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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간혼삶 Jan 23. 2020

에세이 :: 사람 속의 사람, 우리

KEYWORD: 교양적 무관심, Civil Inattention


cenjun.com

사람들이 밀집해 사는 도시에선, ‘의도된 무관심’이 서로를 편하게 만든다. 어깨를 부딪히는 지하철 안에서도 우리는 주변 사람을 신경쓰지 않고 각자의 핸드폰만 열심히 본다. 누구나 어깨 너머로 내 주요 정보를 엿볼 수(shoulder sniffing) 있지만 그러지 않을 거라 생각하면서 나 역시 남의 화면을 애써 외면한다. 그런 행동이 서로에게 불편을 끼칠 것이란 걸 알기 때문이다(엘리베이터에 같이 탄 이웃이 1층에 도착할 때까지 당신을 호기심에 찬 눈으로 쳐다본다고 상상해보라!).


특히나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많은 것을 공유하는 공동 주거 환경에서는 이런 ‘선’을 지키는게 중요하다. 쉐어하우스의 공동 공간에서 바로 앞 집 사람과 마주치더라도 가벼운 인사만 나눈다. 어떤 직장을 다니는지, 나이는 몇 살이며 학교는 어딜 다니는지 대놓고 캐묻지 않는다. 돌직구로 질문을 던지는 대신, 뉘앙스로 적당히 파악하는 정도. 이러한 ‘교양 있게 의도적으로 적당히 무관심하기’는 이웃이 뭘 하든 관심 없는 정 없음과는 다르다. 우선은 적당한 거리감을 통해 서로를 존중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또 어느 정도는 거리감이 있어야 어떤 한 그룹이 고정되지 않고 여러 ‘팟’이 열릴 수 있기 때문이다. 가끔 입주민들과 모여 생활의 문제를 얘기할 때, 공유 주방에서 같이 음식을 만들어 나눠먹을 때, 혹은 심심한 주말 오후 가볍게 같이 영화 보고 올 영화팟을 구할 때 우리는 언제든지 새로운 서로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친밀해질 수 있다. 요새 트렌드라는 ‘느슨한 연대’라는 표현처럼, 적당한 거리감을 둔 채 느슨하면서도 끈끈하게 연결되어있는 커뮤니티. 이런 유연한 관계가 쉐어하우스라는 공동 주거 환경에서 더욱 필요한 것이 아닐까? 


선을 불쑥 넘지 않는 이런 ‘센스 있는 거리감’을 잘 유지하는 것은 아마도 이 현대 사회를 잘 사는 에티켓이고 꽤나 중요한 프로토콜일 것이다. 서로에게 교양 있게 적당한 무관심을 발휘할 것. 이 프로토콜은 불문율처럼 자연스레 확산될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이 현대인들에게 그렇게까지 힘든 과제가 되지는 않을 것 같다. 집단에서 개인으로, 또 개인에서 집단으로의 전환이 이전보다 쉬워지는 현대 사회에서, 친밀함의 표시가 부담 혹은 위협이 되는 건 종이 한 장 차이라는 것을 우리는 자연스럽게 알고 있으니까.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는 얼마든지 새로운 취향과 관심사로, 언제 어디서 뭉치게 될 지 모르는 사람들이니까.


지하철, 빨래방, 도서관, 심지어 화장실에서도 우리는
끊임없이, 그리고 말없이 낯선 타인과 교섭하고 있다.
시선을 조심하고, 정중한 미소를 지으며, 무의식적으로 옆으로 물러서면서.
_어빙 고프만 Erving goffman





TIDBITS: ‘인기척’과 ‘있는 척’에 대하여


여자 혼자 사는 집에서라면 거의 누구나 한 번쯤은 집에 더 많은 사람이 있는 척, 성인 남성이 있는 척을 해본 적 있을 것이다. 옆 건물과 창문이 마주보는 집에서는 빨랫대에 일부러 남자 속옷을 몇 개 걸어두고, 현관에는 남자 구두를 한 켤레 놓기도 하며, 그것도 안 되면 배달 음식을 받으며 아무도 없는 방에 대고 ‘아빠 짜장면 왔어!’를 굳이 외친다든지. 여성 1인 가구들은 이렇게 여자 혼자 사는 집이라는 것이 외부에 티 나지 않기 하기 위해 갖가지 방식으로 신경을 쓰며 생활이 드러나는 모습들을 다듬는다.


이런 모습들은, 사람들이-특히 혼자 살수록- 안팎의 인기척을 꽤 많이 신경쓰고, 또 꽤 열심히 관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당연한 말이지만, 내 공간 밖, 예상치 않은 장소와 시간에서 느껴지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인기척은 상당한 위협감과 공포감을 준다. 하지만 신원이 확인된, 예상 가능한, 내 공간 안에서 생기는 인기척은 엄청난 안정감과 안도감을 준다. 실제 사람이 살아서 발생하는 인기척이든 위장해낸 인기척이든, 그런 ‘있는 척'을 통해 사람이 있다는 뉘앙스를 풍기면 바깥으로부터의 위협에 조금은 더 잘 대처하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사람들은 집안에 사람이 많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하기 위해 열심히 ‘있는 척’을 한다.  


인스타그램 @manshenlo

이런 시도들에 맞추어 요즘엔 이런 ‘인기척 위장’을 더 그럴듯하게 도와주는 ‘가짜 인기척 장비’들이 점점 더 많이 기획되고 인기를 끌고 있다. 유튜브에서 ‘보이스 가드’라는 제목으로 올라오던 ‘누구세요?’, ‘자기야 배달 좀 받아줘’ 등의 남자 목소리들이 이제는 스마트 스피커에서 바로 재생될지도 모른다. 실제로 집이 비어있더라도 일정 시간이 되면 알아서 켜지는 스마트 전구 덕분에 집이 비었는지 아닌지를 속일 수도 있으며, 움직이는 사람 모양의 그림자를 만들어주는 가젯조차 출시되어있다. 혼자 사는 사람들에게 인기척이란 심적 안전감과 실질적 보안을 높여주는 꽤 중요한 장치가 되는 셈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사람이 있는 척을 도와주는 역할이 이제는 진짜 사람이 아닌 디지털 기술로 점점 더 넘어가고 있다는 것이 또 생각해볼 만한 지점이다. 있는 척 하기 위해 사람이 그때마다 애쓸 필요 없이, 디지털 기술이 알아서 상황을 탐지하고 자연스럽게 기척을 만들어내는 ‘기척 위장의 자동화’가 그리 멀지 않은 미래의 일일 수도 있다. 혼자잘살기 연구소의 관심과 교집합이 생기는 것도 이 부분이다. IT 기술을 통해 혼삶을 개선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있는 척’을 도와 심적 안정감과 실질적인 보안을 높일 수는 없을까? 어떤 매체와 기술을, 누구를 대상으로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깊은 고민과 연구가 필요한 시점이다.


‘인기척’이 주는 느낌이 더욱 관리되는 시대다. 직접 대화가 줄어들고, 모르는 사람과 합판 한 장을 사이에 두고 살면서 인기척의 중요성은 점점 커지는 것 같다. 꼭 자취방이 아니어도, 쉐어하우스와 같은 공동 공간에서 살갗을 스치며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인기척은 사회적 교류, 심적 안정감, 혹은 프라이버시 등 다양한 이슈와 엮여 거주자들의 삶에 꽤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될 지도 모른다. 같은 공간을 공유하는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인기척을 남기고 또 어떤 느낌을 주고 받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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