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고딩의 눈물
고등학교의 중간고사, 기말고사 기간에는 마음에 좁고 깊은 골짜기가 만들어진다.
내신 기간마다 만들어진 협곡이 5개다.
내신(內申)의 사전적인 정의는 '상급 학교 진학이나 취직과 관련하여 선발의 자료가 될 수 있도록 지원자의 출신 학교에서 학업 성적, 품행 등을 적어 보냄, 또는 그 성적'이다.
대학진학을 위한 고등학교의 내신은 중간, 기말고사와 학기 중의 수행평가를 합산해 100점 만점으로 상대평가하여 등급을 매긴다.
이제 반 왔는데 나머지 반을 어떻게 보낼까?
내신을 포기할지 계속 최선을 다할지 모르겠다.
(내신 등급으로 평가하는 수시 전형으로 원하는 대학에 원서라도 써 볼 수 있는 내신 등급이라면 기대하며 열심히 하겠지만, 수능시험 점수로만 평가하는 정시 전형으로 원서를 쓸 계획이라면 내신 시험에 최선을 다할 힘이 안 생긴다.)
매 학기마다 기대와 걱정과 체념이 교차된다.
고등학교 1학년 1학기 중간고사는 처음 치르는 내신 시험인 만큼 모두가 긴장을 하고 시험을 본다.
고등 입학 전 겨울방학부터 첫 시험의 중요성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으며 준비한 아이들의 긴장감은 수능시험 못지않다. 한겨울 차가운 공기처럼 머리가 쭈뼛서고 온몸의 세포가 세로로 바짝 일어서는 느낌이다.
몇 점을 받으면 몇 등급이 되는지 감도 오지 않아 감점된 점수를 보고 실망해서 울었다가
모두가 어려워한 과목은 35점 만점에 -10점이 1등이라고 하여 안심하다가
1개 틀리면 3등급이라는 과목에는 멘붕이 되었다가를 반복한다.
그래도 첫 시험이라 조금만 울고 기말고사 잘 봐서 만회해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1학년 1학기 기말고사는 아직 긴장이 풀리지 않아 모두 다 열심히 하기 때문에 중간고사 등급에서 별차이가 없다. 다 함께 전력질주하는 레이스에서 경쟁자를 앞지르기란 보통의 노력으로는 불가능하다.
S는 노력하고 기대한 만큼 점수가 나오지 않아 시험기간 내내 울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시험이었던 중간고사는 주중으로 끝나서 그나마 5일이었지,
목요일부터 시작해서 토, 일을 보내고 다음 주 수요일까지였던 기말고사엔 꼬박 7일을 눈물로 협곡을 만들었다.
그렇게 실컷 울고나야 다시 뭐라도 할 수 있다.
대부분이 수능 공부를 하는 여름방학에 2학기 내신 준비를 해서 성적 향상 장학금을 받으리라는 다짐으로 심기일전했다.
S가 다니는 고등학교는 사립학교라 그런지 장학제도가 있는데 성적 우수 장학금 외에도 '성적 향상 장학금'이 있다. 1학기보다 2학기에 성적이 많이 오른 20명에게 20만 원씩 장학금을 수여한다.
S는 여름방학 동안 2학기 내신 공부를 했다.
다니던 국어, 영어 내신 대비 학원은 학교 수업을 한번 더 듣는 것과 같을 뿐, 시간 절약을 위해 학원을 안 다니는 게 좋겠다 하여 끊었다.
사회, 과학, 한국사 과목도 미리 교과서 예습을 하고 자습서와 문제집을 사서 공부했다.
혼자 하기 어려운 수학만 학원을 다니고 순 공부시간을 최대한 확보하며 스케줄을 짜고 계획대로 방학을 보냈다.
좀 버거웠지만 나름의 준비를 하고 1학년 2학기 중간고사를 맞이했다.
이 정도 준비하면 웃을 줄 알았다.
그러나 운명은 내편이 아니었다.
첫날 본 수학시험에 시간 착오로 시험지 절반정도를 못 풀고 내는 어이없는 실수를 했다.
시험시간 50분 중에서 10~15분 정도 지났으려니 했는데 끝나기 5분 전 종이 울리더란다.
S는 너무 황당하고 현실로 느껴지지 않았는지 그날은 울지도 않았다.
