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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억과 상상 May 14. 2020

올해 스승의 날은 반갑다

새로운 교사상을 고민하는 중

졸업하자마자 발령을 받아 스물네 살부터 일했으니 벌써 교직 경력 18년 차의 교사가 되었다. 삼 남매 키운다고 육아휴직을 많이 했기에 실경력은 한참 못 미치지만 학교에 몸 담은 지 이십 년이 다 되어가니 시간의 흐름이 놀랍다.


첫 발령을 받은 학교는 한창 뜨는 지역의 아파트 촌이었다. 신규교사라는 설렘과 더불어 신설학교의 깨끗함, 지적 수준 높은 학생들, 교양 있는 학부모님, 엄마 같은 동학년 선생님들까지 출근이 즐거운 시절이었다. 


김영란법(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 덕분에 이제는 누구도 학교를 방문하면서 뭘 사갈지 걱정하지 않게 되었다. 나 역시 삼 남매의 엄마인지라 이 법이 참으로 반가웠다. 그래도 학교를 가는데, 그래도 담임을 뵙는데 커피 한 잔이라고 사가야 하지 않을지 교사인 나도 이렇게 고민했는데 학부모님들은 오죽했을까 싶다. 


이 법이 시행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첫째 아이의 상담차 학교를 방문하며 차 한잔을 들고 갔다. 퇴임이 머지않아 보이는 선생님께서는 화들짝 놀라시며 차를 물리셨다. '겨우 차 한 잔'도 거절당하니 다시는 학교에 뭘 들고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법으로나마 학교에 들고 갈 것에 대한 고민이 사라진 것은 지금까지도 반갑다.


하지만 내가 발령받은 즈음에는 여전히 촌지 문화가 남아 있었다. 어디 학교 선생님은 받은 명품들을 휘감고 다니네, 누구는 차를 바꿨네 등의 뜬구름 같은 소문도 많았고, 젊은 교사들은 도대체 누가 촌지를 받냐며 분노하기도 했다. 교사들을 싸잡아 매도하는 분위기에 열을 내는 시기였고 나 역시 함께 했다. 막 졸업해서 열정 가득한 시기였기에 적어도 나는 '그런' 교사들에 편승하지 않겠노라 다짐도 했다.


하지만 그런 나를 시험하기라도 하듯 촌지가 날아왔다. 그날은 운동회 총연습 날이었고 아이들과 함께 운동장으로 나가려던 참이었다. 그때 키도 큰데 엄청한 높이의 힐을 신은 분이 다가오셔서 아무개 엄마 노라 소개를 하셨다. 키가 작은데 운동화까지 신고 있던 나는 그분을 한참 올려다본 기억이 난다. 마음은 운동장으로 나가야 했지만 그 어머니의 딸은 항상 기가 죽어 있는 학생이었다. 아버지는 멀리 돈 벌려 가셨고 어머니는 외국에 공부하러 갔다며 아이 할머니께 전해 들었지만 그분의 말투와 표정에서 다른 일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항상 엄마와 아빠를 그리워하며 걱정될 만큼 소심하게 지낸 그 아이를 생각하니 어머니와 얘기를 나눠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부장 선생님께 양해를 구하고 대화를 나눴다.


짙은 화장에 화려한 장신구, 미스코리아 헤어에 줘도 입지 못할 것 같은 강렬한 의상의 어머니는 굉장한 미인이셨다. 차림새 그대로 티비에 나와도 여느 연예인 못지않을 것 같았다. 아이를 걱정하셨지만 무미건조한 말투와 표정의 저의는 뭘지 궁금하기도 했다.


어머니는 긴 말씀 없이 아이를 잘 부탁한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봉투를 내밀고 일어나셨다. 이런 날을 종종 상상했지만 상상 속의 나는 멋지게 봉투를 거절하는 사람이었다. 맞닥뜨리게 될 그날을 위해 멘트까지 연습했지만 난 그저 당황하며 책상 위에 놓인 봉투를 집어 들뿐이었다. 


어머니께서는 내 손을 지그시 누르셨다. '제 처지 대충 아시잖아요. 두고 간 아이에 대한 미안함이라 생각해주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대충 이런 류의 말씀을 하셨던 것 같다. 말투에 슬픔 따윈 없었지만 담담하고 단호했다. 어머니의 기세에 압도되어 결국 봉투를 다시 전해지 못했고, 다시 실랑이할게 싫었는지 어머니는 빠른 걸음으로 교실을 나가셨다.


