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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억과 상상 Apr 27. 2020

17년 차 며느리와 시어머니는 이렇다

수국이 배달 가던 날

어머니의 첫인상은 무서웠다. 농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진지한 말투, 키는 나보다 10cm 쯤 크고 옷은 항상 갖춰 입으시며 안경 속 날카로운 눈매까지, 내가 비빌 언덕이 없어 보였다. 애교 유전자는 다시 태어나면 기대할 수 있을 법한 내가 살갑게 엉겨 붙지도 않았으니 '엄마 같은 시어머니나 딸 같은 며느리'는 내게 판타지였다.


흥이 많고 감정 표현이 풍부한 친정에서 자란 나는 매사 진지하고 차분한 시댁 어른들이 참 재미없게 사시는 것 같았다. 첫애를 낳았을 땐가? 명절날 주방에서 콧노래를 하며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아주 진지하게 말씀하셨다.


"영아, 경주 할머니 댁 가면 그렇게 노래하면 안 된다이."


문제아가 된 기분이었다. 노래하는 게 잘못인가? 이후로도 한참을 생각했지만 시댁에 완전히 적응을 하고 나서야 이해를 했다. 성리학이 근간이 되다 못해 뿌리가 박힌 시조부 댁에서 실수할까 봐 걱정을 해 준 것이었다. 나는 친정엄마에게 '미영아 사랑해~'란 말도 자주 듣고 자랐기에 시어머니의 저런 표현이 사랑의 표현일 줄은 꿈에도 생각을 못했다.


시집가서 시조부 댁에 처음으로 간 날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어머니께서는 적진의 마지노선에 서있는 비장한 장군처럼 내게 말씀하셨다.


니는 내 뒤에만 있거라. 누가 뭐라 하고 뭘 시키든 내 말만 듣거라.


몇 년 뒤에 서울 숙모님께서 어머니의 얘기를 전해주셨고 그때서야 어머니표 츤데레 사랑법을 이해했다.


자네들 모두 우리 며느리 군기 잡으려 하지 말게.
내 며느리는 내가 시키고 내가 교육할 테니


딸도 없는 육 형제 집안에 맏며느리로 긴 세월을 살면서 갖은 풍파를 지켜본 어머니께서는 아기 같은 며느리가 상처 받고 힘들까 봐 장군처럼 앞을 막아섰던 것이다. 나를 한참 잘못 본 부분이 저 '아기'같은 며느리지만 우리 어머니 생각은 확고했다. 질펀한 경상도 사투리로 '얼라같이 여리고 눈물이 많아서 우짜노'란 말은 한 십 년은 들었는 것 같다. 이제는 울어봤자 나만 손해라는 감정이 메마른 아줌마가 됐지만.


애 둘을 낳고도 여전히 어려웠던 어머니께 조심스럽게 여쭤봤다.


어머니? 어머니께서도 관광버스 타고 놀러 가시면 춤추고 노래하세요?



이런 질문을 하는 며느리가 있을까만은 진심으로 궁금했다. 어머니는 춤도 안 추고 노래도 안 부르고 술은 당연히 안 마시며 어머니와 비슷한 친구분과 조용히, 재미없이, 진지하게 대화를 할 것만 같았다.


하모~하고 말고지. 춤추고 놀지



와우! 유레카!

어머니도 춤추고 노래하고 노신다!!

친정엄마에게 당장 전화를 했다.

엄마 엄마, 우리 어머니도 관광버스에서 노래하고 춤추신대.


깔깔깔 웃던 엄마의 웃음이 아직도 기억난다. 나이 들면 다 똑같지 놀러 가서 고상 떨면서 앉아 있는 사람은 없단다. 그러려만 안 가고 말지 누가 놀러 가서 그러냐고. 우리 어머니께서도 당연히 신나게 노신다고 확신하는 엄마가 이해되지 않았다. 우리 어머니는 절대 춤추고 놀 사람이 아니었다. 적어도 나에겐.




일찍 시집와서 벌써 17년 차가 되었다. 난 여전히 일희일비하며 타인의 감정에 사로잡혀 허우적댄다. 휴업으로 삼 남매와 종일 같이 있다고 불평 불만도 많고 여전히 남편의 말과 행동에 따라 내 기분이 결정되는 나약한 존재다. 삶이 마음대로 안된다며 이치에도 맞지 않는 의문을 쏟아 내니 인간이 되려면 멀기도 멀었다. 하지만 긴 세월 그냥 흘러 보내지는 않았나 보다. 산같이 크고 어렵던 어머니의 여자로서, 인간으로서의 모습이 자꾸자꾸 보이니 말이다.


몸이 약하고 말라서 유산도 많이 하시고 남편 하나 겨우 건졌다고 말씀하시는 우리 어머니. 그런 어머니의 자랑은 손주가 셋이나 있는 거다. 열 달 내내 입덧으로 앓아누워서 사이다와 찐빵만 먹었다는 어머니는 막달까지도 계단을 두 칸씩 오르며 살이 오르는 며느리를 경이롭게 보셨고 결혼 10년 차에는 '공로상'이라며 큰 선물도 주셨다.


남편이 어릴 때는 애가 둘셋 되는 집이 부러워 시기심까지 드셨단다. '형은 검사하고 나는 의사 해서 우리 엄마 행복하게 해주자'던 남편 절친의 어린 시절 말을 여전히 들먹이신다. 그때 고 녀석이 하는 말이 어찌나 부럽던지 혼자인 아들에게 피붙이를 만들어주지 못해 너무 미안하셨. 시댁에 있을 때 친구분들이 전화라도 오면 어머니가 하시는 말씀은 한결같다.


그래 우리 *아~들와 있다. 아이고 밑에 집에 미안해서 뭐 들고 또 안 내려갔나? 우리 아~들이 좀 많다 아이가. 엄청 먹는대이. 야들 식비도 만만찮다.


*아이들의 경상도 사투리


식사를 할 때면 아버님도 거드신다.


식구가 많아서 음식도 팍팍 주는구나. 허허


나는 안다. 식구가 많은 게 두 분의 가장 자랑이라는 것을. 평생 세 식구 단출하고 외롭게 지내시다가 북적이는 지금이 행복이라는 것을. 하긴 두 분 성향에 집이 절간 아니었겠나 싶다.


코로나로 인한 졸업식과 입학식 취소로 인해 화훼 농가도 큰 타격을 입었고 꽃 구매 독려 안내가 왔다. 마음도 얼굴도 고운 임주샘의 정성이 느껴졌다. 우리 집 주소를 쓰다가 애 셋과 전쟁을 치르는 우리 집에 무슨 꽃이냐며 이내 지운다. 그리고 갑자기 어머니 생각이 났다. 여전히 진지한 어머니께서 좋아하실지 아니면 괜한 짓 한 게 될지 염려스러웠다.


'에이 뭐 내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이런 걸

신경 쓰냐?'


배짱인지 배 째는 건지 모르겠지만 나이 먹는 게 다 나쁘지는 않다. 그리고 나의 배짱은 제대로 먹혔다. 이렇게 좋아하실 줄 알았으면 진작 좀 할 걸 싶다. 여전히 난 어머니께 받는 게 익숙한 '얼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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