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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억과 상상 Jun 07. 2020

공짜는 없다



외국 이케아에서 2년 동안 사용할 수 있는 연필이 우리나라에서는 2개월 만에 동났다고 한다. 고객들이 살 물건을 적는 용도로 비치된 10cm 정도 길이의 연필이 한국에서는 인터넷 중고 사이트에서 거래도 된다니 무더기로 가져간 사람들이 거지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을 것 같다.


요즘은 이렇게 작은 간장통에 제공되는 양파

LA 타임스는 2017년 '한국인들이 코스트코 김치라고 불리는 양파를 케첩, 겨자소스와 가득 채우고 먹는다. 그들의 양파 사랑은 엄청나다'라고 보도했다. 그리고 한국 코스트코 소비자들이 매년 미국에 비해 양파 20배, 전 매장에서 연간 200톤 이상을 소비한다고 소개했다. 양파를 싸 가거나 산처럼 쌓아서 먹다가 다 먹지도 못하고 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하니 코스트코 '양파 거지'란 말이 나온 것이다.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신다고는 하지만 거지 소리를 들어가면서도 공짜가 좋은 심리는 뭘까? 힘이나 돈을 들이지 않고 무엇을 거저 얻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나 역시 이케아에 가면 볼품없는 몽당연필이 탐났고, 집에서는 먹지도 않는 생양파를 코스트코 가서는 열심히 퍼 먹기도 했다. 하지만 싼 것은 비지떡이요, 공짜는 쥐덫 위에만 있음을 잘 알고 있다. 세상에 공(空)은 없다는 것을 경험으로 깨닫고부터는 더욱 그렇다.




때는 첫아이를 낳은 지 얼마 안 된, 모성애가 넘치던 시기였다. 막 이유식을 시작한 아이의 식사 메뉴가 항상 고민인 시절이기도 했다. (진단은 안 받았지만) 야경증 증상이 있었던 딸은 밤새도록 울어댔고 나는 항상 수면이 부족했다. 전공은 교육학이요 출산 전부터 육아서를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공부했으니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한마디로 까불다가 큰 코 다치던 시절이었다.


낮잠도 없을뿐더러 날이 밝을 때까지 울어대는 딸을 키우며 글로 배운 육아는 쥐뿔도 소용이 없었다. 수면 교육을 하며 수유 간격도 지키리라 생각했지만, 푹 자지 못하고 울어 대는 딸의 입에 공갈젖꼭지를 물리기 바빴다. 아이는 공갈을 빨다 떨어뜨리면 울었고 잠에 취한 나는 어둠 속에서 바닥을 짚어가며 젖꼭지를 찾았다. 온 방을 구르며 얼마나 더러워졌을지, 잠결에도 공갈젖꼭지의 위생이 걱정되었지만 부족한 수면을 이길 수는 없었다


나 잠 좀 자고 싶어. 엄마... 엄마!

우는 딸을 안고 나도 우리 엄마가 보고 싶어 목 놓아 울곤 했다. 등에 달린 센서가 얼마나 예민한지 내려놓기 무섭게 우는 딸이 참 밉더라. 바닥에 툭 내려놓고는 모른 척도 해보았지만 이내 미안함과 죄책감에 아이를 안고 어르고 달랬다. 그때마다 친정 엄마 생각이 났다.


밤낮이 바뀌었다는 나는 밤만 되면 울었단다. 그때는 시부모님도 너무 어려웠고 남편 역시 편하지 않았기에 내가 울면 혼이 날 것 같았다네. 우는 애들 들쳐업고 대문 밖 골목을 밤새 거닐었다는 우리 엄마.


"A B C D E F G~미영아 이건 알파벳 노래야. 엄마가 불러줄게. 들어봐?"


"오늘은 기역 니은을 가르쳐 줄까? 기역 니은 디귿 리을...."


"하늘 천 따지 검을 현 누를 황..."


"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


육아는 남편과 같이 하는 거라고 하면 본인 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엄마다. 사위들이 아이 기저귀를 갈고 열심히 놀아주는 것을 보면 세상 참 좋아졌다고 흐뭇해하기도 했다.


내가 자식을 낳고서야, 밤잠 못 자며 좀비처럼 살아보고서야 아이가 울기 무섭게 들쳐업고 나와 가로등 불빛 아래를 밤새 서성이던 스물다섯 어린 여자보였다. 기저귀에 오줌을 흥건하게 싸서, 등이 젖을 때까지 아이를 업고 있었다는 그녀의 모습이 자꾸자꾸 떠올랐다.


어느 날 알파벳 노래를 끝까지 따라 하던 딸이 천재인 것 같아서 밤새 업고 있어도 힘든 줄도 몰랐다는 엄마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리다. 장마가 오면 마르지 않는 기저귀를 가슴에 품었다가 갈아주고, 애 셋 키우며 시어른들 모시며 아등바등 살았을 엄마가 가여워지기도 한다. 남편마저 살갑지 않았으니 우리 엄마의 행복은 뭐였을까? 자식을 키워보고서야 자식 보고 사는 엄마의 마음을 이해했다.




내 딸은 밤낮도 바뀌었지만 입은 또 얼마나 짧은지 먹고 토하는 게 일상이었다. 섭식장애가 있는 건 아닐지 걱정될 정도로 먹고 토하기를 반복했다. 작디작은 이유식 스푼으로 갖은 쇼를 해 가며 먹이고 나면 항상 분수처럼 토해댔다. '마지막 이 한 숟가락만..' 하는 욕심을 부리면 어김없이 토했다.


