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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빛 Aug 29. 2023

해야 하는 일 말고 하고 싶은 일

그러나 중요한 건 할 수 있는 일

  나에게 주어진 에너지를 10으로 본다면 7, 아니 8쯤. 아무튼 하고 싶은 일에 더 집중해도 되던 때가 있었다. 스스로를 멀티 플레이어, 다능인이라 생각하고 여기저기 얕은 우물을 파대며 신나 하던 내가 있었다. 취미를 만드는 것이 나의 취미였고, 프로 계획러를 자칭 하고 싶은 일을 계획 다이어리를 채우는 것(비록 실행하지 않을지라도)이 나의 즐거움이었다. 취미, 운동, 공부 등 '하고 싶은 일'이라는 이름 얕은 우물들은 겨우 몇 삽을 떠두었을 뿐인데도 마르지 않는 샘처럼 솟아나고 세상에는 흥미를 둘만한 것이 너무나도 많았다.


  해야 하는 일도 소홀하지 않았다. 특수교사라는 직업은 어쩜 그렇게도 적성에 찰떡같이 맞았다. 장애아동을 가르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로 공부한 언어치료는 또 어떻고. 아이들의 발달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는 것은 힘들긴 하지만 그만큼 행복했고, 아이들은 내가 스스로를 좋은 교사로 여길 수 있게 해 주었다. 조금씩 느린 아이들을 가르치다 보니 이제는 성인과의 대화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한국어교원 자격을 땄다. 해야 하는 일을 하다 보니 하고 싶은 일이 생기고, 하고 싶은 일을 하다 보니 해야 하는 일을 더 잘하게 되는 그런 선순환이라니. 돌이켜 보니 나 참 부지런히 살았다.


  임신을 했다. 계획했던 일이었다. 그러나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은 만큼 하지 못하게 되었다. 원래 쓰던 만큼 몸을 거칠게 쓸 수 없었고, 무언가 하려 해도 졸음이 밀려왔다. 해야 하는 일은 어떻게든 해나가야 하기에 에너지를 쏟았고, 퇴근을 하면 쓰러져 자기 바빴다. 출산 일주일 전까지 일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비교적 가뿐한 임신 생활을 보냈지만 하고 싶은 일까지 모두 하는 것은 욕심이었다.


  출산을 했다. 해야 하는 일, 그것도 '당장' 해야 하는 일이 늘어났다. 나의 일은 미루고 몰아치며 해나가면 되는 것이었지만 아기의 요구는 그럴 수 없었다. 미루기의 대가, 벼락치기의 아이콘인 나에게 반드시! 지금! 당장! 아기가 노하기 전에!! 해내야만 하는 일이 생긴 것이다. 내 모든 시간과 에너지는 아기에게, 그러고 나서 남은 것은 잠을 위해 다. 하고 싶은 일들은 그대로 묻어야 했다.


  ...로 끝나는 이야기라면 시작하지 않았다! 하하.


  복직을 했다. 아기와는 어느새 손발이 짝짝 맞는 콤비가 되었다. 그리 자주 노하지 않고, 많이 표현하고 금세 만족하는 나의 순한 아기 덕에 육아와 집안관리자로써의 역할은 해야 할 일이라고 칭하기엔 부담스러운 그저 일상이 되었다. 17개월의 휴직 기간은 다행히도 일의 감각을 잃기에는 짧은 기간이었기에 해야 할 일들은 다시 나의 상황에 맞게 미루고 몰아치며 감당해 나갈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해야 하는 일 말고 하고 싶은 일을 해나가기 시작했다. 덮어두었던 얕은 우물 몇 개의 뚜껑을 열고 마른 샘이 없나 살폈다. 특히 아꼈던 우물을 좀 더 깊이 파기 시작했다. 배구를 하고, 대회에 나갔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브런치 작가가 되었다. 다시 프로 계획러가 되어 다이어리를 채우고, 아기와 함께 할 수 있는 취미를 찾기 시작했다.


  복직 후 6개월이 흘렀다. '나-가족-직업'이 만든 삼각형 속에서 아슬하지만 균형을 잡아가고 있다. 갑자기 아기가 아프다던가, 내가 아프다던가, 업무가 겹겹이 몰리는 돌발상황도 있다. 그 사이에서도 어떤 일을 어떻게, 얼마나 할지 그 적당한 선을 깨달아 가고 있는 것 같다. 하고 싶은 일만 하며 살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이 인생이구나 하는 제법 어른스러운 생각도 하게 되었다.


  해야 하는 일이든 하고 싶은 일이든, 나는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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