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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재덕후 공PD Nov 30. 2021

아무로 나미에와 오키나와 –5부-

일본 왕실 막장 스토리 -첫 번째 이야기-

 

공주 그리고 결혼식     


공주의 결혼식. 

뭔가 럭셔리하면서도 낭만을 마구마구 불러일으키는 조합이죠. 

주인공은 될 수 없어도, 그 화려한 예식에 초대 정도는 되고 싶은 마음이랄까요. 

멋지잖아요.    

  

“나... 공주님 결혼식에 초청된 사람이야!”     


일본 왕실의 아이돌로 불리는 마코 공주가 결혼했습니다. 

수사적 표현이 아닌, 진짜 공주의 결혼식.      


몇 년 동안 다수의 일본인이 이 결혼을 반대했습니다. 

아무리 일본 왕실이라도,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민의 반대 여론을 살피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죠. 몇 년간 눈치를 보던 마코 공주와 왕실은 결국 공주의 사랑에 굴복했습니다.      


마코 공주는 결혼했고, 평민과 결혼한 공주는 일본 왕실법에 의해 황족의 지위를 상실했습니다.

공주는 결혼했고 평민이 되어 일본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아쉬워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마코 공주는 왕실의 아이돌로 불리던 마코 공주였는데... 

왜 그랬던 걸까요?           



일본 왕실, 알고 보면 반전평화 메시지 생산자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본은 입헌 군주제를 표방하고 있습니다. 

영국이나 스페인, 덴마크 같은 유럽식 입헌군주제는 아닙니다. 

일본 평화헌법상 일왕은 공식적으로 유럽의 입헌군주제처럼 국가원수의 지위가 아닙니다.     


태평양전쟁 패망 후, 맥아더의 군정은 일본의 천황제를 뿌리 뽑으려 했습니다. 

일본 군부가 일왕의 상징성을 이용해, 문민정부의 전쟁 반대 세력을 축출하고, 군부를 황군이라는 이름으로 똘똘 뭉쳐 전쟁을 일으켰다는 것. 

이 전통이 19세기 말 청일전쟁 이후 꽤나 오래 지속된 일본 군국주의의 강력한 이니셔티브임을 잘 알았던 겁니다. 

맥아더는 천황체를 없애지는 못했지만, 일왕을 국가원수의 지위에서 내려오게 만드는 데는 성공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절반의 성공이라기보다 절반 이상의 실패였죠.

일본 평화헌법 제1장 제1조는 일왕의 지위를 이렇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天皇日本國象徵であり日本國民統合象徵であつてこの地位主權する日本國民總意

(천황은 일본국의 상징이고 일본 국민의 통합의 상징이며, 이 지위는 주권이 있는 일본 국민의 총의에 기초한다)     


한마디로 일왕은 국가원수는 아니며 주권은 일본 국민에게 있지만, 일본 국민의 뜻에 따라 일왕에게 일본이라는 나라와 일본인을 통합하는 상징성을 부여한다는 뜻입니다.      


풀이가 더 헷갈리죠. 

이름은 왕인데,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처럼 영국과 영연방의 상징적 국가원수는 아니다.. 그렇지만, 주권자인 일본인의 뜻에 따라 일본과 일본인의 상징으로 규정한다...     


마치 오래전에 산화한 구국의 영웅을 기리는 영웅서사시나 신회의 첫 구절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일본에게 침략당해 고통을 겪은 한국인을 포함한 아시아와 유럽인들에겐 마뜩잖은 규정이죠. 일본이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로 거듭나기 위해선 천황제 폐지가 매우 큰 계기가 될 겁니다.      


또 이상한 일이 있죠. 

구 일본 제국군의 구실이었던 일왕은, 태평양전쟁 패망 후에는 그 누구보다 강력한 반전, 평화 메시지의 생산자가 되기도 했으니까요. 아마도, 압도적 미국의 힘에 압도적 패배를 경험한 당대 일왕이었던 쇼와 일왕은 이렇게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일본이 다시 한번 천황을 중심으로 군국주의 국가가 되어 전쟁을 일으킨다면, 그때는 일본이라는 나라는 물론 일본 왕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지 모른다’     


쇼와를 거쳐 헤이세이 그리고 현재 레이와 시대까지 선왕과 현 일왕은 여러 시대, 여러 이벤트마다 평화와 반전 메시지를 적극 주창하는데 목소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일본 왕실, 알고 보면 유서 깊은 막장 스토리       


마코 공주의 결혼을 비롯한 일본 천황가의 막장 스토리를 몇 개 소개하려 합니다.      


