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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하 Jan 23. 2024

영생은 작은 형제의 외침을 듣는 순간부터

Separation of Sheep and Goats, © Metropolitan Museum


교회 소그룹 성경 공부 교재에 '예수님이 오신 목적'으로 각각 영생과 대속을 이야기한다. 교재를 읽으며 생각이 많아졌다. '원죄-형벌(현생에서 형벌이나 영원한 지옥불)-(예수의)대속-(천국에서)영생' 세트는 어린 시절 교회에 다니면서부터 가장 쉽고, 선명하고, 공포스럽게 기억된 기독교의 원리였다. 의심하는 것조차 불경스러웠던 '원죄-형벌-대속-영생' 세트의 핵심은 '죽음의 공포에 대응한 영생의 희망'이다. 영생이 없다면, 이 전의 모든 고리가 무너지게 된다. 


성경 공부 교재에서 예수님의 오신 목적을 '영생'으로 소개하며, 본문으로 마태복음 25장 46절을 제시한다.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라는 말씀이다. 그러면서 교재에서는 "영생과 함께 영원한 벌도 있다고 하셨다. 영생 아니면 영벌이다.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죽음 이후의 삶이 영벌로 귀결된다며 교재에서는 "사랑하는 가족과 이웃에게 영생을 전하고자 하는 간절함"을 묻는다. 번화가, 기차역, 전철 안에서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는 분들의 동력이 공포에서 오는 간절함이다. 


그런데 46절은 31절의 결론 부분이다. 31절부터 보면 예수께서 다시 오셔서 모든 민족을 심판하실 때 오른편으로 보낸 의인들에게 "내 아버지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마련해 둔 나라를 상속받아라."라고 한다. 그런데 '의인'들은 왜 오른편으로 갔을까? 원인이 있다. "사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내게 마시게 해 주었다. 나그네 되었을 때에 나를 맞아들였고 헐벗었을 때에는 내게 입혀 주었다. 병들었을 때에 나를 찾아왔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도 내게로 와 주었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인들이 그런 적 없다고 다시 되묻자 "진실히 너희에게 이르거니와, 너희가 이 지극히 작은 내 형제들 가운데 하나에게 해 주었을 때마다 나에게 해 준 것이다."라고 말한다. 왼편에 있는 악한 자들은 당연히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에게 해 주지 않았을 때마다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나서 46절의 결론 영벌과 영생에 이른다. 


'원죄-형벌-대속-영생' 세트를 묶어내는 강력한 원동력인 '영생'으로 들어가는 문이 '원죄-형벌-대속'이 아니라 우"지극히 작은 내 형제들 가운데 하나"에게 우리가 베푼 자비란 말이다. 교재는 '영벌'와 '영생'을 대비시키며 '원죄-형벌-대속-영생' 세트로 이야기를 끌어가려 했지만, 성서 본문은 예수가 이 땅에 온 진짜 목적을 말한다.  우리 주변의 작은 이들을 돌아보는 마음을 갖는것, 그들을 돌봐주는 것, 이웃의 필요를 채우는 것,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세우는 것이 예수의 목적이자 목표다. 이 이야기 속에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생명은 모두 상호의존적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나의 깨달음은 '원죄-형벌-대속-영생'을 벗어나 세계를 바라보게 된다. 세계 안에서 겸손한 나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세계 안의 영생이다. 영원한 벌은 당연히 그 반대의 삶이다. 죽음의 공포가 지배하는 공허한 삶이다. 


마가복음 10장 45절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200주년 신약성서판 : 사실 인자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섬기고 또한 많은 사람들을 대신해서 속전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습니다.)"라고 이야기한다. 그 뒤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여리고에 간 예수가 눈 먼 바디매오를 고쳐 준 사건이다. 바디매오는 예수에게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 간청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조용히 하라고 그를 꾸짖는다. 예수는 바디매오를 불러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고 묻는다. 바디매오는 다시 볼 수 있게 해 달라 하고, 예수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한다. 바디매오는 다시 보게 되고, 예수의 길을 따라갔다. 사람들에게 조용히 하라 구박받는 작은 형제인 바디매오에게 예수는 관심을 갖는다. 그의 외침을 듣고, 그의 필요를 채운다. 예수는 그 시대에 인간다운 삶을 살기 원하는 평범한 이들을 고쳐주셨다. 예수 사건의 과정 자체가 대속의 기쁨이다. 


예수 사건은 단순히 천국을 얻거나 영원한 처벌을 피하려는 1차원적 욕망 그 자체는 아니다. 1차원적 욕망은 '생명을 보존'하려는 모든 생명의 자기중심적 행동이다. 상급을 받고 성취하는 보이지 않는 천국이 아니라 '마태복음 25장 31-46절'의 교훈, "진실히 너희에게 이르거니와, 너희가 이 지극히 작은 내 형제들 가운데 하나에게 해 주었을 때마다 나에게 해 준 것이다."를 이루어 가는 것이 영생의 삶이다. 그리고 예수는 자신의 삶으로 그리스도인의 살아야할 풍요롭고 완전한 삶을 보여주셨다. 


존 쉘비 스퐁은 <영생에 대한 새로운 전망>(한국기독교연구소)에서 "죽음 이후의 생명에 대한 인간의 탐구는 이처럼 어떤 의미에서도 나의 생명의, 혹은 그 어느 누구의 생명의 불사에 대한 주장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각성에 근거한 것이니, 즉 자아의식을 지닌 인간의 삶이 하느님의 영원성에 참여하고 있다는 각성, 내가 점점 확장하는 생명의 힘과 소통하는 그 정도만큼, 생명을 고양시키는 사랑과 무한한 존재의 근원과 소통한다는 새로운 각성에 근거한 것이다. 나의 죽어갈 유한성에 의해 제약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원성에 의해 제약되어, 나는 살고, 사랑하고, 하느님의 일부가 될 것이다."(268-269쪽)라고 말한다. 영생은 작은 형제의 외침을 바라보는 새로운 각성의 순간 시작된다. 죽음 이후의 삶이 아니라 지금/여기에서. 그동안 들리지 않았던 소리를 듣고, 보이지 않았던 순간을 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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