하필 시험도 1학기보다 쉽게 나와서 다들 점수를 잘 받았다고 한다. 기말고사에 만회하려면 얼마나 잘해야 하는지 감도 안 왔다.
중간고사가 모두 끝나고 수학 등수가 103등 떨어진 걸 보고 집에 와 펑펑 울더니 코로나 이후 몇 년 만에 가는 수학여행도 안 가고 공부만 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렇게 말하고 자습실에 가서는 저녁 먹는 시간도 아깝다고 편의점에서 삼각김밥 2개만 사서 야외 의자에 앉아 얼른 먹었단다.
굳은 결심을 한 것은 칭찬하고 그 맘도 충분히 이해되지만 마음 짠하게 밤공기 싸늘한 야외에서 음료수도 없이 삼각김밥이라니...
사람이 갑자기 바뀌면 잘못될까 봐 걱정이 앞서 수학여행은 다녀오라고 다독여 보냈다. 필요 없다는 옷도 사주고 좋은 추억 만들고 오라고 했다.
(그날 이후 굳은 결심은 야들야들해져서 수학여행의 즐거움에 묻혀버렸다.)
1학년 마무리 시험인 2학기 기말고사.
한국사는 1학기부터 누적범위라서 2학기 기말고사는 교과서 1권 전부가 시험범위였다.
국어는 교과서의 시 한 편이 지문으로 나와 시의 일부를 지우고 빈칸을 채우라는 주관식 문제도 있었다.
시를 외우라는 얘기도 없었는데 빈칸 채우기라니... 내신 시험은 틀리라고 내는 문제가 있다더니 이런 문제인가 보다 했다.
2학기 기말고사 기간에도 어김없이 협곡에 눈물 마를 날이 없었다.
1학년이 끝나고 방학식 하는 날, 성적향상 장학금을 받는 친구들을 보고 집에 와서는 생떼 부리는 아이처럼 방바닥에 누워 버둥거리면서 울었다.
학교를 관두고 검정고시 보고 수능 준비만 해서 정시로 학교 가는 게 낫겠다며 자퇴하겠다는 폭탄 발언도 했다.
4살 무렵 어린이집을 처음 갈 때부터 '말 안 들으면 어린이집 못 가게 한다'는 것이 벌칙이었던 아이이고, 지금까지도 학교생활을 좋아하는 아이가 진심 100%로 하는 말은 아닐 거라는 게 뻔하다.
엄마에게 화 푸는 게 보인다.
그러니 또 다독이며 학교는 다니자. 학교 다니면서 정시 준비하자 했다.
1학년 겨울방학에 정시 공부를 시작하고 있었지만 2학년이 되고 보니 내신을 벌써 포기하기에는 생기부에 쏟은 정성이 아깝게 느껴졌다. 그래서 내신 공부는 시험 전 4주만 열심히 해보자 했다.
1학년때와는 달리 선택과목이 많아져서 중간고사에 시험을 보는 과목이 줄었다.
수학이 2과목(수학 1, 확률과 통계)이기는 해도 모두 6과목이라 작년보다 약간의 여유도 부릴 수 있었다.
하지만,
2학년 1학기 중간고사 기간 5일 내내 징징거리며 변함없이 협곡을 만든다.
S: 나는 공부해도 안되나 봐. 열심히 해도 점수가 안 나와.
엄마: 그냥 점수 신경 쓰지 말고 네가 뭘 몰랐는지 알게 되는 기회라고 생각해. 문제를 이렇게 꼬아서 내면 내가 착각을 잘하는구나~ 문제를 이렇게 꼬아서 낼 수도 있구나~ 이건 틀리라고 낸 문제구나~ 몰랐던 문제는 새롭게 알게 되어 기쁘구나~ 생각해.
S: 시험 점수가 포기를 하게 만들어. 애들은 왜 이렇게 다 잘하는 거야.
엄마: 내신 위주의 시험을 잘 보는 아이가 있고 수능 시험에 더 잘 맞는 아이가 있고 그런 거지.
S: 아니야. 잘하는 애들은 다 잘해.
엄마: 다 잘하는 애들도 있긴 하지. 넌 네가 잘하는 거 하면 되잖아.
S: 난 잘하는 거 없어. 점수가 말해주잖아.
엄마: 3월 모의고사는 잘했잖아. 한국사 만점 받았고, 영어도 이번에 1등급이었잖아.
S: 영어는 찍어서 맞춘 걸로 겨우 1등급 된 건데 뭘. 그리고 한국사는 절대평가잖아.