오해하지 않았으면 하는 걸 먼저 말해볼게요. 

일왕가의 막장 스토리는 생각보다 유서 깊고 광대한 건 틀림없습니다. 마치 아침 막장 드라마가 일왕가에서 영감을 받은 건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죠. (물론, K-막장이 더 대단하기는 해요. 막장 드라마는 단연코 K-막장)      

일왕가의 막장 스토리가, 적어도 현 일왕과 선왕이 막장이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선왕과 현황의 속마음이야 어떻든, 맥아더가 만들어 준 평화헌법 체제 아래 일왕은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반전-평화주의자로 살 수밖에 없으니까요.      


막장 스토리의 발신지는, 일왕을 제외한 왕실과 궁내청입니다. 

일왕가와 궁내청에는 막장과 우익 인사들로 가득하죠. 

그래서 생전 퇴위한 상황 아키히토 일왕과 현 나루히토 일왕이 소중하게 보일 정도예요.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일본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천황제와 일본 왕실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는 것. 이건 분명합니다.      


참 피곤한 일입니다. 이젠 일본 왕실까지 관심을 기울여야 해요. 

이게 한국의 숙명이죠. 

어엿한 중견 선진국으로 발돋움했으니, 이웃에 대한 깊은 이해력은 날이 갈수록 더 필요할 겁니다.



헤이세이 시대      


현재 일본 연호는 레이와 입니다. 

2019년까진 우리도 친숙한 연호인 헤이세이(平成)였죠.      


헤이세이 시대의 일왕은, 지금은 선왕이 된 아키히토(明仁)입니다. 

20세기 말 한신 대지진 참사와 21세기의 구마모토 지진 때 피난민 구호소를 찾아 무릎을 꿇고 국민의 목소리를 들었던 사진으로 기억되는 인물입니다.     

 

과거 황족은 화족이라 불리는 대귀족 가문 출신과 결혼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어요. 

아키히토 일왕은 이 관례도 깼습니다. 황태자 최초로 평민 출신과 결혼했죠.


물론 아키히토 일왕의 어머니, 즉 히로히토의 왕비 역시 평민이긴 했습니다만... 당대 아시아 최대 제분회사인 닛신이라는 손꼽히는 재벌가에 대귀족이던 화족가 출신이었죠. 평민이긴 한데, 대대손손 금수저 집안이었던 셈입니다.      


아키히토 일왕은 진짜 평민 여성과 결혼했어요. 당시 황태자비였던 쇼다 마치코는 일본인의 사랑을 듬뿍 받았습니다. 특히, 1975년 오키나와에서 발생했던 히메유리 탑 테러 사건에서도 의연한 모습을 보여 일본인의 칭송을 받았죠.     


히메유리 탑 테러 사건은, 1975년 당시 황태자였던 아키히토와 마치코 황태자비가 전쟁 이후, 황실 인사 최초로 오키나와를 방문했을 때 벌어진 테러였습니다.     

 

황태자 부부는 태평양 전쟁 막바지, 오키나와 전투 때 희생된 민간인 여학생과 여교사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건립한 히메유리 추모비를 방문할 계획이었죠. 

70년대만 해도 오키나와 독립운동이 나름 활발하게 벌어질 때였습니다. 일본의 좌익 운동의 기세가 한풀 꺾이기는 했어도, 일본이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로 거듭나기 위해선 천황제의 폐지가 무엇보다 우선하다는 점은 좌익은 물론 민주주의자 들고 공감하는 일이었어요.      


좌익 중 극렬 세력은 왕실가에 대한 테러까지 결심하고 실행에 옮겼다는 차이는 있지만요. 

오키나와의 극좌 세력 중 일부는, 황태자 부부의 오키나와 방문이라는 상징적 이벤트에 테러를 결심합니다.      

오키나와 해방 동맹 준비위, 공산주의자 동맹 멤버 2명이 테러를 모의하고 실행에 옮겼죠. 

