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치도록 가득 채우는 것보다 적당할 때 멈추는 것이 좋습니다. 너무 날카롭게 벼리고 갈면 쉬 무디어집니다. 금과 옥이 집에 가득하면 이를 지킬 수가 없습니다. 재산과 명예로 자고 해짐은 재앙을 자초함입니다.
일이 이루어졌으면 물러나는 것 하늘의 길입니다. - 51P -
[도덕경 9장]은 무슨 일이든 지나쳐서는 안 되며(과유불급 過猶不及), 멈출 줄 알아야 한다(박수칠 때 떠나라)고 이야기한다. 삶을 살아가는 태도에 적절한 수위 조절은 필요하며, 이 적정선을 알아챌 수 있는 일상의 깨어있음, 그리고 적정선을 지키기 위한 자기 절제의 필요성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멈춰야 할 때를 알아채지 못하고 질주했을 때의 폐해에 대해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일상을 살아가다 보면 때때로 '그때 내가 멈췄어야 했는데...'라는 후회와 함께 자책의 이불킥을 할 때가 있다. 이것은 하고 안 하고가 아닌 언제 하고 언제 멈추느냐의 시점, 즉 '적기 適期'를 놓쳐버림에 대한 후회에서 비롯됨이다.
요즘 일요일마다 3시간씩 타로카드를 배우고 있다. 벌써 4주째로 이번 시간은 메이저(Major) 카드 13~16번 카드에 대해 공부한다. 수업을 듣고 있자니 [도덕경 9장]의 화두가 메이저(Major) 13~16번 카드와 연결되어 해석된다.
13. 죽음 : "박수칠 때 떠나라"
[13. Death 죽음]
13번 죽음(Death)의 카드가 나에게는 '박수칠 때 떠나야 함'으로 읽힌다.
카드 그림이 주는 이미지와 '죽음'이라는 단어 자체가 주는 느낌이 왠지 모르게 불길하다.
하지만 13번 죽음의 카드는 단편적으로 끝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죽음은 마무리이면서 새로운 시작일 수 있다. 죽음 카드는 새로운 변화를 위해 기존의 것을 정리해야 하는 시작의 출발선 상에 놓여있음을 의미한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이란 없다. 모든 것에는 시작과 끝이 있다. 물러남이 있어야 새로 들어옴이 있고, 겨울이 지나야 봄이 오는 이치가 이와 같은 것이다.
현명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이 가진 것을 영원히 지키는 법을 아는 자가 아니라, 시작과 끝의 적절한 시기를 알고 그때에 맞춰 미련 없이 행동하는 자임을 시사한다.
미련을 갖지 말라. 13번 카드는 권력, 명예, 부富 등 지킬 것들이 이미 충분히 그득 차 넘치려는 순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버티고 앉아있다가는 카드 속 왕의 모습처럼 죽음을 맞이하게 될 거라고 경고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13번(죽음) 카드의 경고를 무시해버렸다. 정리하고 멈춰야 함에도 불구하고 브레이크를 밟지 않고 질주를 계속한다. 이러다가 나락의 끝인 죽음으로 치닫는 것은 아닐까?
다음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14번 카드를 보니멈춤과 변화의 시기를 놓쳤다 하더라도 기회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닌 듯하다.
14. 절제 : '과유불급 過猶不及'
[14. Temperance 절제]
14번 절제(Temperance) 카드이다. 14번 카드에서는 '과유불급 過猶不及'의 의미를 알아채고 조절해야 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미카엘 천사가 한쪽 발은 시냇물에 다른 한쪽 발은 육지를 딛고 균형을 잡듯 두 개의 컵을 들고 물을 옮기고 있다. 조금만 각도가 기울어져도 물의 양 조절은 실패하고 물은 흘러내려 컵 안의 물은 사라져 버릴 것이다. 욕망의 조절 실패로 모든 것을 잃을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14번 카드처럼 끊임없는 안정과 균형을 위한 조절과 절제가 요구되는 좀 쑤시는 지루한 과정의 연속일 것이다. 14번 절제 카드는 '지나침과 부족함 사이의 균형감 찾기', '조화를 이루기 위한 자기 절제', '과유불급'의 교훈을 '수위 조절'의 미학을 통해 설명한다.
종결로 매듭을 짓고 새로운 변화를 시작하는 마침표(.)를 찍는 행위가 다소 무겁게 느껴져 정지(■) 버튼을 눌러야 하는 13번 죽음의 시기를 놓쳤다면, 14번 절제 카드는 욕망을 추구하는 속도와 양을 조절하기 위해 잠시 쉬어가는 쉼표(,)의 의미를 되새겨 잠시 멈춤(ll, Pause)의 버튼을 눌러보라고 기회를 한 번 더 주는 듯하다.