현관을 나와 운동장 쪽으로 향하는 어머니가 보였다. 바로 뛰어나가 봉투를 드려야겠다고 생각했으나 전 학년이 운동회 준비로 분주한 거기서 봉투를 전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쉽지 않았다. 스물네 살의 나는 생각보다 더 유약하고 어린 여자였다.


봉투를 들고 한참을 고민했다. 겨우 여덟 살 난 아이 편에 큰돈을 전달하는 건 위험해 보였다. 게다가 아이는 친할머니와 살고 있었고 며느리와는 유쾌한 사이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바람처럼 왔다 가신 어머니의 연락처는 당연히 몰랐고 강하게 거절하지 못한 나를 자책했다.


인간인지라 봉투 안의 금액이 궁금하긴 했다. 슬쩍 보니 적어도 50만 원은 됨직했다. 지금도 그 돈은 큰돈인데 20년 전의 나에겐 헉 소리가 나올 만큼의 금액이었다. 알바한 돈만 보다가 첫 월급을 받고 내가 이만 큰의 돈을 받아도 되나 싶던, 세상 물정 모르던 나였다. 그런 내게 봉투 안의 돈은 꿈에서라도 받아서는 안 될 돈이었다.


바로 학년 선생님들께 찾아갔다. 1학년 담임들은 주로 경력 있는 분들이 맡았는데 그때의 동학년은 나 빼고 원로 선생님들이었다. 나를 꾸짖고 당장 돌려주라고 하시길 기대했다. 그 말을 듣고 나면 정신이 번쩍 들것이다. 어떤 방법으로든 돌려 드려야겠다고 생각하며 선생님들이 모여 계신 교실로 갔다.


 이 선생이 알아서 하거라


이어서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네라고 대답하고 교실을 나오는데 괜히 물었다 싶었다. 기대한 대답이 아니라서 실망한 건지, 교단의 현실에 화가 난 건지 잘 모르겠더라.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이 선생이 알아서 하라'는 말이 떠오를 때면 새파랗게 어린 여교사의 고민 상담이 선생님들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싶고 죄송스러운 마음까지 든다. 


나는 고등학교 때까지 선생님들께 맞았다. 장난이 심하고 놀기를 좋아하니 어떻게든 공부를 시켜야 하는 선생님들에게는 골칫덩이 었다. 그때의 선생님들의 교육은 매였다. 한 번은 엉덩이로 정통으로 날아든 밀대 자루 덕분에 피멍이 들고 의자에도 앉지 못했다. 하지만 우리는 선생님들을 '씹기는'했지만 미워하지는 않았다. 잘못했으니 맞는다고도 생각했다.


성인이 된 후 엄마의 무지를 원망한 적이 있다. 엄마가 좀 더 깨어있었으면 자식 공부를 위해 좀 더 신경 쓰지 않았겠냐며, 그럼 내가 교사밖에 못했겠냐고 따져 물었던 적이 있다. 엄마에게 공부하란 소리 들어보는 게 학창 시절 소원이었던 나의 치기 어린 반항이었다. 공부하기 싫어 선생님들께 맞기도 많이 맞았으면서 어디서 나온 배은망덕인지 지금 생각해도 기가 막힌다.


그때 엄마는 미안하다고 하셨다. 몰라서 그랬다고 하셨다. 그 목소리가 너무 슬퍼서 화재를 돌리고는 혼자 눈물을 찍었다. 엄마는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었다. 몰라서, 어떻게 하는지 알지 못해서 그런 거였다. 나도 무지해서 선생님께 맞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부당한 요구를 하셔도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말랬으니 참고 따랐다. 


이렇듯 모르면 잘잘못을 따지지 못한다. 무지해서 실수하기도 한다. 그때의 원로 선생님들도 관행이었으니, 다들 그랬으니, 나만 꼿꼿할 수 없으니... 등의 많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우리 어머니께서도 아들 반장 만들고 싶어 없는 살림에 무리해서 촌지를 드렸다 하셨고, 형편상 감히 촌지를 내밀지 못했던 엄마는 한참을 미안해하셨다. 그 누구도 그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못했고, 하면 다행 못하면 미안한 것이었다. 


