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하는 교사 카페에 종종 중등 수행평가에 관한 글이 올라온다. 초등과는 차원이 다른 중등 수행 평가로 인해 엄마로서 겪는 어려움과 놀라움을 표시하는 글이다. 나 역시 초등교사 엄마로서 각종 수행평가를 만들고 평가해왔지만 내 아이가 중학교를 가니 다시 시작하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나의 수행평가 경력도 별 소용이 없었다.
아이는 수행의 늪에서 허우적거렸다. 평일에는 다들 학교와 학원으로 바쁜 아이들이라 주말에 모여서 준비하곤 했는데 그마저도 시간 맞추는 게 일이었다. 어떤 주말에는 수행 준비를 세 개나 해야 했으니, 오전에는 친구들을 태워 지역 답사를 갔고 오후에는 집에 모여 악기를 연주했다. 저녁에 세발 뜨기를 하고 나서야 수행 준비가 끝이 났다. 보고만 있어도 숨이 찼지만 정작 아이들은 합주를 하고 에세이를 쓰고 ucc를 만들어 냈다.
큰딸은 종종 학교를 다니기 싫다고 했다. 중요하지도 않은 것 같은데 하는 게 너무 많아서 정신이 없다는 이유를 댔다. 검정고시를 쳐서 고등학교를 가도 되냐기에 반색을 하며 동의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 좋은 생각이다. 엄마는 지지!
아, 뭐예요? 재미없게... 놀라지도 않아요?
놀라긴 무슨? 어련히 알아서 고민했을까...
엄마를 놀라게 하려는 의도인지 진심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내 속마음을 고백한다. 수행 평가한 게 아까워서 절대로 그만둘 수 없단다. 그 많은 수행평가 해내느라 애쓴 게 아까워서라도 졸업하고야 말겠단다. 이유로는 좀 허무하지만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그만큼 수행 평가는 많다.
어제도 카페에서 중등 수행평가 관련 글을 읽었다. 내 아이가 한 수행평가 경험이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오랜만에 글을 남겼다. 우리 딸 학교는 이렇게 했노라, 요즘은 코로나로 인해 집으로 쳐들어오지 않으니 솔직히 좀 좋더라는 내용이었다. 마침 중학교 1학년 때 우리 집에 모여 악기 연주를 하는 모습이 예뻐서 찍어 놓은 게 있기에 그것도 첨부했다.
그런데 순식간에 늘어나는 댓글 수와 내용에 적잖이 놀랐다. 주된 내용은 수행평가의 타당성에 관한 것이었다. 학교 수행평가는 배운 것을 평가해야 하는데 다양한 국악기와 양악기를 사용해 연주하는 것이 진정한 수행평가냐는 것이다. 시키고 있는 악기를 멈춰서는 안 되겠다는 댓글, 상대적 박탈감에 대한 댓글에 이어 학교에 민원을 넣어야 한다는 댓글까지 있으니 괜히 글을 써서 논란을 만들었구나 자책을 했다.
순간 큰애를 중학교에 입학시켜 놓고 수행평가로 분통을 터뜨리던 내가 생각났다. 대금이라도 배웠으니 망정이지 이거라도 없었으면 리코더나 불었을 거라며 안도의 한숨도 내쉬었다. 초등에서 제대로 배우는 악기가 리코더인지라 '리코더나'라는 표현은 옳지 않지만, 휘황찬란한 악기들 속에서의 리코더라면 그런 표현이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국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삼 남매가 국악을 좋아하고 배우길 바랬다. 운이 좋게도 아이들의 초등학교는 국악으로 전국적으로 유명한 공립초등학교였다. 다양한 국악기를 방과후와 음악동아리 활동을 통해 저렴하면서도 질 높게 배울 수 있으니 과밀학급이니 노후된 학교니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배우게 된 악기가 중등 수행평가에서 이렇게나 유용하게 쓰이게 될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중학교 음악 선생님께서도 드문 악기를 다룬다며 관심을 보였다기에 음악에서만큼은 욕심을 부린 가치가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음악을 통해 다양한 경험을 한 것과 더불어 각종 스트레스를 연주로 풀기까지 했으니 공교육의 가치를 찬양하기도 했었다.
물론 딸 학교의 음악 수행평가에서 학생들이 사용한 악기들은 사교육을 통해 배운 경우가 많았기에 카페 댓글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나 역시 중등 수행평가 시스템에 분노했던 사람이지만 졸업을 앞둔 시점에서 참 많이 둔해졌고 모른 척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다 그렇게 한다는 이유로 무뎌지고 둔감해지고 있다. 그렇다.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는 소위 말하는 학군이 좋은 곳이다.
