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바롭스크에서 블라디보스톡으로
지난해, 7월 26일 인천공항을 출발한 오로라 항공기는 세 시간 정도 날아 시내에서 약 10km 정도 떨어진 하바롭스크 노비 공항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신 공항의 의미를 갖는 노비 공항에 도착하여 알파벳이 뒤집어진 것처럼 보이는 낯선 키릴 문자를 보았다. 3시간 만에 도착한 노비 공항은 모스크바와 페테스부르크 공항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낯설고 새로운 땅에 도착했다는 생각과 함께 참 다른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내로 들어서니 금빛 혹은 양파 모형의 도움 지붕과 붉은 벽돌 건축물이 모스크바 여행을 떠올린다. 하바롭스크 주청사와 레닌 광장을 지나 꼼소믈 광장 주변 러시아 젊은 사람들이 주로 찾는 거리에 위치한 메르바 호텔로 향했다.
하바롭스크는 유라시아 대륙 극동 지역에 위치한 도시이다. 아무르강, 중국에서는 흑룡강이라 부르는 이 강을 경계로 중국, 몽골과 국경을 이루고 있다. 17세기 탐험가 E.P. 하바 로프의 이름에서 유래하였으며, 1905년 시베리아 철도의 부설과 함께 급속히 발전하다 2000년 러시아 극동부의 수도로 자리 잡았다. 게다가 계획적으로 구성된 도시 전체가 바둑판처럼 짜여있어 어디든 찾아가기 쉽다. 이후 제정 러시아, 청, 일본 등 땅의 주인이 수차례 바뀐 격동의 땅이다 보니 다양한 문화가 섞인 아름다운 도시가 되었다. 하바롭스크에 유럽 건물이 많이 남아있는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러시아 혁명 당시 일본의 지배를 받고 있어 보존이 될 수 있었다고 하니 도시의 역사에서 새옹지마를 느꼈다.
동쪽의 시베리아 철도부터 서쪽의 아무르강에 이르는 구시가 주변 젊은이들이 좋아할 만한 식당에서 감자수프와 스테이크. 보리빵으로 저녁을 먹고 꼼소믈 광장 근처로 향했다. 20루블, 우리나라 돈 400원을 지급하는 전차 트롤리버스가 눈에 띄었다. 버스의 색상은 여러 가지로 다양했지만 광장이 가까이 있어 산책 겸 하바롭스크의 젖줄이라 할 수 있는 아무르 강변으로 향했다. 세계에서 10번째 긴 강으로 길이는 4,500km에 육박한다. 무르는 순 우리말 미르(용)라고 하는데 중국에서는 선한 흑룡이 악한 백룡을 물리쳤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의 흑룡강이라 부르니 일리가 있다. 아무르 강변은 평온하고 조용했다. 지역 주민들이 산책 삼아 나오는 익숙한 강변, 시민들은 일광욕을 즐기는 곳이라 바다가 크게 부럽지 않아 보였다. 곳곳에 보이는 독특한 건물들, 초록색과 붉은색으로 단장된 건축물이 눈에 띄었다. 하얀 눈밭이 되면 건물이 더욱 아름다울 듯하였다.
꼼소믈 광장과 무명용사 참배 오벨리스크, 아무르 강변 서 시베리아의 야경을 바라보다 오른편에 우스펜스키 성당, 우리말로 성모승천 성당에 눈길이 갔다. 러시아 정교 성당이라 역시 교회 꼭대기에 있는 십자가의 모양이 유럽들과는 달랐다. 푸른빛의 돔 위에 금빛으로 빛나는 성당의 모습에 매료되었다.
붉은 벽돌과 흰색 기둥 위에 청색 지붕이 갖는 동화적 분위기를 보여주는 성당에는 슬픈 사연이 있다. 종교를 부정하던 소비에트 시절 성당이 부서졌고, 소련이 망하자 우수펜스키 성당은 다시 재건되어 아름다움을 되찾았다. 교회 정문 입구에는 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죄를 짓지 말라는 무언의 가르침을 주는 예수님 성화가 걸려있다. 파란색의 둥근 지붕을 붉은 벽돌로 받쳐주고 있는 독특한 아름다움이 있다.
강변을 따라 계단을 내려가면 길게 산책로가 나있다. 느긋한 마음으로 쭉 걸어가니 놀이공원이 나오고 길을 꺾어 위로 올라가니 전망대와 여러 박물관이 보였다. 1894년 설립된 극동지방에서 가장 오래된 향토박물관은 경치도 뛰어나다. 시간이 늦어 들어갈 수 없었는데 하바롭스크 지역의 역사와 민속, 자연사, 유물 등 볼거리가 많다. 이곳에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이 다녀갔다는 글귀가 한글로 쓰여있다. 휙 둘러보고 내일 다시 오려고 시가지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다음날, 오전에 경치가 아주 아름답고, 아무르 강변이 내려다보이는 전망대를 다시 찾아갔다. 아무르강 건너 중국 흑룡강성이 있다. 아무르강은 길이도 대단하지만, 강 폭이 굉장히 넓다. 강 폭이 좁은 곳에 차량이 원활하게 다닐 수 있는 대교를 건설했는데 유람선을 타면 가볼 수 있다.
