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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억과 상상 Apr 27. 2020

내용만큼 형식도 중요하다.

나만의 동굴을 꾸미다.

글쓰기 모임 경흔 샘이 화장대 위를 밀어버리고 나만의 독서 공간을 만들었다고 하셨다. 며칠 후 정민 샘도 안방에 나만의 책상을 구입하셨다. 나만을 위한 공간을 만드는 행위에 큰 박수를 보냈지만 딱히 따라 해 봐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집은 다 내 공간이며 내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었기 때문이었다.


밖에서 누른 본능과 억압 해소 공간은 어쩔 수 없이 집과 가족이 될 때가 많다. 안방은 당연히 내 공간이고 안방에 딸린 화장실은 -건식에 협소하고 드레스룸도 따로 없었으니- 내가 사용하겠다는 규칙을 이사 오며 선포하면서도 미안함 따위의 감정은 느끼지 않았다. 물론 내 의견에 반박한 사람도 없었. 그러면서 난 가장 막강한 파워를 가진 집안 No.1 임을 나는 물론 가족들도 암묵적으로 동의한다고 믿었다.


그런데 같이 있고 싶지 않아도 있어야만 하는 코로나 기간을 보내며 내가 이 집에서 존중받는 개체가 맞는지 나날이 의문이 들었다. 이 답답함의 원인은 오롯이 혼자 있는 시간이 없어서라는 결론을 내리면서 내 생활 반경을 계속 돌아보게 되었다. 그리고 나 혼자만의 시간뿐만 아니라 공간 조차 허락되지 않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사춘기 딸들은 본인의 공간이 침해받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한다. 사춘기 자녀를 키우는 엄마의 고민에 법륜스님 해결책이 떠오른다.


'열어 보고 화내며 치워줄래요?

안 열어 보고 화 안 내고 편할래요?'


 나와 신랑은 후자를 택했고 그녀들의 사생활을 터치하지 않는다. 같이 붙어있어야만 하는 이 시기에 방문을 열어 보는 행위는 수명을 단축시키는 것이기에 진작에 포기했었다.


남편의 공간도 터치하지 않는다. 정리정돈으로 따지면야 내가 그의 발끝도 따라가지 못하기에 알아서 하는 그의 공간을 굳이 침범할 이유도 없었다. 아이들 방도 남편의 방도 들어가지 않는 곳이고, 남은 안방과 거실과 주방은 모두에게 허락된 곳이면 내 공간은 도대체 어디일까? 나는 집안 모든 공간이 내 공간이라고 착각하고 살았다. 그리고 내 공간이 철저히 침해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한 이후로 불쾌함을 넘어 숨이 막힐 것 같은 기분을 느낀 시점이 왔다.


엄마! 엄마! 엄마! 제발 그만 좀 불러!!!
혼자 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고
진짜 엄마 도움이 필요하면 불러줘.


아들은 1분에 한 번씩 엄마를 부르는 것 같다. 무섭다고 혼자 자지도 못하니 난 아들과 24시간 붙어 있는 셈이다. 고민하고 엄마를 부르라고 소리친 후 어느 날 둘째가 혼잣말을 한다.


'와... 건이 진~~~ 짜 엄마 많이 부르네.'


지들도 만만치 않으면서 사돈이 남 말한다. 어눌한 발음으로 엄마라고 불러줄 때의 환희를 아직 잊지 못하지만 요즘은 엄마라는 소리에 노이로제를 일으킨다.


안방에서 잠시 쉬려고 하면 하나씩 들어와 옆에 눕는다. 안방 화장실은 건식으로 쓰기에 관리가 어려워 거실 화장실을 써달라 부탁하지만 오줌 줄기 휘갈는 소리를 내며 이용할 땐 또 이를 꽉 물게 된다. 리를 막 시작한 딸들은 뒤처리도 미숙하다. 충분히 이해하지만 왜 물청소되는 너른 곳을 두고 여기서... 잠시 쉬겠다고 양해를 구한 순간에도 안방 문은 벌컥벌컥 열는 곳이니 나만의 동굴은 어딘지 고민하게 된다.


요 며칠 무례하게 침범받는 나의 공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다. 이 집에는 나 빼고 모두 프라이빗한 공간이 있다고 생각하니 억울함마저 든다. 집은 다 내 공간이었기에 굳이 내 공간을 꾸미는 따위의 행위는 필요 없다고 생각한 나의 오만이 얼마나 큰 착각이었는지.


