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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인 Dec 17. 2024

너 나를 죽일 생각이었지?

죽어도 할 말은 하고 죽겠다


나는 평화를 기원하기보다 목숨 걸고 싸우는 약자의 정의가 승리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김재명, <나는 평화를 기원하지 않는다>


*


인간은 왜 죽을까?

왜 죽어버림으로써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밝힐 수 없게 되는 걸까?

그래서 사람 같지 않은 것들이 죽음을 방법으로 사용하게 되어버린 걸까?


고작해야 이미터 남짓 되는 몸에 뭐가 그렇게 많은 것을 담아야 했던 걸까.


11월 초에 태백산맥을 완독하고 나는 내가 까딱 백 년만 일찍 태어났으면 책 속에서 그러하듯 산에서 얼어 죽고 굶어 죽고 총 맞아 죽는 빨치산이 됐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생각만으로도 등골이 서늘하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이렇게 뒤통수가 싸할 줄이야. 아빠의 고향에서 일어났던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을 조사할 때도,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군의 만행을 찾아볼 때도 이렇게 찝찝하지는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고작 진실을 따라가는 행보만으로 나의 신변에 위협이 올 수 없다는 확신이 있었으니까. 이승만의 만행 좀 파고 다녔다고 냅다 잡아가면 그게 공산국가가 아니고선 뭐란 말인가. 세상은 이념만으로 반 갈라 나누어질 수도 없거니와, 그 이념이라는 것이 어찌나 두루뭉술하고 실체가 없는지 나에게는 영 뜬소문 같았다. 그때만 해도 나는 정치색과 관련 없이 한 사람이라도 덜 죽기를 바라는 뜨내기 평화주의자였다. 내가 중고등학교 때부터 하등 관심 없었던 역사를 파헤치고 다닌 이유는 단 하나다. 죽음이라는 거대한 주제 앞에서, 억울한 이들을 억울한 채로 두지 않고 싶다는 이유였다. 죽은 사람과 유족들은 너무나 다양한 명분으로 한을 품고 있었다. 좌익, 빨갱이, 시체팔이, 보험금으로 오명을 쓴 죽음들이 이 나라에 너무 많았다. 내가 조금이라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던 것은 그 죽음들이었다. 내 나라에서 죽은 사람과 죽인 사람이 명백하게 존재하는 사건에 대한 진실이었을 뿐이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지. 박경리의 <토지>만 읽고 멈추었다면 나는 그 시대에 태어났어도 독립운동을 할 용기도 없는 무능한 소시민이었을 거라고 다독이며 끝났을 것이다.(아마 조혼을 당하거나 정신대에 끌려갔겠지만) 막연히 한국전쟁에서 벌어질 일을 알고 있으니 독립운동가들의 월북과 서희네 집안의 몰락, 이어질 자국민 학살을 짐작만 하며 안타까워했을 것이다. <태백산맥>을 읽지만 않았더라면.


나는 빨간 물이 든 사람이었다.

이미 시뻘겋다 할 정도로 좌파였다는 것을 태백산맥을 읽고서야 알았다. 빨갱이가 뭔지, 좌익 사상이 뭔지, 그들이 원했던 세상이 어떤 것이었는지.

좌익의 논리에 반박이 나오지 않았다. 일제에 부역한 매국종자를 말끔히 청산하고 나라의 근간이 되는 백성이 먹고살만한 제도를 정비하는 것이 도대체 왜 문제가 되지?

고리타분한 신분제를 타파하고 모두가 글을 익혀 교육을 받는 것이 어째서 사회 질서를 무너뜨리는 일이 되는 걸까?


지금도 어안이 벙벙한데 그 시절이었다면 위와 같은 세상을 만들어내기 위해 곡괭이라도 들고 싸움에 뛰어들었을 것이다.

뭐가 문제지? 단 하나도 어폐를 찾을 수가 없어.


그래서 도서관에서 빨치산 책을 찾아 읽었다. 나도 모르는 새 내 사상에 빈틈없이 고여있던 빨간 물의 정체를 알고 싶었다. 태백산맥 기행 중 벌교 보성여관에서 마주쳤던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읽고 <이현상 평전>을 읽었다. 태백산맥 소설 속에서는 물론 아버지의 해방일지에서도 등장하는, 이승만 정부가 기를 쓰고 잡으려고 했던 남부군 토벌대장이었다. 도술을 쓴다는 소문이 있던, 그를 숙청하지 않으면 빨치산과의 싸움은 끝나지 않을 거라고 국군과 미군을 벌벌 떨게 만든 백전명장의 위인.


사람은 왜 죽을까?

인간 같지 않은 것들은 잘만 꾸역꾸역 남겨두고서.


이현상 평전은 한국 근현대사를 소상히 요약한 역사서라고 봐도 무방하여 소장의 의미로 구매할 예정이다. 죽음이 앗아가 버린 많은 신념들이 그 책 속에 들어있다.


사람은 왜 죽을까?

묘비 하나, 유언 하나도 남기지 못한 채로.


내가 빨치산 투쟁이야기를 읽으며 가슴이 끓어올랐던 것은, 당시의 공산주의야 말로 사람이 없이는 돌아가지 않는 인간 중심적 당파였기 때문이다. 개인이 아니라 집단을 생각하는 것, 자신이 아니라 당을 생각하는 것, 눈앞의 이익이 아니라 역사와 대의를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허무맹랑하고 처절하던지. 고작해야 이미터 남짓 되는 몸으로, 그저 나와 같은 인간인 채로 그들은 어찌나 무시무시한 저력을 보여주었던지. 도저히 인간이 아닌 것처럼.


