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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에 대하여

반성 아닌 마주 봄, 판단 아닌 끌어안아줌

순서에 대한 강박이 있다. 

있다.라고 확신하는 이유는 나의 완벽주의적 성향 때문인데 

처음부터 순서대로 진행되어야 하기에 순간을 놓쳐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하여 나는 결국 시작하지 못해 맞이하는 더 큰 스트레스를 마주해야 했다. 아 그때 했어야 했는데 과거형 비난과 함께. 

또 정리? 에 대한 강박이 있는데 이것 역시 '전달'을 조리 있게 해야 한다는 완벽주의적성향 때문에 해당하는 것인데 제대로 확실하게 전하고 싶다는 욕심이 나를 서성이게 하고 망설이게 한다. 


그렇게 나는 감정의 순간을 놓치고 나를 자제하며 나를 정제하는 삶을 살아왔다는 것을 

암에 걸린. 마흔 살에 깨달았다. 


그 말은 오늘 이 글은 질서 정연하지 못하고 설득력이 부족한 나에게 매우 부끄러운 글이 될 것이라는, 평소상황이라면 결국 '발행'버튼을 누르지 못할 글이라는 뜻이다.

그동안의 나는. 단어선택도 그렇게 고심하며 눌러쓰며 글을 한 자 한 자 쓴다. 정말 날것 그대로 생각나는 대로 나는 쓸 수 있을까... 허허 이렇게 보면 분명 퇴고형 인간이다. ㅎㅎ... 



-

갑작스럽게 암이 찾아오고. 암환자의 일상을 마주하면서 나는 다양한 나와 다시 만난다. 

나는 이런 사람이구나. 


그중 하나는 매우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나의 태도인데 

암선고를 받고도 나는 한 번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 아니 원망되지 않았다. 

그분의 큰 계획하심에 내가 있고 나는 그 안에 존재하고 그분의 계획안에 내가 있다면 지금도 나는 다만 지금의 충실할 뿐. 


맹렬하게 암과 마주 봤으며 비장했고 놀랍도록 생존과 삶의 명확한 선이 그어져 주변에서도 나를 놀라워할 때 

나는 내가 다른 이들과 매우 다르게 사건에 반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냉정하고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차분히 암을 노려보며 치병계획을 짜는 나는 죽음의 대한 두려움보다 남아있는 삶의 소중함을 선택했을 뿐인데 말이다. 


선항암을 하라는 의사의 진단에 병원을 옮기고 주체적으로 수술을 선택하는 그 과정에서 나의 존재가 병원에서는 쓰이고 버려지는 부품 같은 암환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까지. 나는 참으로 열심히 공부하고 선택하고 치열했고 당당했다.

그러나 수술뒤에 있는 표준치료, 방사선이나 항암, 호르몬치료에 대한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나는 어려웠다. 

그동안의 인생의 굵직한 선택들은 결혼이든, 일이든 선택 후에 생명은 보전되었는데-고려대상도 아니었지만, 결혼잘못해도 죽는건 아니니까- 이번의 선택은 생명을 걸고 하는 선택이다. 


생명이 스러져갈 그때 나는 정말 후회하지 않을 것인지. 선택의 무거움과 중대함을 고스란히 느끼며

기도하다가 암을 경험한 지인한테 연락을 했다. 답을 모르는 건 아니었던 것 같다. 그냥 누군가에게 답답함을 토로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렇게 그녀와 통화 중 다른 얘기로 그녀의 부모님 이야기를 듣다가 나의 과거 어느 장면이 떠올랐다. 


엄마는 자녀 셋을 키우시며  전업주부일을 하시다가 일터에 뛰어드셨다. 그러다 회식이었었는지 늦게 귀가하시던 날 아빠와 엄마는 다투셨다. 

그때가 내가 20대 초반. 

나는 알고 있었다. 엄마와 아빠가 다투는 것이 나 때문은 아니라는 것. 부부로 살아오신 두 분의 오래된 감정들이 폭발한 날이었으며  그 시발점이 엄마의 회식이었을 뿐이었고 이런 일이 거의 처음이었다는 것. 

그런데 나는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달리 엄마아빠의 부부싸움을 문밖에서 들으며 내 가슴을 쳤다. 

내가 더 잘난 딸이었으면 엄마아빠가 덜 힘드셨을 텐데.라는 생각으로 


그 장면이 떠오르자 나는 눈물이 났고 지인에게 이 상황을 이야기하데도 울음이 났다.

