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나페홀로 Mar 06. 2024

귀신이 된다는 것.

'파묘, 곡성, 랑종'과 '줄넘기'의 상관관계

요즘 영화 '파묘'의 열풍으로 새삼 주술과 무속에 대한 관심도 

덩달아커지는 듯 하다. 


나 역시 간만에 쫄깃한 긴장을 만들어주는 '파묘'를 보고 나니,

새삼 나홍진 감독의 '곡성'이 다시 떠올라 

아내와 큰딸도 함께 밤늦게 집에서 ott로 시청했고,

또 며칠 후에는

너무 무섭거나, 혹은 상당히 정서적으로 안좋을듯? 한 두려움으로 피했던

'랑종'까지 혼자서 (아내는 끝내 안보기로 했다) 보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이 3편의 오컬트 영화 중, 아니 그 이전 다른 영화들까지 포함해서도 '랑종'이 가장 

인상적인 영화였다. 여튼 랑종이야기는 다음에 하기로)


사실 귀신이라는 것은 

육체를 갖고 있지 않기에 

육체를 갖고 활동하는 인간에게 공포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파묘'에서도 영화 전반부는 귀신의 실체가 감춰져 있어서 최고의 공포를 선사하다가

후반부 '정령'? 이라는 이유로 몸을 갖고 시작적으로 나타나니 갑자기 공포보다는 

해괴한? 느낌을 주면서 영화의 긴장감을 반감시키게 되는 것이다.

물론 육체를 갖게 된 귀신이 안무섭다는 것은 아니다. 좀비물이든, 옛날 13일의 금요일의 제이슨이든....

당연히 현실에서 내 신체를 난도질하는 악마가 있다면 당연히 무섭지.

그런데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입장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귀신에 대한 기대감으로 공포를 기다리는데

갑자기 육체를 떠안고 돌아다니는 일본무사의 정령의 등장은 그 기대를 어찌되었건 꺾어버리게 된다는 점에서 호불호가 갈리는 결정타가 된다. 


그러나저러나 

갑자기 이 얘기를 하는 이유는 

바로 내 '신체' 때문이다.


나는 어릴적, 즉 고교생활까지를 기준으로 한다면 

정신과 신체의 조화를 잘 실현하고 살았다. 

즉, 엄청나게 많이 놀았는데, 그 노는 방법이 주로 뛰어노는? 것이었기에 

신체적으로 건강할 수밖에 없었다. 

엄청나게 먹어도 살이 찔 수가 없는 일상이었다.

새벽에 일어나 간단히 농구로 몸을 풀고, 학교에 가서 0교시는 가볍게 제끼고 친구와 농구시합을 하고, 

매 쉬는 시간에는 10분도 알차게 축구를 했다. 점심시간은 축구시합, 방과 후 다시 농구시합, 집에가서 숙제 좀 하고 저녁먹으면, 다시 밤에 동네 농구대나 학교 농구대에서 낯선 사람들과 또 농구, 이런 일과를 보냈다. 

학교 전체에서 체육관련해서 항상 두각을 드러냈다고 자부할 정도였고,

중학교 동창들은 내가 당연히 체대에 갔을거라 예상할 정도라고 보면 된다. 


그런데, 대학에 들어오고나서 

공부가 재미있었고,(책읽는 재미가 이 때부터였다.)

고교 때처럼 항상 반친구들과 공차는 일상이 있을리 없으니

자연스레 운동도 멀어져갔다. 

그러다,

여차저차 결혼하고, 아이낳고, 운동은 전혀 안하게 되는 

중년이 되었다. 

심지어 하는 일도 책상에 앉아서 하는 일이다보니 운동량은 최저치를 기록하며

몸은 점점 불어갔다.


내 키가 168인데, 고교시절에는 65킬로를 항상 유지했으나

결혼 이후에 급격히 살이 찌면서 지금은 항상 80킬로를 유지한다. 

고도비만이다. ㅠㅠ


20대 때는 그런 자신감이 있었다. 

'살 좀 찌면 어때? 운동해서 빼면 그만이야!' 

그런데,

살이 쪄보니 깨달았다. 

운동을 안하면 

몸이 무거워지고 

무거워진 몸은 움직이기 힘들다는 점. 그리고 움직이기 힘들면 운동하고 싶은 마음도 꺾인다는 점. 