인민은 물이고 당은 물고기다.

이 말을 나는 이규봉 교수의 <미안해요 베트남> 책에서 처음 보았다. 물이 없으면 물고기는 살 수 없으니 당은 인민의 도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인민이, 백성이, 동지가 살기 좋은 나라. 누구도 굶지 않고, 굶어도 다 같이 콩한쪽이라도 나누어 먹는 나라. 지금은 어떨지 몰라도 그때의 사회주의는 사람이 제일이었다. 사람답게 사는 것, 인간답게 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사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귀했고, 인물을 아꼈고, 모든 행정이 양심과 도덕에 기대어 돌아갔다. 가장 큰 힘이 인간의 심장 속에 있었기 때문에 체계적으로 휘몰아쳤다. 역동하는 기개를 가진 인간들이 하나의 목적성으로 운동하는 것은 돈과 지폐더미가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한국은 민주주의의 껍질을 쓴 절대적인 자본주의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 약자와 소수자를 돌보지 않고, 상위 10퍼센트의 기득권이 국가 재산의 80퍼센트를 차지하며 자기 자리를 공고히 하는 데에만 혈안이 된 나라다. 돈이 인간을 이긴다. 대한민국에서 돈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돈이 곧 권력이요, 권력은 모든 무도한 짓을 용인하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우익세력은 늘 죽음을 방법으로 삼아왔다. 농민과 백성에게 좌익의 방법대로 신의를 얻는 것보다 부역자라는 죄목으로 즉각 처형하는 빠르고 확실하다는 판단이었을 것이다. 이것을 선택이라 할 수 있을까? 사람을 죽이는데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을 나라가 내린 판단이라고 할 수 있을까? 친일에서 친미로 이어진 군경 권력을 위태롭게 하는 독립운동가들은 빨갱이라는 이름으로 고문하여 북으로 도망치게 하거나 죽여 없앴다. 민주주의를 부르짖으며 독재에 반대하는 대학생들은 고문 취조로 빨갱이로 만들어 불구의 몸으로 내보냈다. 나라 반대편에 북한이 건재하는 한 권력자들은 영원히 빨갱이 놀이를 꺼내들 것이다. 입바른 소리를 하는 사람, 민중을 대변하는 사람, 권력에 굴하지 않는 사람은 다 북에서 온 간첩이라고 매도해 곤죽을 만들어버리면 되니까. 비겁하다. 누구보다 반국가적이고 공산세력의 독재치하를 추구하는 것은 한국의 기득권층이다. 무고한 국민을 작신작신 밟아대며 얻은 자리일 텐데 얼마나 악착같이 지키고 싶을는지.


돈은 사람을 이길 수 없다. 돈을 찍어내는 것이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람 같지 않은 것들은 그 진리를 무시한 채 너무 오랜 시간을 살아서 짐승이 됐다. 사람 같은 생각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정지아 작가의 다른 도서, <빨치산의 딸>을 읽던 밤, 나라에 기함할 일이 터졌다. 비상식이 당연하게 난무하던 밤이었다. 언제 또 정세가 뒤집혀 잡혀 들어갈지 모르는 판이지만 이제 와서 빨갱이가 아닌 척하기에는 늦어도 한참 늦었다. 도서관 대출 기록, 브런치에 썼던 글들, 성공회대에서의 포럼, SNS에 올렸던 좌익 발언 등등. 두려움보다는 기가 찬다.  진짜 갈 때까지 가는구나. 나는 아직도 내가 태백산맥에 대한 글을 쓰기에는 너무 이르다고 생각한다. 화가 가라앉기는커녕 냄비뚜껑이 저 멀리까지 날아간 지 오래다. 태백산맥 완독 후 브런치에 ‘그놈의 빨갱이가 대체 뭔데’라는 주제를 만들어놓고 한 편의 글도 쓰지 못했었다. 나라의 기둥이 무너지던 새벽이 지나고 하루를 보내니 결심이 섰다. 생각이 정리되지 않은 글 두 편을 브런치에 올렸다. 앞으로 무슨 일이 생겨도 할 말은 하고 죽어야겠다.


인간은 왜 죽을까?

그날 밤에 선포된 포고령은 나를 포함하여 내란 이후 매일밤 국회 앞에 모였던 200만의 국민들을 죽여 없앴을 것이다.

일제로부터의 독립 후에, 북한의 남침 후에 그 많은 인민들을 좌익 세력과 그의 부역자로 몰아 처형한 것처럼, 묘비도 유언도 없이 죽였을 것이다.

지리산에 그 혼들이 아직도 남아있는데.

밤마다 당신이 죽기를 기다리는데.


한국에 너무나 많은 영웅들이 있었다. 세상을 바꾸고 민생의 안정을 도모하는 전사들이 있었다. 일 년 넘는 전쟁에서 살아남은 명장도 머리에 총에 맞으면 죽는 것이다. 천명의 군사들이 의지하는 대장도 부하 한 명의 변절로 죽는 것이다.


사람은 왜 죽을까?

그렇게 많은 것을 담고 있던 이미터 남짓한 몸은, 왜 그렇게 어렵게 살아남아 쉽사리도 깨져버릴까.

밤마다 죽기를 기다리는 당신들은 삐뚤어진 입을 놀리면서 잘만 살아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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