15. 악마 : 중독의 나락에 빠지다
[15. Deavil 악마]
13번의 중단과 시작을 통한 존재의 변형도, 14번의 조화를 위한 자기 절제에도 실패하게 되면 결국 15번 악마(Devil) 카드와 같이 중독에 빠지게 된다. 스스로의 욕망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탐닉하게 된다는 것이다. 탐닉은다른 다양한 삶의 가치를 고려하지 않고 단 하나에만 빠져서 모든 가치를 하나의 가치로 환원해버린다.그 하나에 구속당해 벗어나지 못하고 자신의 가치로움을 기만하는 완전한 종속됨, 바로 중독 상태로 스스로를 몰아넣고 있음이다.
쇠사슬에 목이 감긴 두 남녀 위에 '루시퍼'라는 타락천사가 있다. 악마의 쇠사슬이 헐거워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 남녀는 '루시퍼' 악마의 유혹에 빠져 이 상황을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그저 쇠사슬로 스스로를 옭아맨 채 악마가 주는 쾌락과 유혹에 중독되어 버린다.
멈춤의 시기도, 절제의 의지도 없이 타락한 욕망을 향해 치닫게 되면 결국 자유 의지를 빼앗겨 버린 중독 상태에 놓이게 됨이 카드의 흐름을 따라 읽힌다.
멈춰야 할 때를 놓치고, 이를 절제하지도 못해 자신의 욕망만을 탐닉하면서 중독되어진 자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16. 탑 : 수직으로 치솟는 욕망의 탑은 결국 붕괴되고 추락하게 된다.
[16. Tower 탑]
탑이 하늘을 찌를 듯 수직으로 솟아있다. 주변의 상황은 아랑곳없이 더 높게를 주문처럼 되뇌이며 욕망의 탑을 쌓아나간다. 나 스스로가 만든 고정관념, 아집과 자만 등이 수직으로만 치솟을 때 그것이 바로 바벨탑(창조주의 권능에 도전하기 위해 하늘까지 쌓아 올린 탑)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신神에 가까워지려는 욕망이 악마를 만들었다.
앞의 '악마' 카드가 쌓아 올린위태롭게 적치된 '탑'을 이제는 무너뜨려야 한다고 16번 '탑' 카드는 말하고 있다.
신의 심판인 듯 천둥, 번개가 내리쳐 화염에 불타고 있는 탑 카드는 물리적인 파괴에 의한 추락만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탑은 우리 스스로가 자신 안에 높게 쌓아 올린 타락한 욕망의 구조물을 상징한다. 명예와 권력은 우리를 보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지키느라 우리 스스로를 가두는 감옥이 될 수도 있다는 의미이다. 모두가 세상을 변화시킬 생각을 하면서도 정작 자기 자신을 변화시킬 생각은 하지 않는다. 쌓아 올리기만 하면 언젠가는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게 탑의 속성일 텐데 끝없이 위로만 향하는 맹목적 질주가 한없이 위태롭다. 결국 스스로 쌓아 올린 토대가 파괴된다. 끈적끈적한 욕망의 집착으로 스스로를 옭아맨 탑 안에서 벗어나지 못한 존재는 스스로를 가둔 탑의 붕괴와 함께 추락한다.
다만, 추락이 부정적인 결론으로 귀결되지 않을 것이라 믿어보려 한다. 13번, 14번에서 깨달음을 얻고 변화를 시도했다면 변화를 위한 고통은 덜 했으리라는 전제는 뒤로하고, 인생은 계속되기에 탑 카드에서 일말의 희망을 건져보려 한다. 탑의 붕괴가 엄청난 충격과 혼란스러움을 야기한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지만 탑의 붕괴를 통한 추락이 어쩌면 나를 속박하고 있던 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또 하나의 기회일 수 있음에 대한 희망을...[1]
'끝을 모르는 질주는 추락한다'는 교훈이 [도덕경 9장]과 [타로카드 13~16번] 안에서 일맥상통하고 있다. '멈춤'없이, '절제'없이 '욕망'만을 탐닉하다 보면 결국 '추락'하게 됨을 동시에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동양의 고전인 [도덕경]과 서양의 상담기법이자 점성술로 사용된 [타로카드]가 각기 다른 방식으로 같은 교훈을 전달하고 있음이 신비롭게 다가온다.
다른 시대 상황, 다른 지리적 환경에서도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삶의 지침일 것이다.
[도덕경 9장]과 [타로카드 13~16번]에서 이야기하는 적당한 양과 적당한 때를 가늠하여 적기에 행동할 수 있는 지혜와 내공을 갖출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다시금 고민해보려 한다.
일희일비하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하여 주의 깊게 스스로를 살펴 그 적기를 헤아릴 수 있는 혜안과 그 알아차림을 주저 없이 행동할 수 있는 용기를 내 안에서 발견하기를 희망해본다.
어지럽게 일어나는 나의 감정과 생각부터 살펴 나의 욕망을 속도를 가늠해보는 여유부터 찾아보겠다 다짐을 하며 [도덕경 9장]을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