올해 학교에서 교과를 맡아 3학년 영어와 더불어 1학년 안전을 지도한다. 오늘 1학년 안전 수업을 들어가려고 하니 담임선생님께서 내 팔을 당기며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씀하신다.
선생님, 세상 밖으로 처음 나온 아이가 왔어요.
세상 밖으로 처음 나온 아이?
무슨 말이가 했더니 출생 신고도 안 된, 호적이 없는 아이가 학교에 처음 왔다는 말이었다.
기역니은을 모르는 것은 당연하거니와 책상에 앉아 있는 것 자체가 힘들어 보였다. 할머니 손을 잡고 왔다는데 어미 잃은 아기처럼 불안하고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찌푸린 미간과 불안한 손을 보며 아이의 탄생부터 지금까지의 삶이 그려지는 듯하여 마음이 아리다.
자세한 사연은 뒤로 하고 아이와 함께 수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영상을 트는 몇 초 사이 아이가 없어졌고 놀라서 복도로 뛰어 나갔다. 아이는 학년 연구실에서 기다리고 계신 할머니를 찾아 나간 것이었다. 다행히 복도를 사이에 두고 교실과 마주하고 있는 연구실이라 바로 아이를 찾았지만,다시 찾은 아이의 모습을 보니 불안함이 온몸을 뒤덮고 있었다. 차마 울지 못해, 어찌할 바를 몰라 일그러진 얼굴 말이다.
아이를 달래서 다시 교실로 데리고 들어온 후 재미있는 영상도 보여주고 옆에 앉아 색칠도 함께 하며 수업을 이어갔다. 코로나로 거리를 두어 앉아 있는 다른 아이들의 눈빛에는 호기심이 가득했지만 마스크 때문인지 분위기 때문인지 그 누구도 궁금증을 표시하지 않는다.
색연필을 잡은 손에 힘이 없다. 다섯 손가락으로 색연필을 움켜 잡은 걸 보니 소근육 발달도 더딘 것 같다. 삐뚤빼뚤 희미하게 칠한 그림에 힘이 없다. 수업이 끝날 때까지 미간에 힘을 풀지 않았지만 세상에 처음 나온 아이가 40분을 온전히 앉아 있었음에 마음으로 큰 박수를 보냈다.
속눈썹이 긴, 참 예쁜 아이...
다문화 가정이 지역에서 가장 많은 학교도, 가정이 아닌 시설에서 생활하는 학생이 많은 학교도 근무해 봤지만 출생신고조차 안 된 학생은 처음이었다. 출생신고는 부모 동의가 있어야 할 수 있는 것이니 짐작컨데 부모의 부재로 인한 것이리라. 그리고 이제 학교를 왔으니 드디어 세상에 존재가 드러난 것이리라.
어제는 중학교 수행평가 글을 올렸다가 된서리를 맞았고 오늘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아이를 만났다. 나에게 브레이크가 걸린 순간이다. 별생각 없이 올린 글과 사진이 누군가에게는 고민의 거리가 될 수도 있다는 것도 생각하지 못할 만큼 나는 세속의 교육 논리에 물들어 있었다.
근무하는 학교에서 온라인 수업을 준비하며 과제를 한글 파일로 올리려고 했더니 학교에서 말렸다. 출력해서 학습지를 할 수 있는 애들이 없다고 한다. 수업 후 노트에 할 수 있는 과제로 내달라고 하셨지만 그마저도 기대는 하지 말라고 하신다.
근무 학교와 나의 아이들 학교는 십여분 거리...
여기서는 abcd를 처음 보는 3학년이 대부분이지만, 어떤 곳에서는 영어로 에세이를 쓰고 있다.
악기는 리코더만 할 줄 아는 곳도 많지만, 할 게 정 없으면 '리코더나' 불라는 학교도 있다.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으면 배움의 기회가 없는 곳이 있다면, 학원에서 충분히 힘들게 하니 학교에서는 그저 즐겁게 지내다 오기만을 바라는 곳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이 간극을 어떻게 메꿔야 하는지 오늘따라 참 막막하다. 어렵다. 교원노조에 회비나 내며 면죄부를 받고 싶은 것은 아닌지 생각해본다.
그저 알파벳은 이렇게 생겼노라 목청껏 가르칠 뿐이다. 그것은 대문자와 소문자의 짝꿍이 있다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선생님 수업에서는 틀린 것은 없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은 매시간 강조해야 한다. 선생님은 영어를 6학년 때 처음 배웠다고 하면 으쓱한 표정이 나온다. 그렇게 수업을 한다. good job와 great를 남발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