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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나페홀로 Apr 15. 2024

이데올로기론 4편- 알튀세르

최진석/불가능성의 인문학/문학동네

최진석의 [불가능성의 인문학]중 4장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유물론에서 참고한 정리입니다. 




5장 알튀세르-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


 루이알튀세르(1918-1990)는 부정적 의미의 이데올로기와 긍정적 의미의 이데올로기의 구분을 섬세하게 다듬어 이데올로기와 과학의 구별 속에 각각 안착시켰다. 

 

*무의식과 이데올로기

 이데올로기는 추상적, 부적절한 지식인 반면 과학은 구체적이며 사태에 적합한 지식으로 규정된다.

진정한 과학적지식은 원인으로부터 결과로 나아갈 때 생겨나며, 알튀세르는 이것만이 과학이라고 규정한다. 거꾸로 결과로부터 비롯된 잘못된 지식에 대한 믿음이 바로 '이데올로기'인 셈이다. 

 기존의 엥겔스 등의 사상가들은 부정적인 이데올로기는 폐기의 대상으로 여겼다. 현실에 대한 진정한 지식을 막고 왜곡시키는 허위의식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데올로기에 기만당하지 않고, '바깥'에 있는 진정한 지식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설령 우리의 감각이 그릇된 판단을 유도한다고 해도, 그 감각적 지각 자체가 없다면 대상의 실존 자체를 인식할 수가 없다. 

 예를들어  우리가 태양의 위치를 관찰을 통해서 다른 이에게 설명한다면, 태양은 지구와 대략 200걸음 정도 떨어져 있다는 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 물론 이는 과학적으로 오류지만,감각적으로 그렇게 느껴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과학적 인과론이 될 수는 없다고 해도, 이러한 불완전한 감각조차 없다면 진정한 지식을 알아볼 수조차 없게 된다. 따라서 불완전한 감각으로 인한 지식도 과학의 구성에 도움이 되는 셈이다. 

 과학적 지식은 감각을 완전히 폐기하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적 인식의 오류를 성찰하고, 보다 실제적 지식으로 인도할 때 성립하는 것일 수 있다. 따라서 진정한 앎은 이데올로기의 '바깥'에 있는게 아니라, 이데올로기 '안'에서부터 구성되어야 한다. 

 이데올로기는 신중히 연구하고 통찰할 1차적 자료가 된다. 현실을 사는 우리가 우선적으로 만나는 지식은 과학 자체가 아니라, 오류의 가능성이 충분한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데올로기는 우리가 삶을 살아가고 세계를 체험하며 진리를 찾게 하는 근본적 출발점이 된다. 이데올로기는 주어진 상황에서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조건의 산물이기에 이를 허위라고 단정하고 폐기해서는 안되는 실재의 엄연한 일부가 된다. 

 한편 알튀세르는 프로이트의 무의식 개념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 우리가 무엇을 아는가보다, 우리가 알고자 하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중요해졌다. 즉 무의식적 욕망의 문제를 중요시했다. 이데올로기는 무의식과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고 보았다. 

 20세기 중반에서 서구사회에서 부르주아와 프롤테라리아의 양극화가 일어나지 않고, 폭넓은 중간층이 형성되었다는 점에서 마르크스의 혁명이론은 위기에 봉착한다. 이러한 중간층의 발생과 확장은 바로 그들의 실제 삶의 조건은 프롤레타리아와 상당히 유사하면서도 정작 의식상으로는 부르주아와 유사하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폭력에 의지하지 않으면서도 스스로 경찰,군대, 법제도 등의 억압적 국가장치에 순종하는 것이다. 사회규범과 국가명령에 잘따라서 '바른 생활'을 하는 '성숙한 사회인'이 되는 것을 목적화하는 계층이다. 사회는 이러한 '모범시민'을 길러내어 자기를 재생산 한다. 부르주아가 지배하는 사회는 이 같은 방식으로 영원히 지속된다.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와 상상의 공동체

지배 이데올로기는 총칼과 같은 폭력과 무력으로 우리를 위협하지 않는다. 오히려 부드럽게 달래고 논리적으로 설득하며 심정적으로 동조하도록 이끌어내는 힘이 있다. 무엇보다 의식적인 동의를 넘어서는 무의식적 동의가 중요하다. 

 '억압적 국가장치'로 불리는 정부, 군대,경찰, 감옥 등은 가시적인 실체다. 반면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는 지배권력과 명확한 연결점을 갖고 나타나지 않는다. 시민의 일상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규칙을 잘 수행한다면 국가권력은 드러나지 않는다. 권력과의 이러한 비가시적인 관계가 본질적이며, 실제 국가의 기능은 보이지 않는 다양한 조절장치들을 통해 구현된다. 결국 국가는 순전한 폭력장치와 은밀한 이데올로기적 장치의 미묘하면서도 암묵적인 결합이 있다. 특히 이데올로기는 결합의 안정성과 기능성을 보장하는 핵심이다.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란 무엇인가? 예를들어 학교다. '건강한 사회인'이 되기 위해서 학교를 '의무적'으로 다니기. 만약  학교를 못마치면 사회화를 위한 충분조건에 미달한 것으로 취급된다. 가족도 마찬가지다. 가족구조는 국가구조와 긴밀하다. 가족교육을 빌미삼아 형성되는 가족의 관습은 실상 '올바른 사회인'에 대해 유비적 관계에 있다. 