왜?. 

그때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내가 말했다. 

왜 우는 거야. 그 일은 지금과 상관이 없어. 네가 잘나고 못나고 가 아무런 상관이 없어 그걸 아는 게 중요해 


그리고 또 다른 나는 깨달았다.

상황은 그렇다는 걸 나도 알고 있지만 내 마음은 안 그래. 나는 내가 잘난딸이 아니라 슬퍼. 

아. 그동안 이 갭을 나는 떠안고 살았구나. 


첫째로 살아오면서 나는 참 당당했다. 

엄마도, 오랜만에 연락된 학교동기도, 주변인들도, 동생들도 나는 참 당차고 똑 부러지고 책임지는 사람이라고 하고 나도 그렇게 생각해 왔다. 

부모님은 언제나 나에게 동생들에게 부모님이 안 계시면 첫째인 내가 엄마아빠 대신이라고 항상 말씀하셨는데 나는 그 말에 수긍하면서도 내가 엄마아빠를 대체할 만큼 대단하지 않아서 힘들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은 나에게 책임을 떠넘기려고 하신 건 아니시지만 나는 엄마아빠대신이려면 스스로 대단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압박해 왔던 것 같다. 그게 스스로에게 자행되는 또 다른 폭력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도 

대단한 사람이 되지 못해도 괜찮다고 나를 다독여왔지만 아주 깊은 내면은 스스로를 재단하는 것을 허락해 왔던 것이다. 


그 갭을 나는 과도한 책임으로, 과한 완벽주의로, 매사에 이성적인 모습으로 메꿔가고 있었다. 

엉뚱하게 흘리는 눈물은 그동안의 지쳤던 나의 또 다른 모습으로. 

나의 괴리 가득한 감정의 단편이었다. 



나는 투쟁하는 사람이었다. 

삶을 살아낸다고 이야기하며 함께 일어나 목표를 향해 나아가자고 하며 비장하고 치열하고 애쓰는 삶을 살아왔다. 보이지 않는 목표에 나의 시간과 순간을 배팅해 가며. 에너지를 쓰고 나를 옭아맸었다. 

얍복강가에 하나님과 씨름하던 야곱이 결국. 정강이를 얻어맞던 그때처럼 나는 암에 걸리고 나서야 몸부림치며 치열하게 살던 나를 내려놓게 되었다. 


암선고를 삼 년 전 아빠를 암으로 잃은 엄마한테 알리는 건 지옥에 서있는 것 같았다. 

첫째인 내가 엄마아빠 대신인 내가 어쩌면 아빠처럼 먼저 세상에 없어질 수 있다는 팩트를 알리려고 나는 pt를 준비했었다. 

냉정해지려고. 감정에 매몰되지 않고. 앞으로 어떻게 하는 게 더 중요하지 지금의 암선고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설득하려고 했고 장렬히 실패했다.  슬픔은 슬픔이고, 상처는 상처다. 


상처는 나의 이성이 아무리 현명하고 지혜로운 대답을 내놔도 상처였다. 

잘 포장하고 잘 싸매고 잘 감춰놔도. 

밴드 위로 번지는 핏자국처럼. 이제 그 상처를 나무라지 않고 마주 보고 쓰다듬어본다. 아직도 피가 나는 상처를 말이다. 암에 걸리고, 인생의 가장 나약할 지금이 돼서야. 


암은 참 개인적이다. 

다들 나의 암을 안타까워했다. 내가 아빠의 암을 안타까워했던 것처럼. 진심으로, 때로는 아파하며. 

그러나 암이 되고 나서 깨달은 한 가지는. 아빠의 암은 아빠의 암이었다는 것이었다. 

내 암은, 내 암이다. 

누구도 나만큼 내 암에 진심일 수 없다. 

상처를 마주 보며 나는 하나님이 나에게 암을 주신 이유를 다시 생각해 봤다. 인생이라는 선로에 폭주하던 기관차를 단지 멈춰주려는 것이 아니라. 진짜 존재로서의 나를 다시 만나게 해 주시려는

내가 입이 아프게 이야기하던, 사랑을 받아야 사랑할 수 있다는 그 사랑을 받고 있는 게 아닐까. 


아직 그날의 지혜에게 위로할 말을 찾지 못했다. 아니 찾지 않으려 한다.

마흔의 나는 자괴감으로 울던 젊은 날의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안아줄 뿐. 어떠한 말로도 표현하거나 평가하거나 판단하지 않고 다만 깊은 이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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