아, 신체가 바뀌니 정신도 따라서 바뀌는 걸 계산하지 못한 것이다.


결국 체중조절에 늘상 실패하며 

80킬로의 몸에 

운동도 안하니,

어쩌다 무리해서 걷기라도 하면 

허리가 눌리거나 

다리 한 쪽이 못걸을 정도로 아파서 

정형외과 도수치료로 간신히 다시 살아나는 패턴을 

거의 매 년 경험하고 있다. (난 오십견도 30대 후반에 왔다. 오십견이면 오십에 와야지 ㅠㅠ ) 


그나마 올 2024년 들어서 

하루에 만보라도 걷기 위해 최대한 지키고 있고,

슬며시 밤에 나가서 간단한 조깅도 하게 되었다. 

간만에 몸을 움직이니 

운동할 때의 뿌듯함이 살며시 올라오니 그 기분 또한 나쁘지 않았다. 


그러다

권투를 배우기 시작했다.(갑자기 권투? 정말 '시작'했다는 거지,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가 아니다.)

이제 '한번' 권투체육관을 다녀왔다. 

원래는 내가 아니라 

이미 어릴적부터 운동할 기회가 없는 불쌍항 우리 딸들을 위해 

등록해둔 권투체육관이었다. 

작년부터 첫째랑 둘째 아이가 다니고 있었는데, 

첫째는 고등학생이다보니 정말 일주일에 두번 있는 체육관 시간을 맞추기도 빠듯했고,

둘째는 다닌다고 거짓말하고 3개월을 동네를 배회하며 놀러다니다 걸렸다.

결국 둘째는 체육관 가짜로 다니다 걸려서 자연스레 안다니게 되었고,

첫째는 3개월치를 등록해두었는데 방학 중 한 달, 그것도 딱 두어번만 나가고 결국 안나가게 되어

내가 대타로 남은 기간에 운동하게 된 셈이다. 


물론 나도 권투에 대한 로망이 있다. 권투만화를 꽤 좋아하니까. 

그래서 겸사겸사 

못 이긴척,

아이들 대신 권투체육관을 찾아갔다. 



권투 초보자 때 할 운동은 '줄넘기'라는 것을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나도 당연히 예상했고, 

간단한 체조만 관장님과 하고,

관장님의 지시에 따라 줄넘기를 시작했다. 

줄넘기는 

3분하고, 30초 휴식, 다시 3분,,,이런식으로 3번의 사이클을 반복하면 된다. 

생각해보면 총 9분밖에 안된다. 간단했다.


그리고 나는 초딩때. 그래 초딩때 잘나가지 않은 사람이 있던가. 

여튼 초딩 때도 운동을 잘했기에 

줄넘기는 2단뛰기(쌩쌩이라고 불렀다)를 100회넘게 했었던 실력자였다. 

후후. 


근데 생각해보니 그 후로 줄넘기를 언제 해봤던가.

아이들 키우면서 옆에서 잠깐 2단뛰기로 폼내려고 

한두번 해본 게 다였다. 


지금 이런 자질구레한 얘기를 왜 하고 있는지 예측하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

줄넘기가......

3분은 커녕,

1분도 연속으로 뛰지 못했다. 

수년 간 쓰지 않은 

종아리 근육과 뒷허벅지 근육이 끊어질 듯 통증이 밀려온다.

게다가 어찌보면 당연한건데 

줄넘기는 뒷꿈치를 들고 뛰는 운동아닌가?

왜 이렇게 발바닥 아치가 땡기는지......아니 끊어질 것 같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

1분도 안되어 고통가운데 줄넘기 줄에 걸리기 시작했고

그 때부터는 3분 채우기도 전에 5,6회는 걸려서,

또 3,4번은 너무 아파서 더 뛸 힘도 없어서 그렇게 멈추기를 반복했다.


창피했다. 


아무리 운동 첫날이라고 해도 


전국민 운동일 수도 있는 줄넘기가 안된다는 것.


그렇다.


이제야 주제로 돌아온다.


내 정신과 육체는 완전히 분리되어 있었다.


나의 정신은 


가장 빛나는 청소년기의 내 신체능력을 기억할 뿐이었다. 


