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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임무, 생사의 경계

- 헬기와 함께 맞선 밤바다 -

by 노병

칠흑 같은 밤바다.


그 시절, 철책선으로는 간첩이,

바다로는 괴선박이 자주 출몰했다.


유난히 무더운 여름밤.
땀에 젖은 비행복이 등에 달라붙었다.
우리는 대기실 형광등 아래서 카드를 섞으며
비상 출동을 기다리고 있었다.

밤 10시 47분경.
“띠리리링—”
상황실 전화가 울렸다.

수화기를 든 당직사관의 얼굴이 굳었다.
“긴급 출동! 괴선박 포착!”


세상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헬기에 뛰어올라 엔진을 켰다.
로터가 회전하며 밤공기를 갈랐다.
엔진음이 커질수록 내 심장도 함께 뛰었다.

동해 상공. 발아래는 검은 바다뿐이었다.
별빛과 오징어잡이 배의 불빛 사이에서
부조종사석의 확대경으로 수면을 훑었다.
불빛이 뒤엉켜 있었고, 그 속 어딘가에
의심 선박이 있을 터였다.

“2시 방향, 의심 선박.”
“확인. 접근한다.”

그때였다.
헬기가 ‘푹—’ 하고 고도가 떨어진다.
돌풍! 밤바다의 난기류였다.


적색 엔진 ‘경고등’이 깜박였고,
계기판 바늘은 흔들렸다.
고도 300피트, 200, 150…
급격히 떨어졌다.


정조종사 L소령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하지만 나는 알았다.
그 차분함 아래 깔린 긴장을.

‘후드득—’
기체가 동력을 잃고 바다 쪽으로 기울었다.
손도 떨렸고, 숨이 멎는 듯했다.
본능이 말했다.
“뛰어!”


조종화와 장갑을 벗었다.
밤바다로 탈출할 준비였다.


바로 그때.
L소령이 조종간을 낚아챘다.
순간돌풍과 엔진을 달래듯 조종해 갔다.

‘우우우~웅~’

정상적인 동력회복이 되었다.
바람도 잠잠해졌다.

기체가 고도를 회복했을 때, 100피트.

아래로 보이는 바다는
오징어잡이 배의 불빛으로 반짝였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서로의 숨소리만이
우리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헬기는 무사히 복귀해 정상 착륙했다.


착륙 뒤 L소령이 말했다.
“담배 한 대 피우자.”
그 말에 살아있는 따뜻함을 느꼈다.

헬멧을 벗었어도 여전히 손이 떨렸다.
대기실 밴치에 앉아 담배 한 대를 피웠다.
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방금 우리가 떨어질 뻔했던 바로 그 하늘에서.

그 순간 깨달았다.
베테랑, 고참, 선임, 명장, 명인…
그 이름들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죽음 앞에서도 손이 떨리지 않는 사람.
몇 초 안에 정답을 찾아내는 사람.
침착함을 본능으로 익힌 사람.
L소령은 그런 분이었다.

그날 밤, 그는 내 목숨을 살렸다.


끝나지 않은 이야기.

그 후로도 순간들은 이어졌다.
DMZ 감시 비행 뒤 화천 논바닥 비상착륙,
진해기지에서 이륙 중 오일라인 파공…

그때마다 나는 살아 돌아왔다.

운이었을까, 실력이었을까.
돌이켜보면 둘 다였다.

하지만 확실한 게 있다.
그 순간들이 나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두려움을 견디는 법.
침착함을 유지하는 법.
생존하는 법.

참 잘 버텼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시간들은 내 인생의 가장 값진 훈장이었다.


오늘도 나는 스스로에게 말한다.
“그래도 잘 버텼다.

그때의 나는, 참 괜찮은 군인이었다.”



#헬기조종사#비행임무#실화#군대이야기

#야간비행#생사를가른순간#리더십#침착함의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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