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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verdrink Jan 27. 2021

 그 아이(1)

우리가 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보다.


   참치캔을 하나를 비닐봉지 속에서 집어 들고 벽에다 세게 내리쳤다. 나도 모르게 돈이 궁해서 생긴 습관인지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벽에 부딪혀 터지면 저게 얼만데.. 아파트 벽과 카펫에 참치 기름이 묻으면 아파트에서 벌금 내라 하면 어쩌지?’  

그 짧은 시간에 그런 생각들이 모두 지나갈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내가 화난 만큼 더욱 힘껏 해대지 못하던,  무언가 뒤에서 잡아당기는 것 같은  서늘한  그 느낌을 지금도 지울 수가 없다.  구석에 놓여 있던 큰 맘먹고 산 20불짜리 아이키아 종이 등이 찢어진 것을 보고  이내 후회했지만,  소리에 놀라 자다가 뛰쳐나온 남편을 뒤에 두고 그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았는지, 아니면 정말 화가 나서였는지  들숨날숨을 반복하면서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뭐야! 왜 그래?”

남편의 자고 일어난 목소리 때문에 뒤를 돌아보기 싫었다. 눈물이 차오르고 손이 벌벌 떨렸다.  내가 이러는 사람이 아닌데,  이렇게 물건까지 던지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내가 미국에 와서 이렇게 괴물같이 변해가는 것이 놀랍고 두려웠다. 쳐다보는 아이들 눈에  성질을 다스리지 못하는 엄마로 보일까 봐  그것도 무서웠다. 하지만, 남편에게는 그 순간에도 상관이 없었다. 




짭조름한 통조림 참치와 신김치 그리고 두부를 듬뿍 넣은 김치찌개를  먹고 싶다던 남편이었다.  연애시절부터 알고 있었던 그 취향이 참 소박해서 먹는 거 가지고는 힘들게 하지 않겠다 싶었다. 김치찌개쯤이야 내가 매일 끓여주리라 다짐했었다. 소박한 음식취향을 비롯한 남편의 무난하고 성실한 성품은, 7년 동안 꾸준히 단단했던 우리 사이를 결혼으로 이끌어 준 많은 이유 중 하나였다. 그랬던 남편이 몇 달 전부터 평소와는 다르게  아이처럼  반찬 투정을 시작했다.  그 참치캔을 벽에다 던져버린 그날은 , 육아와 살림으로  지친 나와  박사과정 공부로 바빠서 잠 한숨 편하게 못 자는 남편과의  간극을 매울 길이 없어 힘들어하던 많은 날들 중 한날이었고,  드디어 내가 폭발을 한 날이었다. 

‘김치찌개 못 먹고 죽은 귀신이 붙었나. 왜 저렇게  못 먹어서 난리야. 뭘 해줘도 맛있다는 칭찬 하나 없이 화난 사람처럼 밥만 먹는 사람이’

그래도  장 보면서 참치캔을 두 개를 장바구니에 넣었다. 박사과정 중 학교에서 지원받는 월급으로 네 식구가 살기란  쉬운 일이 아니기에, 사고 싶은 것을 집었다가 내려놓다를 몇 번이고  반복하는 일 정도는 이미 익숙한 터였다.  친구들이 ‘돈 없는 유학생’은 피하지 그랬냐는 농 섞인 말을 할 때도, 은행 잔고가 바닥나서 카드가 안된다는 점원 말에 물건을 제자리에 놓고 나올 때도, 박사과정에 있는 부부는 겪을 수 있는 일이라 생각했다.  



    