정작 현실의 신체는 그냥 거적대기같았다. 전혀 정신과 달리 따로 놀고 있는 거추장스런 그 무엇처럼.


정말 9분 동안 나의 정신은 이미 먼저 쓰러진 육체를 따라 넝마가 되어있었고, 


관장님이 물마시고  오라고 해서 


물을 최대한 천천히 마시면서 '다음부터 나오지 말아야 겠다. 도망가자'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고통을 나는 견뎌낼 준비가 안된 듯 했다. 


여하튼 다시 거울 앞에 서서 

관장님이 권투의 기본 자세를 가르쳐주는데 

결국 또 뒷꿈치 들고 뛰기를 시켰다.

생각해보니 

권투는 링위에서 내내 스텝을 밟고 뛰는 운동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휴.....

줄넘기를 하는 이유가 이거구만.

이미 줄넘기를 하며 

완전히 망가진 내 다리 근육은 말을 듣지 않았다. 

5분 정도 했으려나???


관장님이 쓸잘데기 없는 내 육체 상태를 바로 파악하고서는 


'오늘은 여기까지!'


정말 센스있는 분이다.


50분 운동에 30분도 안지났는데, 회원의 몸상태를 보고 정신상태까지 읽어낸 것이다. 


' 이 회원은 오늘 50분 시간 내내 운동시키면 다시는 안 올 타입이다.'


정확했다. 

관장님의 통찰력 덕에 나는 체육관 첫 운동을 

보람차게? 끝내고 나올 수 있었다. 

진짜 50분 내내 했다면 나는 도망갔을지도.

무엇보다 내 딸들이 갑자기 존경스러워 졌다. 비록 꾸준히 오래하지는 않았다고 했도 

첫째딸은 반년 가까이 해왔기에 이 강도의 운동을 견뎌왔다는 방증아니던가. 존경합니다. 선배!!

게다가 둘째딸이 체육관 간다고 거짓말을 해왔던 이유도 이해가 가기 시작한다. '그래 나도 도망가고 싶다. 둘째딸~ 니 기분 알겠다' 


여튼 엉망인 내 몸상태를 아내에게 보고하면서 이런 저런 얘기를 했다.

(심지어 아내도 내가 체육관에 있는 동안 한강에서 조깅을 해봐야겠다고 했는데 아내 역시 5분 이상 뛰다가 포기했다고 한다. ㅎㅎㅎ 천생연분이다.)


그러면서 몇가지 든 생각은.


평소에 나는 학생들 입시를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학생들에게 죽을 각오의 노력을 요구한다. 

어떠한 희생도 없이, 뼈를 깎는 노력없이 

입시에 성공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결국 엉덩이 싸움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래서 입시를 준비하는 기간동안 끊임없는 자기 노력, 자신과의 싸움에서 어떻게 이겨야 하는지

나는 그렇게나 일장 연설을 해댄다. 


그런데,

정작 나는, 적어도 내 신체에 대한 어떤 노력도 할 각오가 되어있지 않다는 점에서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항상 말이 쉽지, 행동은 어렵다. 

살아가면서 끈기를 키우는 것만큼 중요한게 또 있을까.

체육관에서 줄넘기 1분 만에 체력의 한계와 동시에 나는 내 인내의 한계까지 모두 경험했다. 

아, 이게 '지금의 나'인 셈이다. 

이런 육체의 고통을 더 느끼고 싶지도 않고, 어떻게 점잖게 체육관에서 도망갈지를 난 그 짧은 찰나에도 잔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정말 나는 내 자신과 싸워 이기고 있을까?

학생들에게 늘 하는 말이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는 것인데,

나는 내 자신과 싸워서 늘상 지는 것에 익숙해져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가르친 남학생 중에 한명은 

집이 대구인데도 내 수업을 듣기위해 기차를 타고 서울 마포구 합정동까지 와서 수업을 매주, 그것도 수개월을 빠지지 않고 들었다. 돈도 돈이지만 그 시간과 노력.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 친구는 편입에 성공하고 나서 

바로 자전거를 취미삼아 달리다가 결국 전국을 종횡무진하고 있었고,

심지어 권투도장도 상당히 열심히 다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때는 그냥 열심히 해서 기특하다는 정도였는데,

줄넘기 9분 하고 인생의 한계를 바로 깨달은 나에게 이 친구의 노력들이 어느 정도였을지가 순간 깨달아졌다. 물론 내가 그 정도로 몸을 운동시켜 본적이 최소 20년 간은 없었기에 그 노력이 어느정도인지도 정확히는 파악할 수도 없지만, 그 대단함이 무엇인지는 깨달았다는 것이다. 

