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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로소 연 Jun 12. 2023

욱이 많아지는 나이

수다는 비타민

S의 입병이 낫지 않는다.

1주일 넘게 상태가 그대로다.

검색을 해보니 주차하기 편한 건너편 아파트 상가에 후기가 괜찮은 이비인후과가 있다.

의사 선생님이 친절하고 명의라고.

명의까지는 믿지 않아도 친절하다니 가보자.




고등학생딸을 따라 진료실에 같이 들어갔다.

입안에 무슨 약을 바르더니 밖에서 기다리다 5분 뒤에 다시 들어오란다.

S는 입안이 얼얼한 게 마취약인 것 같단다.

"그래? 구내염 같은데 마취를 왜 한 거지? 마취하면 한다고 얘기해 주던데 아무 말 없었잖아?"

5분이 지나 다시 들어가니 입안 헌 부위에 주사로 약을 넣으며

"마취해서 안 아플 거예요."라고 의사 선생님이 말문을 열었다.

이때다 싶어 나도 하고 싶은 말의 포문을 열었다.   

병원대기실에 붙어 있던 광고 포스터의 '수험생을 위한 비타민 주사'라도 맞아야 하나 싶어, 구내염이 너무 오래가는 걸 한탄하는 말로 시작했다.

“근데 이게 왜 이렇게 오래가는 거예요? 왜 그런 거예요?”

“모… 이빨로 씹어서도 생기고 피곤해도 생기고… 왜 그러냐고 하면 난 할 말이 없어요. 왜 그런 걸까요… 왜 그런지 알 수가 없죠. 왜 그러냐 물으면 할 말이 없어요."

“…… …… ……”


'이건 무슨 반응이지? 내가 물어보면 안 되는 걸 물어봤나?'

이런 생각을 하던 중에 의사 선생님이 (아니, 선생은 무슨! 나보다 나이도 많지 않겠구먼.) 다음 처치를 위해 옆의 의자로 옮기려 걸으면서

“어머니 좀 걸리적거리니까 저기밖에 앉아서 기다리세요.”

하면서 내 팔의 잠바를 잡고 살짝 옆으로 끈다.

……….

기분이 나쁘다.

뭔가 욱하는 기운이 꿈틀댄다.

막 화내고 싶은데 딸의 치료가 끝나지 않아서 일단 참았다.

어라 이건 무슨 상황이지?
친절하다더니 뭐가 친절한 거야?
일단 앉아서 생각해 보자.


그사이 치료가 끝나고 나오는 S가 입안이 얼얼한 표정으로 천천히 걸어 나오길래

"많이 아파?" 하고 묻자,


의사가 어색하게 웃으며

“침 삼켜도 돼. 약 2일 치 줄 테니까 그거 먹으면 다 나을 거예요.

허허허.. 침 삼켜도 된다니까…” 한다.


좀 전의 행동이 본인도 실수다 싶어 무마해 보고자 어색하게 웃으며 하는 말이라는 게 느껴졌다.

‘무슨 기분 나쁜 일이 있어 그렇게 말했다가 아차 싶었나? 하긴 오늘은 환자도 별로 없고 기분이 안 좋을 수도 있겠네. 그리고 내가 진료실까지 괜히 들어가서 참견하는 느낌을 받았나?’

그 짧은 시간에 의사의 맘을 헤아리고는 '여기서 내가 대답 안 하면 무안하겠네'라는 생각까지 이르러서는 마음과 달리 입으로는 작게 “네~” 하고 대답이 나왔다.

그리고 바로 후회했다.

'에이, 대답하지 말걸. 화난 거 티 내고 싶은데 화 안 난 것 같잖아. 혹시 작게 말해서 내가 아니라 S가 대답한 걸로 들렸을 수도 있지 않을까? 에이 자존심 상해. 뭔 이런 생각까지 하고 그러냐, 젠장!'


집으로 오는 차에서는 모든 상황을 다 지켜본 S에게는 좀 멋쩍어 아무 말도 못 하고 조용히 왔다.






아파서 병원에 가 의사를 만나면 왜 그런 증상이 생기는지 궁금해서 묻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다 아는 병이라 뻔하게 스트레스받지 말고, 피곤해서 그런 거니 좀 쉬라는 대답이라도 들어야 하지 않는가.

환자가 의사에게 위로받고 싶은 것은 당연한 심리이다.