감히 내가 그 시대를 살아보지 않은 주제에 잘잘못을 따지고 싶지 않다. 그때 '이 선생 알아서 하란'말이 나에겐 아직까지 교직에서의 잣대가 되었으니 오히려 감사한 마음도 있다. 그때의 부끄러운 감정과 알아서 하란 말은 해이해질 때마다 나에게 회초리가 된다.


내일은 스승의 날이다. 학교에서는 스승의 날을 자축하자며 롤케익을 하나씩 돌렸다. 텅 빈 교실에서 빵 사진을 찍으니 교사가 된 후 처음으로 스승의 날이 좋다는 생각이 든다.


신규 때에는 스승의 날 뭘 준비할지 며칠 전부터 고민하는 아이들에게 미안했다. 당돌한 아이들은 뭘 받고 싶냐고 대놓고 묻기도 했고 선생님은 너희들의 정성스러운 편지 한 통이면 정말 행복하다고 답했다. 그리고 진심이었다.


하지만 김영란법이 시행된 후 어느 날 학생의 편지도 안된다는 지침이 내려왔다. 교직에 미련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선생님은 선물 대신 너희들의 편지가 좋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는데 이제는 그것도 불법이라고 한다. 꽃에도 규정을 들먹이며 제지하는데 마음                                                                                               속으로는 '누가 달랬나? 더러워서 안 받는다'라

                                                                                           고 소리쳤다.


그런 폭풍의 시기도 지나고 이제는 어느 정도 안정이 된 것 같다. 누구도 스승의 날 선물을 고민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년 스승의 날이 되면 참 스승에 관한 기사와 더불어 씁쓸함을 주는 기사가 보인다. 때론 기레기라는 말이 아깝지 않을 만큼 과장한 기사도 보인다. 


스승의 날이면 학교에서는 '스승의 은혜'를 연습하기도 한다. 더 이상 하늘 같지도 않은 교권인데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다는 노래를 같이 부르기도, 듣기도 민망하다. 스승의 날을 2월로 바꾸던가 없애자는 목소리는 교단에서 끊임없이 나오지만 논의가 되고 있는지 모르겠다.


올해는 코로나로 인한 휴업으로 학생들이 나오지 않는다. 그 어떤 스승의 날 행사도 없다. 부정적인 기사를 쓸 거리가 없으니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어서 빨리 코로나 사태가 진정되어 정상 생활과 정상 등교를 바라지만 조용히 맞을 수 있는 스승의 날이 행복하기까지 하다. 


교직에 관한 오해에 섭섭하기도 하고 속이 상하기도 했다. 교단의 잘못도 분명 인정하나 그렇지 않은 교사도 많은데 한 묶음 처리하는 게 화도 났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논의에 감정을 소비할 때가 아닌 것 같다. 스승이라는 고상한 말로 위계를 나눌 때가 아닌 것이다. 


휴업으로 인한 온라인 수업으로 학교라는 물리적 공간과 교사라는 존재에 많은 변화가 왔다. 더 이상 교사는 하늘 같이 우러러보며 무조건 따라야 하는 존재가 아니다. 지식적인 부분은 사람이 아니라도 다양한 방법으로 습득할 수 있게 되면서 교사의 역할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


4차 산업혁명으로 많은 직업이 사라질 때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기계가 못하는 영역이라고 하는데 교사도 그렇지 않을까 싶다. 교사 카페에는 우스갯소리로 '온라인 수업을 너무 잘 해버리면 교사는 없어질 테니 적당히 잘하자'는 농담도 올라왔다. 각종 온라인 수업 매체와 전문화되고 있는 사교육 시스템 하에서 공교육 교사로서의 위치를 생각하며 스승의 날을 보내고 싶다.





참!

그 50만 원 돈의 촌지로는 뭘 했냐고?

돌려줄 길이 없다는 것은 핑계일지 몰라도 시기를 놓친 민망함에 다 써버렸다.


우리 반 학급 문고를 채우는 것으로 말이다.


여전히 가끔 꿈속에서는 그 봉투를 들고 뛰어 나가 멋지게 거절하는 내가 나타난다. 안 받고 가시는 어머니 뒤로 봉투를 던지는 날도 있다. 돈은 항상 공중으로 멋지게 흩어진다.


꿈에서도 그때의 기억이 부끄럽나 보다. 이런 류의 꿈은 이거 하나로 족하니 다시는 꿈꿀 일 없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적어도 교직에서는 말이다. 많은 생각이 드는 스승의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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