그밖에도 정말 얼마나 많은 제자들이 나보다 더 치열한 싸움을 삶에서 하고 있었는지를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또 하나,

문득

귀신,유령의 존재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최근에 내가 봤던 '파묘, 곡성, 랑종' 모두 인간과 가까이 있으면서도 그래도 초월적인 무언가의 존재처럼 귀신이 나타나거나, 간접적으로 드러나는데,

이번에 내가 깨달은 것은

인간은 자기 몸을 쓰지 않으면 이미 '귀신화, 유령화' 되는 것이 아닌가하는 깨달음이었다. 

즉 지금 40대가 넘어서 내가 내 몸을 전혀 컨트롤하지 못한다는 점. 

그냥 두발, 두손을 다 쓴다고 내 몸을 내가 지배한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당장 나는 앞으로 허리를 숙여 손으로 땅을 짚는 것도,

혹은 기본적인 스트레칭조차도 안되는 자세가 너무나 많다. 

한마디로 내 몸이 내 것이 아니라는 점. 

만약 내가 이 상태로 나이를 먹는다고 상상해보았다. 

아마도 노인이 되면 좀 더 빨리 육체에 대한 통제력이 떨어질 것이다.

그래서 많은 노인분들이 자기 몸의 일부기능을 잃게 되어 

잘 걷지 못해 지팡이에 의존한다거나 

호흡이 부족해진다거나 

그래서 휠체어에 의존하게 되는 경우도 생길 수 있다. 

그러다가 거의 몸 기능의 80,90프로를 못쓰고 

누워만 있게 될 수도 있다. 

어찌보면 다들 알고 있는 노년의 슬픈 모습들 일 수 있는데,

그 모습이 오늘 내게는 새롭게 다가온다. 

아, 정신과 육체가 계속 분리되어 가는 과정. 

결국 그렇게가다가 완전히 신체에 대한 지배력이 끝나는 그 날이 바로 '죽음' 이겠구나. 

그렇게 죽으면 육체를 잃게 된 정신이 '영혼'이 되어 구천을 떠돌지 어떻게 아는가. 


귀신이 별것인가.

정신이 육체에서 떨어져가는 과정의 끝에서 발견되는 무엇이 아닌가. 


그렇다면 나는 그동안 최선을 다해서 귀신이 되고자 노력한 인간이 아니고, 또 무엇인가.

지금 이대로 살다가는 

난 누구보다 빨리 신체에 대한 통제력을 잃을 것이고,

더 빨리 귀신이 되겠지.


나는 지금은 인간이지만,  

진정한 인간이고자 한다면 

지금은 반쯤 잃어버린 내 신체에 대한 통제력부터 찾아야 한다.

그래야 나는 '인간답게 살았다'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많은 학생들을 가르치면서도 

관념론자처럼 정신만 살아서 떠들지 말고,

내 신체를 당당하게 지배하면서(지배라는 말보다 협상이 더 어울릴 지도 모른다) 떠들고 싶다는 강한 의욕이 생겨난다. 


어쩌면 이미 난 절반의 귀신이 된 것 같다. 

이미 인간의 절반을 잃어버린 상태같다. 

하지만 아직 기회는 있다고 믿는다. 


그렇게 다짐하며

나는 아내와 함께 매일 줄넘기부터 도전하기로 했다.

권투도장은 일단 일주일에 두번씩이니 

그 사이사이 

아내와 함께 줄넘기를 하며 

수십년 간, 강경하게 토라진 내 신체에 대화를 시도해봐야겠다. 


지금까지 처럼 살다가 

내가(라고 쓰고 육체를 너무 빨리 잃은 내 영혼) 

'파묘, 곡성, 랑종'의 주인공이 되고 싶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작가의 이전글 3.1절 축사에 윤석열은 '자위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