엄마: 그래도 잘한 거야. 잘하고 있는데 왜 자꾸 못한다고 그래. 뇌는 잘 속는다고 하잖아. 그래서 가짜로 웃어도 엔도르핀이 나온대. 그러니까 '나도 할 수 있다' 생각을 해야 뇌도 진짜 잘하는 뇌로 만들어지는 거야.
S: 언제까지 '할 수 있다'만 해야 해?
엄마: 물이 끓으려면 100도씨가 돼야 하잖아. 넌 지금 70도 80도로 올라가고 있는데 왜 자꾸 네 머리에 찬물을 붓고 있어? 열심히 하다 보면 때가 오는 거지. 올 듯 말 듯하고 있는데 자꾸 찬물 붓지 마.
S: 뭐가 올 듯 말 듯이야. 하나도 아니야.
엄마: 왜 아니야, 잘하고 있는데 자꾸 그러지 마. 중학교 때까지 운동선수 하다가 열심히 공부해서 수능 만점 받은 사람도 있고, 선행 하나도 안 하고 고등학교 왔는데 열심히 해서 수능 만점 받은 사람도 있다고 했어. 유튜브에서 분당강쌤이 그랬어. 공부머리도 재능이긴 하지만 수능공부는 공부머리 상관없이 열심히 하면 할 수 있는 수준 이랬어. 원하는 대학 가려면 거기에 맞는 점수 나올 때까지 열심히 해봐.
S: 나 이제 내신 공부 안 할 거야. 영어랑 국어는 실력이 올라가는 공부가 아니라 틀리라고 내는 문제가 너무 많아.
엄마: 내신 공부 안 한다는 애들이 수능공부도 안 한다고 했어. 그럼, 내신 공부 안 하는 대신 매주 시간 재면서 수능 문제 풀어.
S: 알겠어. 수능 풀게.
엄마: 그래, 그럼 내신 하지 마. 이제부터 수능 영어, 수능 국어 해.
대화가 꼬리 잘린 듯 끝맺음이 없이 싹둑 끝났다.
내 마음은 찜찜하고 S는 말없이 자습실에 갈 가방을 챙긴다. 4-5시간 공부할 가방에 내신 시험지와 책을 한 보따리 넣는다.
엄마: 무슨 책을 그렇게 많이 챙겨?
S: 내신 문제 어떤 교재에서 나왔는지 찾으려고.
속으로만 '내신 안 한다면서 내신문제 어디서 나왔는지는 왜 분석해?' 했다.
내신대비 비법으로 알려줬던 내신 기출 분석을 하겠다는 S를 보니 저도 아직 헷갈리나 보다 싶다.
이놈의 입시가 참 어렵다. 여러 전형 중에 어느 전형에 맞춰 준비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다.
자기 포지션을 잘 모르면 더 헷갈리고 어렵다.
그 힘든 노력을 어디에 쏟아붓는 게 맞는지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눈감고 달리기 하는 두려움과 같으려나.
하지만 한발 떨어져 생각해 보면 입시를 준비하는 수험생 모두가 겪으며 극복해야 할 과정이다.
내가 목표한 대학에 합격하기 위해 지금의 내 실력을 제대로 파악하고 인정하며, 잘하고 싶은 욕심만큼 노력하고 열심을 내야 하는 것은 세상살이에도 필요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눈만 높고 욕심만 있어서는 성인이 될 수 없다.
시험기간마다 제 욕심에 울면서 다니면 먼저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 '아프겠구나, 얼마나 힘들겠어' 위로해 준다.
그러다 징징대는 기간이 길어지면 인내의 한계를 느끼며 나도 모르게 화가 난다.
'제 공부하며 힘든걸 왜 나한테 풀어?' 하는 마음의 소리가 입안에서 맴돈다.
시험기간마다 내 가슴팍에 새긴 '참을 인'이 몇십 개, 아니 몇백 개인지 모르겠다.
차라리 신경 안 쓰이게 내신 상관없이 수능만 보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평소에는 적당히 여유 부리고 잘 지내다가 시험 기간만 되면 예민해지는 S덕분에
내신 기간을 한번 지날 때마다 내 머리카락에 흰머리가 눈에 띄게 늘어난다.
이러다 S가 고등학교 졸업하면 나는 백발 되는 거 아니겠지?
*사진출처: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