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석/불가능성의 인문학/문학동네
1991년 소련의 붕괴로 이데올로기의 시대는 끝이 났다는 주장들이 많았다. 30여 년이 지난 지금 정말로 우리는 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가?
전혀 그렇지 않음을 한국사회의 면면을 봐도 알 수 있다. 남북한 갈등과는 별개로 진보와 보수의 대결은 여전히 심각하다. 게다가 문화적 차원, 성적 취향의 문제, 여성 및 학생의 권리,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갈등 등 여전히 '이데올로기적 갈등'이 잠재되어 있는 문제가 한둘이 아니다.
알튀세르의 논의를 통해 우리의 일상을 구성하는 미시적 차원, 개인의 사적 삶에 삼투퇸 무의식적 믿음의 구조를 살펴볼 수 있다. 그는 이데올로기를 현실에 대한 주체의 상상적 관계라고 규정했다. 개인들이 사회를 상상해서 구성해 보는 태도나 방식과 관련된다. 사적인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사고나 행동이 궁극적으로 사회, 국가적 차원에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 무의식적 믿음이 바로 이데올로기다. 광화문 태극기 할아버지들도 그들의 삶을 '일평생을 나라의 발전을 위해 헌신했다'라고 자부하는데 이는 그들의 마음속 신념 자체라고 볼 수 있다. 실제 사실이 무엇이건 간에 자신이 믿고 있는 과거, 스스로의 정체성과 결부된 생의 이미지와 지금-여기의 실존적 자기를 동일시하는 것이다. 국가에 대한 소속감과 그 같은 가상적 믿음이 결합하면서 현재의 극단적 행동을 촉발하며, 나아가 입증할 수 없는 진실싸움으로 뛰어들게 한다. 문제는 증명할 수 없기에 그들은 결코 패배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좌파 안에서도 벌어진다.
결국 자신의 정체성과 그에 연결된 거대 집합체로서의 국가는 일관된 무의식적 신념 속에서 결속하며, 그렇게 구성된 이데올로기로 개인은 현재의 자신을 확증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데올로기는 현실에 대한 주체의 상상적 동일시이자, 그 관계에 붙여진 이름과 상징적으로 동일시한 결과다. 개인의 무의식적 믿음이 자신과 집단의 가상적 동일성을 구축하고, 또 정체성을 부여하는 기제인 셈이다.
이러한 무의식적 믿음이 우리의 일상을 '문제없이' 영위하도록 이끄는 동력이며, 자신의 개인적 일상의 범위를 넓혀가 사회, 민족, 국가 사이의 가상적 일체감을 만들어준다. 우리의 삶은 언제나 무의식적인 이데올로기로 가득 채워져 있고, 우리는 이데올로기 없이 살아온 적이 없고, 살 수 조차 없다.
그래서 알튀세르는 '무의식처럼 이데올로기는 영원하다'라고 말한다. (알튀세르 2007:383)
문제는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이 현실을 직시하고, 현실을 어떻게 바꿔나갈지를 고민해야 한다. 국가권력의 호명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욕망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무리 '좋은 학생'이라는 빌미로 학교가 학생들을 호명한다고 해도 모두 '모범생'이 되는 것은 아니다. 라깡은 편지는 언제나 목적지에 도착한다고 했으나, 데리다는 편지의 방황과 유실을 지적했던 것처럼 욕망의 탈주적 잠재성을 고려해야 한다.
호명은 늘 우리를 유혹하고 그들 뜻대로 주체화하려고 하지만, 그 호명이 늘 성공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항상 다른 방향 다른 장소로 흘러들며, 또 다른 주체임이 드러나게 된다. 우리에게는 항상 규칙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욕망이 잠재해 있다. 따라서 완전히 국가적으로 주체화되지 않는 것이다. 욕망하는 주체로서의 우리 자신이 바로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를 탈출하는 원동력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런 욕망의 힘을 더욱 급진화하는데, 이데올로기가 머릿속 공상이 아닌 현실을 움직이는 물질적인 힘이라 할 때 욕망은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추동력이 된다. 우리의 욕망은 다양한 방식으로 계열화되고, 여러 형태로 현실화될 수 있다. 결국 어떻게 자기 욕망을 삶 속에서 조직화하느냐에 따라서 다양한 성적 취향, 정체성, 타인과의 관계는 변화될 수 있다. 욕망의 조직화는 사회적인 것이고, 나 혼자만의 문제를 떠나 타인들의 욕망과 함께 어울리며 중층화된다. 단순히 타 욕망과의 타협과 조화를 찾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갈등과 충돌을 감내하면서 다른 욕망르 발견하고, 또 다른 욕망을 구성해 가는 것이다. 낯선 욕망의 발원을 거부하지 않고 긍정해야 하며, 욕망의 무한한 변주와 변형의 가능성을 인정해야 한다. '감히 욕망하라'라는 욕망의 정치학에 내걸린 주요 선언처럼 이데올로기를 긍정하는 동시에 넘어서는 방식임을 인정해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는 욕망의 다양성을 거부하고, 제거시키는 메커니즘을 통해 작동한다. 모범생, 좋은 사회인, 정상화를 획일적으로 구성하려고 하는데, 이는 곧 욕망의 '거세'인 셈이다. 불효는 사회적으로 지탄받고, 낙오는 소외되며, 비정상은 비난과 폐기의 대상이 되는 사회. 그러나 이 모든 사고와 행위가 '정상적'으로 보인다 해도 이러한 정상성은 욕망의 흐름을 구부러뜨린 채 국가와 자본의 구조 속으로 귀속시키는 폭력일 뿐이다. 교육과 언론에 길들여진 대중은 그러한 폭력을 '큰 것'을 지키기 위한 필요악으로 용인해 버린다. 이것이야말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기 학대와 자기 파멸의 승인으로 귀결되는 무의식적 이데올로기인 것이다.
현실은 끊임없이 유동해 간다. 변화하는 현실에 대해 좋음과 나쁨, 옳음과 그름의 프레임을 씌우는 것이야말로 이데올로기의 속박이다. 지금-여기의 현실만이 우리의 대상이다. 끊임없이 유동하는 '이 현실'을 다른 것을 향한 변이의 과정으로 받아들이고, 그 과정에 끼어드는 것이 진정한 현실성이다. 그리고 그런 과정은 어쩌면 능동적, 의식적 참여라기보다는 피동적이며 무의식적 휘말림에 가까울 것이다. 특정한 혁명가나 지도자의 선택에 의해서라기보다는 대중없이 휩쓸리는 대중의 우발적이고, 운명적인 무작위의 흐름이다. 니체의 아모르파티는 바로 이런 흐름, 그런 결정 불가능성 가운데 이루어지는 결정의 노력, 그 결과를 또 다른 출발로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인간은 욕망이 욕망하는 대로, 의지가 의지하는 대로 그에 이끌려 어떤 구성의 상태를 이어왔을 뿐이지, 확고부동한 주체는 한낱 이상에 불과하다. 언제나 이행 중인, 특정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움직여가는 주체화의 흐름만이 있을 뿐이다. 지금은 계급무의식의 탈근대로 이행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데올로기의 시대는 끝나지 않았다. 항상 그랬듯이 이제 예전과 다른 방식으로 지속되고 있을 뿐이다. 이데올로기는 무의식적 욕망의 흐름에 따라 분기하고, 합류하며 계속해서 유동한다. 이데올로기는 끊임없이 변해갈 것이나 그래서 영원하다. 언제나 다른 모습으로,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면서 우리와 더불어 현실을 구성하는 힘으로써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