   5월에는 어김없이 뜨거운 이곳의 태양 아래서, 이마에 송글송글  땀이 맺힌 채, 열손가락에 빼곡히  비닐 봉지를 한두개씩 끼워 날라 차에 실었다.  그저 일주일동안 우리 식구들 해 먹일 생각에 행복했다.  그러나, 문제는 아파트 앞에 도착해서 터졌다. 아파트 2층을 바라보니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던 나는 남편에게 전화를 넣았다. 대답이 없는 남편을 생각하니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다시 비닐봉지들을 손가락에  잔뜩 끼고선 한계단씩 올라가면서 짜증은  점점 커졌고, 문을 열어준 5살난 아들 너머로 테레비가 켜 있는채 엉망이 되어 있는 거실을 보니 돌아버릴 것 같았다. 난 부엌 바닥에 장본것을 내려놓고 더이상 참을수 없음을 느꼈다. 내가 매우 화가 났음을 알려할 큰 소리가 필요했고 그 순간 눈에 참치캔이 들어왔다. 재잘대던 아이들은 그동안 보지 못한 엄마의 모습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마치, 작은 박스에 많은 양의 종이뭉치들을 두손으로 꾹꾹 눌러 담고 한손으로 테이프를 떼어보려다가, 구겨진 종이더미들이 상자 밖으로 솟구쳐 나온것 같았다.  다시는 펴지지 않을 것 같이 구겨진 종이뭉치들은 내 모습이리라.

 남의 이야기인줄 알았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고삐 다잡고 살면 우리부부에겐 이런 위기가 오지 않을거라 생각했다. 이혼을 생각하는 지인들을 만나고 오는 길이면 ‘그래도 좀 참지. 안 힘든 사람 어디있나, 사는 거 다 똑같지.’ 라고 생각하곤 했다.  우울증이였다.  난 안 할줄 알았던 우울증을 내가 하고 있는 것이었다. 마음의 병 전문가들이  너무 많아서,  모르고 지날 증상도 잡아채서 병으로 정의하는 것이 맘에 들지 않았던 나였다.  정신적으로 신앙적으로 이기지 못할게 뭐가 있을까 늘 자신만만하던 나는 절망에 빠졌다. 더욱 심각한것은 나의 상태를 안다고 해도 이겨낼 방도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나에겐 가족들이 있었지. 안색이 좋지 않은 딸을 목소리와 마음으로 느끼는 친정엄마는  세번에 한번은 눈물 흘리면서, ‘어쩌다가 우리가 이렇게 못 보고 사는지, 너무너무 힘들다’ 그러신다.  거기에 대고 나의 힘듦을, 엄마가 다 지나온 그 치사하고 말 못할 심정을 당신의 딸이 고스란히 하고 있다는 푸념을 하고  싶지 않았다.  바쁜 아들에게 방해될까봐 며느리에게 안부 전화 넣으시는 시어머님은 늘 비슷하다.


“그래도 엄마가 강해야 한다. 서준아범은 밥은 잘 챙겨먹고 다니니.. 그래도 너희는 미국에 사니 얼마나 좋니.” 

 

아들의 끼니와 자존심 걱정이시다. 며느리가 힘든거 알면서도 위로와 감사의 한마디가 입밖으로 나오기가 그렇게나 힘들까?  속이 썩어들어가면서  ‘난 죽어도 아들과 며느리에게 이러지 말아야지’ 다짐을 몇번이나 삼켰는지 몰랐다.  

남편의 멀쩡한 얼굴을 볼수 없는 것과 안하던 짜증을 받아주는 것보다 더 견디기 힘든것은, 이런 날들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큰아이 유치원에서  ‘너는 싱글맘이니?’ 질문받는 순간이 당황스러웠고, 쥐꼬리 만한 돈으로 머리 굴려가며 빠듯이 살아도 빚을 지는 것이 절망적이었다.  이 와중에 밥투정을 하는 남편이  그야말로 정말이지 뭐랄까.. 징그러웠다. 차라리 이런 생활이 10년이다 정해져 있다면 살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정말 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그런 생활이 계속된다는 것이 날 무겁게 짓눌렀다. 멀쩡하게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고 롸이드를 하고 사람들과 잘 지내다가도 그 깊이를 알수 없는 구렁텅이로 쑥 빠지는 느낌을 자주 받기 시작했다.  ‘삶의 조건이 바뀌면  사랑이 변하기도 하는구나.. 결혼이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거였어. 내가 무슨 마음으로 결혼을 했지?’  하루는 그런생각이 파고들기도 했다.  며칠밤을 실험실에서 밤새우고, 집에 와서는 그저 하는게 침대에 누워 일어날줄 모르는 남편을  멍하게 바라본다. 원망스럽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고, 불쌍해서 눈물도 나는 그런, 나도 모르겠는 복잡한 마음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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