그날도 저녁 이유식을 고민하며 퇴근하던 길이었고 운전하는 내내 오늘은 뭘 해주면 토하지 않고 맛있게 먹을 고했다. 신호를 받기 위해 정차 중에도 고민은 이어갔다.


똑똑!

앞에 정차해있던 트럭에서 내린 아저씨께서 창문을 두드린다.


"무슨 일이세요?"


"아... 전복 팔다 딱 한 상자 남았는데 그냥 가져가실요?"


"네? 그냥요?"


"일단 신호 바뀔 테니 저 앞 공터에 세우고 물건 함 보이소. 진짜 아깝심더."


귀신에 홀린 듯 트럭을 따라갔다. 머릿속에서는 이미 우리 딸이 전복 이유식을 맛있게 먹고 있었다. 아저씨께서 보여주는 전복은 어찌나 크고 싱싱한지 당장 바다로 돌려보내고 건강히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망설일 여지가 없었다.


"얼마 드리면 되나요?"


"냥 가져가라 안 캅니까? 우리도 퇴근하면 소주한 잔 하고 싶은데 소주값 쪼매 주소."


지갑에는 일이만 원 정도 들어있지 싶었다. 그 정도는 소주값으로 턱도 없었다. 더구나 저렇게 싱싱한 전복을 가져가라는데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 금액이었다.


"저... 현금이 많이 없는데 어쩌죠?'

"조~~ 기 현금인출기 있던데 후딱 다녀오실라요?"

"아, 그럼 되겠네요. 잠시만요."


우리 동네였음에도 전복에 정신이 팔려 상황판단이 안 되었다. 그새 누가 사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현금인출기로 달음박질쳤을 뿐.


"헉헉... 여기요."


"아이고 감사합니다. 맛있게 드이소. 집에 가서도 싱싱하게 살아 있을 겁니다."


"네, 정말 감사합니다."


전복 상자를 받아 든 발길이 가볍다. 남편에게 자랑하면 칭찬할 것 같다. 저 싱싱한 전복으로 전복죽을 끓여 우리도 먹고 딸도 주면 저녁도 해결이다. 양이 많았으니 굵게 썰어 넉넉하게 만들어야겠다.


집에 오자마자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전복 상자를 내밀었다. 뭐냐고 묻냐는 남편에게 좀 전의 상황을 설명했다. 이 정도 크기와 양의 전복이면 20~30만 원은 줘야 싶은데 단돈 10만 원으로 사 왔다며 흥분을 하는데 남편 표정이 좋지가 않다. '또 당했니?'의 표정이 분명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남편을 두고 다른 형태의 흥분을 했다.


"아니라고, 내가 직접 봤다고! 다 팔고 한 상자 남은 것도 확인했어. 피곤해서 퇴근하실 거라며 소주값만 달라져서 들고 온 거.... 야."


"열어 보자. 얼마나 싱싱한지."


"... ..."


하지만 상자 안에 들어있던 건 말라비틀어진 전복이었다. 수분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상한 게 의심될 정도의 그것이었다. 허탈했다. 이유식도 내 돈도 다 날아갔다.


"영아, 그 사람들이 어떻게 현금인출기 위치까지 알았겠니? 그리고 대로변이 아닌 공터 근처에서 왜 너를 세웠겠어? 그렇게 훌륭한 전복이 딱 한 상자 남은 것도 이상하지 않아? 일하느라 고생하신 분들에게 소주값 잘 드리고 왔다. 아이고 영아... 니는 내 없으면..."


"아 됐어! 됐다고! 아씨 진짜 나쁜 놈들이네. 난 윤이한테 먹일 이유식 생각뿐이었다고!"


억울해서 눈물이 핑 돌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의 나 20대의 어린 아기 엄마였다. 세상 물정 모르고 결혼해서 바로 아이를 낳아 리얼한 현실에 내 던져진 상태였다. 이론과 실제는 다름을 온몸으로 느끼며 아이를 키웠다. 훈육 따윈 피곤함에 가려 생각하지도 못했다. 애는 잘 먹고 잘 놀고 잘 싸고 잘 자면 된다는 친정엄마의 말을 고리타분한 옛날 육아 스타일이라고 무시했지만 정작 내 육아는 잘 자고 잘 먹는 것조차 안 되는 형편없는 것이었다.


잘 속고 단순하다고 나를 단정지은 남편의 확신은 20년째 계속되고 있다. 어디 가서 똑 부러진다는 소리 듣고 사는 나지만 남편 앞에서는 맥을 추지 못한다. 그리고 그 확신의 상당 부분은 전복 사건 때문일 것이다. '니는 내 죽으면~'으로 시작하는 남편의 걱정이 때론 억울하기도 하지만 전복사건은 공짜에 혹할 때마다 나를 다스리는 장치가 되는 것이 사실이다.


감정에 충실하고 기분파인 나는 전복사건 전후로도 공짜 좋아하다 뒤통수 맞은 소소한 경험들이 있다. 직접 해봐야 판단이 되는 인간이니 어쩌란 말인가. 하지만 소를 잃고 나마 외양간을 고치는 게 낫지 않냐고 위안을 한다. 덕분에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는 것을 확실히 알았으니 괜찮다고 치자. 비단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말이다.


전복죽을 끓일 때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것을 알려준 예전이 생각난다. 그렇게 안 자고 그렇게 토해대던 딸이 등짝을 한 대 맞아야 일어나고 다이어트가 입버릇이 된 중3이 되었다. 초보 엄마의 눈물과 노력이 통했나 보다.


공짜는 없구나.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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