에게 이로운지 여전히 의문이다.
하지만 이런 나도 살기 위해 에어컨에 의지하는 날이 늘어나고, 그럴수록 오늘처럼 에어컨 없이 살만 한 날에 더욱 감사하게 된다. (물론 에어컨 개발자에게 감사하게 되는 날이 더 많은 것도 같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나는 여름을 좋아하는 편이다. 얇고 가벼운 옷을 입고, 자연 속에 풍덩 빠지는 느낌. 휴가 기간, 파란 표지의 책들을 모아 쌓아 두고 책등만 바라봐도 행복하다. 청춘의 한 장면을 다룬 영화들의 배경은 언제나 여름이다. 내 인생의 여름은 이미 지나갔거나 끝물일지 몰라도 언제까지나 여름을 품고 살 수 있다면 좋겠다. 에어컨 바람으로 둘러싼 실내에 갇힌 여름이 아니라 짙은 초록으로 둘러싸인 산속을 걸을 수 있는 여름이라면 더욱 좋겠지만.
그나저나 폭우에 큰 피해를 입은 분들도 있고, 폭염 속에서 매일같이 택배를 배달해야 하는 분들도 있으니 조금만, 지금보다 조금만 덜 우리를 괴롭혀주지 않겠니. 뭐? 그러면 에어컨 좀 꺼달라고? 지구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덧. 이 글을 브런치와 블로그에 올리려고 2층 작업실 방에 올라왔는데 역시나 너무 더워서 남편이 강제로 설치해준(?) 창문형 에어컨을 켤 수밖에 없었다. 시끄러운데다 창문을 가려야 해서 소중한 경치(?)를 훼손하지만 이거 없으면 여름날 작업은 불가다. 슬프고 고맙고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