플라세보 효과도 있지 않은가.

치료받고 약 받고 거기에다 위로도 받으면 그 순간 증상이 호전되는 것 같다.

이런 경험 후에 그 의사 선생님 친절한 명의라고 하는 것 아닌가?


 

밤에 자려고 누웠는데 다시 생각이 나서 욱하는 감정이 올라온다.

‘아오 씨! 나오면서 대답을 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너무 속없어 보였을까?’


진료비 계산하면서 간호사에게라도

“네이버에 친절하다는 후기 보고 왔는데 샘이 기분 따라 달라지시나 봐요."라고 한마디 하고 나올걸 후회된다.

힘들게 공부해서 의사 되었을 텐데 사회생활이 재미없나 보네. 

하긴, 환자가 별로 없는 날에는 진료실 안에서 혼자 대기하고 있고, 아픈 사람들만 보고 거의 비슷한 얘기만 할 테니.

그래도 그렇지 걸리적거리니까 나가 앉아 있으라니, 마치 총기 흐려진 노인네 취급을 받은 느낌이다.

진료할 때 보호자는 밖에서 대기하라고 미리 얘기해 줘도 되는 걸 그렇게 팔을 끌면서 귀찮은 티를 냈어야 하나. 이대로 잠이 안 온다. 열받아.

순간, 검색했던 네이버가 떠올랐다.

‘아! 네이버에 방문후기 올려야겠다. 친절하다고 하더니 설마 댓글알바를 쓴 거야? 왜 그렇게 불친절하고 기분 나쁘게 했지? 설사 안 좋은 일이 있어도 그렇지!

암튼, 난 기분 나쁜 걸 풀어야겠어서 방문후기를 좀 솔직하게 써줘야겠다.'


네이버 방문후기로 들어가니,

‘엥? 후기를 남기려면 영수증이 있어야 하잖아.

아차! 현금 내면서 영수증을 안 받아왔네.

이런! 아쉬워라. 솔직한 후기 올릴 기회를 놓쳤네.'




댓글이나 후기를 남기는 것은 굳이 나까지 나설 필요가 있나 싶어 내 사전에 없던 일이다.  

불편하면 내가 좀 참고, 참아도 되면 그냥 넘어가고 다음에 안 사거나 안 가면 될 일이었다.

나이가 들고 일명 ‘K-아줌마’가 되어서 그런지 이제는 싫으면 싫다고 말해야 속이 풀린다.

내가 겪은 불편함을 알려서 다른 사람이 불편을 더 겪지 않도록 해야 마땅하다는 생각이 자동 재생되어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큰소리로 하는 일이 잣다.

겁은 많아 앞장서서 봉기 충천하지는 못해 혼잣말인 듯한 잔소리를 크게 말하고, 

아유~ 담배냄새, 누가 길에서 담배를 피우냐~ 

누가 주차를 이렇게 해~ 다른 차 지나가기 힘들게. 

질문인 듯 물어보며 건의한다.  

사장님~ 여기 카페 안에서 먹을 건데 일회용 컵에 주시는 거 맞아요? 난 일회용 컵 별로던데. 그리고 원래 안되는 거 아닌가?

사장님~ 이거 할인하는 거 아니에요? 앞에는 크게 할인한다고 써놓으니까 그 가격인 줄 알았네. 할인 안 하는 거면 여기 걸어두면 안 되겠다~ 



이런저런 방법으로도 풀리지 않을 때는 수다가 답이다.

어릴 적 내성적인 성격이 나이가 들면서 바뀌었다. 아이가 고등학생이라, 일이 없는 날엔 하루종일 혼자 있는 날이 종종 있다. 그런 날엔 책을 보거나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반복되는 집안일을 분주하게 하지만 하루 종일 말할 일이 없다. 그러면 입안에 가시가 돋고 기분이 우울해진다.

특히 이런 특별한 일을 겪고 나서는 혼자 마음에 묻는 것으로는 해결이 안 된다.

편하게 얘기할 친구한테 전화라도 해서 내가 이런 일을 당했는데 나 억울한 거 맞다는 동의를 듣고 같이 분투해야 내 맘에서 사건이 마무리된다.

이 밤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후기도 못 올리고 전화도 못하고.  

내일이 되면 일찍 수다친구한테 전화해야겠다.

수다는 비타민이지.

얼른 자자. 내일아 빨리 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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