돌과 스패너를 준비해 황태자 일행에게 투척했습니다. 테러 치고 소박해 보일지 모르지만, 일본인이 받은 충격은 대단했죠. 일본인은 대체적으로 황실에 우호적입니다. 맥아더에 의해 신의 지위에서 인간으로 격하되긴 했지만, 평범한 일본인의 감각으로 일왕은 여전히 신성불가침의 무엇입니다.      


그런 존재에게 불경을 넘은 테러를 저질렀으니 당대 일본인의 충격은 대단했죠. 

황태자와 황태자비는 이때 돋보였습니다. 1차 테러 직후, 다음 일정을 미루고 도쿄 황실로 돌아가자는 수행팀의 의견에 의연한 태도를 보이며 다음 일정을 강행했습니다. 

특히 황태자비의 태도가 담대하고 의연했다는 현장 취재진의 전언이 있었죠. 

바로 이 황태자비와 결혼한 행운아가, 아키히토 선왕, 일본 연호로 헤이세이 시대였습니다.        


   

레이와 시대     

선왕인 아키히토 일왕은 쇼와 일왕의 사망 후에 제위를 물려받았습니다.      


정작 본인은 생전에 퇴위를 결심하고 실행에 옮겼죠. 

2019년 아들인 나루히토(德仁) 황태자를 제위에 올리고 퇴위합니다. 

헤이세이 시대가 막을 내리고 레이와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나루히토 일왕은 아버지 선왕만큼 일본인의 폭넓은 사랑을 받고 있진 못합니다. 당연히 재위 기간이 짧으니까요. 

아버지처럼 평민 출신 여성과 결혼했습니다. 평민이라곤 해도, 일본 외무성 차관까지 지낸 아버지였습니다. 국제사법재판소 재판관과 국제사법 재판소장까지 지낸 대단한 인물이죠.      


나루히토와 왕비 마사코의 만남도 드라마틱합니다. 

1986년 스페인 왕실의 공식 행사에 참석한 나루히토 왕자(황태자 책봉은 1991년)는 당시 외교관이었던 마사코를 우연히 만나게 됩니다. 국제감각과 탁월한 실무능력을 겸비한 마사코에게 완전히 빠졌죠. 나루히토 황태자는 마사코에게 무려 7년 동안 열렬한 구애를 펼쳤습니다.      


왕자와의 결혼은 어떤 사람들에겐 꿈을 이루는 일일지 모릅니다. 

그리고, 황실의 구태의연한 법도에 갇혀 평생을 살아야 한다는 얘기이기도 하죠. 

마사코처럼 능력이 출중한 사람이라면, 황태자비가 되고 황비가 되는 것에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죠.      

나루히토는 끈질겼습니다. 마침내 1993년 결혼합니다. 

일본 왕실은 크고 작은 왕실 행사마다 공식 기자회견을 합니다. 

황태자의 결혼식이라면 말할 것도 없죠. 1993년 결혼 기자회견에 작은 스캔들이 터집니다. 오해 마세요. 황태자나 황태자비의 수상쩍은 과거 행실 같은 이야기는 아닙니다.      


당시 기자회견에서 마사코 비는 황태자보다 발언을 약간 더 길게 했습니다. 

어이없게도 이건 스캔들이 됩니다. 

감히 비가 황태자보다 발언을 더 길게 한다는 건, 보수적인 일본 왕실에선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죠. 천황의 국가 원수화를 집요하게 노리는 극우세력들도 여기에 가세해, 황태자와 황태자비를 함께 욕하기 시작했죠.     

고루한 왕실과 극우에게 욕을 먹는다는 건, 민주주의 국가의 상식적 사고와 행동을 무리 없이 잘 소화해내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죠. 

황태자비가 궁내청과 왕실 어르신들 그리고 극우에게 욕을 먹는다면, 소심한 황태자라면 황태자비와 은근슬쩍 거리를 두는 척하겠죠. 나루히토는 달랐습니다.  

결혼 기자회견 시 나루히토 황태자가 남긴 명언이 있죠.      

 

 최선을 다해 마사코를 끝까지 지키겠습니다     


마사코 황태자비는 궁내청과 왕실 어른들에게 두고두고 까입니다. 그 이유가 걸작이죠.      


황태자비가 황태자보다 키가 더 크다.

필요 없는 것을 너무 많이 배웠다.     


그리고 등장하는 한일 양국의 사골 레퍼토리.      


제위를 이을 왕자를 출산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게 입헌군주제 국가에서는 제법 심각한 위험요소가 되기도 합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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