아침부터 작업을 시작했다. 간단하게 거실 컴퓨터 위치를 옮기고 내 방에 책걸상을 들이는 정도의 수고였지만 점심때가 되도록 끝나지 않았다. 컴퓨터남편 몫이었기에 일이 이렇게 큰지 예상치 못했다. 바닥에 박혀 있는 인터넷 선을 뜯어 위치를 달리 하고 책상도 옮겼다. 귀차니즘과 급한 성격이 콜라보된 나는 수많은 선을 뽑은 후 다시 꽂기가 귀찮았고 아이들과 함께 본체, 모니터, 프린터기, 스피커 등등 선을 꽂은 채로 한 번에 들고 옮겼다.


이 과정에서 지저분한 아이들의 공간과 물건을 확인하고 잔소리 폭격을 할까 싶어, 내내 이어폰을 꽂고 법륜스님의 말씀을 들었다. 그 어떤 일도 내 마음의 문제요 내 좁은 아량의 문제라고 폭격하시는 스님의 말씀을 들으면 화난 마음이 진정이 된다. 아이들은 말도 없이 이어폰을 꽂고 니트릴 장갑을 끼고 노동을 하는 엄마의 눈치를 살핀다. 쳐다보지는 않았지만 아이들의 시선이 온전히 느껴졌다. 긍정이든 부정이든 그 기운은 엄청난 것 같다.


며칠 전 성욱이가 날 오랜만에 보더니 많이 지친 것 같단다. 주말까지 안 풀리면 맛난 밥 사준다며 환하게 웃어준다. 만나면 항상 즐겁고 긍정적이라 내가 좋다던 그녀가 부정의 말을 쏟아 내는 날 보니 걱정됐겠지. 한참만에 만난 친구도 내 마음을 단번에 알아차리는데 정작 살 비비고 사는 가족들은 내 마음을 모르는 것 같아 서글퍼진다. 표현하지도 않았으면서 많은 걸 바라는 건지는 몰라도... 아니지 잔소리와 화와 짜증으로 표현은 했나?;

막둥이가 쓰던 스토케 의자가 내 미니 책장이 되었다.


한참 만에야 내 작은 공간이 완성이 되었다. 눈치만 살피던 삼 남매는 엄마가 부르는 소리에 냉큼 달려와 앉는다.


"엄마가 너희들 공간에 함부로 들어가는 거 봤니?"

"아니요."

"요 며칠 엄마는 엄마만의 시간과 공간이 없어서

  너무 힘들었어. 말끝마다 짜증이 올라오고 지치네.

  말로 해도 지켜지지 않은 많은 것들이 있었지만

  이 엄마의 공간만큼은 함부로 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어. 이 공간마저 침해된다고 생각하면 나도

  너희들 공간을 마음대로 들락거리며 생활할 작정

  이야."

"절대로 안 건들게요. 이번엔 진짜로요."



이번엔 진짜로 안 하겠다는 아들 말을 들으니 지금까지는 열심히 침범했다고 시인하는 것 같다. 내가 한 말을 다시 적는 지금 이것은 당부도 부탁도 아닌 협박이구나 싶다. 그래, 협박을 통해서라도 지킬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은 게 지금 내 심정이다.

인생 책부터 책상 위에 세팅했다.

나만의 공간에서 글을 쓰는 지금 진흙탕 같던 마음이 서서히 가라앉아 맑아지고 있다. 엄마라는 이름으로 너무 많은 것을 내어 주며 나를 지키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엄마'
희생적인 사람
헌신하는 사람
집안일하는 사람
애들 뒤치다꺼리도 하는 사람
힘들어도 지쳐도 참고 해야 하는 사람


엄마라는 단어에 들어있는 이미지가 신의 영역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모든 이미지를 부정하고 싶던 오늘 나만의 공간을 만들었다. 인간 이미영이 바로 서야 엄마 이미영도 있을 것 같다.


내가 나를 돌보는 게 이기적인 것 같았고 아이들을 혼내면 자책과 죄책감에 괴로워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미술치료 선생님께서 나보고 육아서부터 끊으라는 처방을 하셨다. 너무 완벽한 엄마만 그려진 육아책을 너무 많이 보는 나라서 조금만 엄마 역할에 소홀하다 싶으면 자책을 하게 된단다.


그 시간 이후 엄마와 나 양팔 저울에서 나의 비중이 점점 무거워져 수평을 이룬 것 같았는데 아직도 아니었나 보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여 책만 주야장천 읽었을 때 그 속에서 건져 올린 한 가지는 '나'였다. 모든 것을 관통하는 하나는 나에게 '나'였다. 나를 알고, 나를 찾고, 내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이해하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찾는 것!


삶의 유레카를 발견하고 나니 삶이 편안했는데 다시 마음이 흔들리는 시기가 왔다. 나를 다시 놓쳤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작은 공간이 나를 보듬고 안아주는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한참 후 퇴고하는 지금, 이 영역은 신의 한 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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