 노동 역시 마찬가지다. 노동은 사회와 국가를 재생산하는 근본요소다. 그리고 강제적으로 부과되는 의무가 아니다. 그러나 사회의 각 방면에서 우리는 노동을 자발적으로 욕망하고 있다고 믿도록 유도되고 있는 것이다. 노동의 '신성한 의무' '국민의 권리'를 향유하고자 하는 목적하에 노동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게 구성된다. 그러나 이는 궁극적으로 사회와 국가의 재생산에 기여하도록 계열화되며, 그와 같은 믿음을 창출하고 지속시키는 것이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의 역할인 셈이다. 여기엔 폭력과 강제, 억압이 없다. 사회의 주체가 자발적으로 (혹은 무의식)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진실로 믿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데올로기는 허위의식이 아니다. 알튀세르에 의하면 이데올로기는 세계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반영한다. 개인은 자신을 둘러싼 사적이고, 일상적인 영역들과 맺는 관계, 즉 이데올로기적 장치들과의 관계를 통해 보이지 않는 더 큰 영역인 사회와 국가를 상상하며 받아들인다. 노동에 대한 우리의 실천은 경제뿐만 아니라 문화와 사회 일반에서 작동하는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의 효과라고 볼 수 있다. 


*호명의 권력과 주체화전략

이데올로기는 일상적이고 사적인 영역들을 관통하는 실천적 힘이다.이는 미셀 푸코의 이론과도 맞닿아 있다. 권력은 주체를 억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산한다. 즉 권력이 개인을 주체로 만들어주는 중요한 원천이라고 푸코는 주장한다. 

 예를들어 '정체성'에 있어서 '누구의 딸, 어느 나라 국민' 등 공식적인 소속의 표지들을 자기 정체성으로 제출하기가 수훨하다. 우리는 자신의 정체성을 공식적인 지표에 맞춰서 일단 받아들이고, 거기에 부가되는 질적 특성들을 자기화시키는 것이다. 이를 정신분석에서는 '동일시'라고 부르는데, 당위와 복종의 메커니즘을 불러일으킨다. 자식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자손은 선조의 명예를 지키며, 학생은 공부를 열심히 해야한다 등등. 

이때 정체성의 공적 표지란 권력이 개인에게 부여하는 것이며, 개인은 그것과의 동일시를 통해 자신을 주체로 인식한다.그렇다면 권력없이 개인이 주체가 될수는 있는가? 이 부분에 대해 푸코는 말년에 '성의 역사'를 통해 새로운 윤리학을 제시한다. 

 푸코의 딜레마는 알튀세르의 호명이론에서 다시 구조화된다. 기존 마르크스 이론에서는 노동자 주체는 권력의 지배를 받기 이전이 이미 존재하는 단단한 실체였다. 그래서 주체의 각성, 루카치 식의 계급의식이 점화된다면 권력과 단호히 선을 긋고, 저항의 역군으로 성장할 수 있다. 그러나 푸코는 진실은 정반대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즉 노동자는 결코 스스로 노동자로서 주체화되지 않는다. 누군가 그를 주체라고 불러줘야 비로소 주체가 되는데 정작 그 호명하는 주체는 부르주아의 지배기구인 국가다. 국가는 '호명하는 권력'으로 노동자를 불러세우는 것이다. 그 부름 앞에 노동자는 먼저 개인이 되고, 국가 안의 주체로서 자신을 인식하게 된다. 즉 호명이란 주체가 주체가 되기 위해 필요한 외부로부터의 자극이다.  국가는 우리를 호명함으로써 우리가 '주체'로 자신을 드러내도록 강제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이 억압적이거나 폭력이지 않다. 그저 우리는 '자발적이고 자유롭게' 수행한다고 믿게 된다. 즉 무의식적 동의로 실천화된다. 

 누구나 주체가 되길 원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면서 강력한 준거집단에 소속되길 욕망한다. 국가와 권력이 그것을 제공해준다는 데 마다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 국가권력은 우리가 우리로 존립할 수 있는 유일한 토대이기도 하다.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에 의해 우리는 주체화되고, 결과적으로 국가의 재생산과 영속화에 기여, 복무하게 된다. 

 결국 호명을 통해 구체적인 주체로 자신을 인식하게 되는데, 이러한 개인화는 이데올로기가 노정하는 치명적인 덫이다. 전체로서의 민중을 개인들로 조각내어 협력하지 못하도록 불구화로 만드는 것이 바로 국가의 숨은 전략이다. 그런데 이러한 호명을 꼭 국가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상호평등한 개인들의 집합체에서도 호명은 얼마든지 가능함을 깨달아야 한다. 또 어딘가에 소속되어야만 정체성을 구성하는 것도 아니다. 이런점에서 권력은 반드시 국가만의 권력이 되는 것이 아니다. 민중이 집단적으로 향유하는 힘도 권력이 될 수 있다. 알튀세르 역시 마르크스주의를 통해 새로운 권력집합체의 가능성을 전망했다.  부르주아지 국가 이후에 도래하는 공산주의적 공동체, 그것이 바로 새로운 권력 집합체다. 이는 호명의 권력에 대립하는 새로운 주체화 전략이며, 이것이 #알튀세르가 얘기한 '계급투쟁의 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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