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심지를 잇는 대로는 물론 큰길에서 갈라져 나와 도시 안쪽까지 깊숙하게 뻗은 골목들도 경사가 꽤 있다.
걷다 보면 금세 숨이 찬다. 멈춰 서서 주위를 둘러보면차도를 둘러싸고 양옆에 선 건물들이 빼곡하다.차도와 건물 사이에 낀 탓인지 인도(人道)는 좁다. 휠체어나 유아차가 지나가긴 힘들고,공을 굴린다면 멈추지 않고 아래로 아래로 굴러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튀르키예 도착 첫날, 숙소로 가는 길
문득 눈앞의 언덕이 내 인생을 상징하는 커다란 비유로 느껴진다.
좋자고 여행 와서도 혼자 짐을 지고 오르막을 타야 하는 운명인 걸까.
삶에 왜 이리 언덕이 많은가.
그런데 왜 비빌 언덕은 없을까?
그림자처럼 상념이 따라붙는다. 지치고 힘들 때습관처럼 곱씹는 생각이다.
오래전부터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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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어린 나에게 세 가지 소원을 물었다면 아마 이렇게 답했을 것이다.
첫 번째는 아빠가 술을 마시지 않는 것, 두 번째는 아빠가 집에 들어오지 않는 것, 세 번째는 술 마신 아빠가 들어오지 않는 것이라고.
야속하게도 신은 자주 내 바람을 외면했다.
든든한 지원이나 살뜰한 조언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집에 있을 때 마음이 따뜻하고 편안하길 바랐다.
그러나 모종의 이유로 가정경제가 파탄난 후 아빠는 자주 취했고, 그럴 때마다 아파트 단지가 떠나가라 고함을 지르며 세상을 원망했다. 엄마는 괄괄대는 아빠를 두려워하면서도 참지 않고 맞섰는데 그러면 육탄전이 벌어졌다.
초등학교 6학년 때였을까. 세간살이를 던지며 분노를 표출하는 아빠를 피해 엄마와 함께 밤거리로 나왔다. 나는 엄마에게 괜찮냐고 물었다. 괜찮다고 답하는 엄마의 얼굴에는 멍자국이 있었고목소리는 떨렸다. 어쩌면 그날, 재워줄 곳을 찾아 전화를 돌리며 그녀는 결심했을 것이다. 이 지옥을 끝내자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가 짐을 쌌고, 아빠는 우리 남매를 불러 이제부터는 할머니와 살아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는 해외 건설현장으로 곧장 떠나 버렸다.
양친이 원수처럼 싸우고 증발한 후 할머니는 나와 동생을 떠안았다. 그녀는 내 인생에 없어서는 안될 빛이었지만 사춘기의 그늘을 밝힐 만큼 환하지는 못했다.
한 손에는 세상의 부조리, 다른 한 손에는 존재론적 위기를 쥔 채 나는 중학생이 되었다. 두 사람의 결혼생활에는 마침표가 찍혔지만 나의 혼란은 막 시작된 참이었다.
그즈음에는 학교 도서실에 처박혀 살았다. 마음을 기댈 곳이 없었다.
어두운 표정을 하고 다녔으니 친구가 있었을 리도 없다. 혼자였지만 외로운 티를 내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 나를 꽁꽁 숨겼고, 살 길이 공부밖에 없는 것 같아서 성적을 올리려고 애를 썼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 밝아졌지만 어떤 영역은 고스란히 혼자만 웅크리는 어둠으로 남았다.
고등학교는 버스로 40분, 정류장에서 다시 십여 분을 걸어야 나오는 곳이었다. 나름 우리 지역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명문여고라고들 했는데,정말로 산을 깎아 지은 곳이어서 등교할 때마다 오르막길을 등반했다. 비 오는 날에는 현관까지 향하는 계단을 타고 폭포처럼 빗물이 흘러내렸고, 겨울에는 꽁꽁 언 언덕길에서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다리에 힘을 주어야 했다. 야자를 마치면 밤 10시쯤 됐는데 곧바로 급경사를 뛰어내려 갔다. 막차를 놓치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리고 튀르키예.
만리타향의 가파른 언덕길을 오가며 나는 다시 그때로 돌아가고야 만다.
딸을 위해 우산이며 손난로를 들고 교문 앞에 서 있던 부모들과 그들의 살가운 품에 안겨 안락한 집으로 돌아갈 친구들을 눈물나게 부러워했던 고등학생 때, 사춘기와 중2병에 더해 온 세상의 불행까지 덮어쓰고 이불속에서 울었던 중학생 때, 집에 들어가기 싫어 어스름이 내릴 때까지 놀이터를 서성였던 초등학생 때로...
그대는 지금 사막에 있으니 차라리 사막 속에 깊이 잠겨보게. 사막이 그대에게 깨달음을 줄 걸세.
'연금술사'의 한 구절처럼 언덕에 서서 언덕 속에 깊이 잠겨보려 한다. 어쩌면 우리는 평생 깨달음을 찾아 헤매며 인생을 돌고 도는 존재들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