아무르강을 내려다보는 언덕, 우쵸스 전망대 앞에 니콜라이 무라비요프 아무르스키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청나라와 교섭으로 연해주 지역을 러시아에 귀속시킨 인물이 자신감에 가득 찬 자세로 서있다. 그는 시베리아 철도를 처음 제안하고 극동 지역 러시아 영토확장에 공을 세운 인물이다. 러시아 국민들에게 인정받고 있으며, 5000 루블 지폐에 대교와 함께 등장하고 있다. 두 손은 팔짱을 끼고 다리 한쪽을 살짝 구부려 중국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지폐에 그대로 보였다.
하바롭스크는 우리나라의 독립운동가들이 아시아 최초로 사회주의 정당을 만든 곳이다. 위원장에는 1914년 이상설과 함께 대한광복군 정부를 세웠던 이동휘가 뽑혔으며, 실질적 창당의 주역은 볼셰비키 당원이 된 김 알렉산드라였다. 이 곳은 김 알렉산드리아의 근거지인 데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가 지나고 아무르강을 끼고 있어 교통이 편했으며, 만주나 연해주보다는 일제 밀정의 눈을 피하기도 용이했다.
김 알렉산드라 (1885~1918)는 우수리스크에서 출생, 블라디보스톡 사범대학에서 공부하고, 볼셰비키에 입당한 여성 혁명가다. 1918년 하바롭스크에서 극동인민위원회 외교위원장으로 임명, 러시아 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이동휘 석방운동을 전개했다. 4월에는 이동휘, 김립 등과 함께 ‘한인사회당’을 창립했다. 독립정신을 일깨우고 교과서 등을 펴내며 계몽과 교육에 힘썼다. 하바롭스크를 무대로 한 사회주의 독립운동사는 오래가지 못했다. 1918년 9월 반혁명군에 체포되어, 이곳 우초스전망대가 서있는 절벽에서 흰 천으로 눈을 가린 후 열세 걸음을 걷고, 아무르 강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그의 나이는 33세였다.
우리가 묵었던 호텔 근처 무라비예프 아무르스카야 22번지. 이른 아침에 걸어서 혼자 다녀왔다. 출근하는 사람들이 지나가는 붉은 벽돌 건물, 지금은 상가건물로 바뀌었고 사무실은 비어있지만 김 알렉산드라가 집무했던 건물이라는 표지판이 붙어있다. 1917~1918년 이 건물에서 볼셰비키 공산시위원회 정치부 위원, 하바롭스크시 소비에트 외부인민위원부 업무를 한 곳이었다. 러시아어로 설명과 함께 1918년 영웅적으로 최후를 마쳤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이 곳은 러시아 당국이 보호 건물로 지정한 상태이나 러시아어로만 쓰여있어 내용을 자세히 알 수 없었다. 한글로도 적혀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 정부도, 북한 정부도 이 곳을 기념하지 않고 연해주의 독립운동가들은 이렇게 잊혀 가고 있다는 이야기에 공감이 갔다. 혁명가이면서 일본의 총칼과 맞서 싸운 김 알렉산드라. 그녀의 이름이 제대로 새겨진 한글 동판 하나 걸릴 수 없는 것은 냉전의 후유증으로 봐야 하는가? 독립운동에 이념이 작용된 것은 참 아쉬운 측면이 많다. 김 알렉산드리아는 사회주의 운동가라는 이유로 오랫동안 제대로 조명받지 못하다가, 2009년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 됐다. 2020년은 광복 75주년 기념, 희생과 헌신으로 나라를 지켰던 항일 독립운동가는 300여 만 명 중 2019년 기준 독립유공자 포상받은 독립운동가는 1만 5825명, 이들 중 여성 독립운동가는 3%인 472명에 불과하다.
연해주를 중심으로 새 터전을 일군 카레이스키(고려인)들이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국경을 넘었고, 평생을 항일 무장 투쟁으로 살아온 홍범도 장군. 중국이나 연해주에서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을 하면서도 언제 가는 태어나 자란 조국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희망은 사라지고 있었다. 레닌의 친필 증명서와 함께 권총과 금화를 선물 받은 '봉오동 전투의 영웅' 홍범도 장군, 1943년 10월 25일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서 고려극장 수위로 쓸쓸하게 죽음을 맞았다.
새벽에 호텔에서 나와 레닌 광장에서 중앙시장 쪽 칼 마르크스 거리를 따라 걷다 보니, 고려인 2세 독립운동가 한국인 김유경 이름이 붙은 거리가 나왔다. 거리 표지판에 'Ким Ю Чена' 키릴 문자가 적혀있어 내력을 모르면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다. 1900년 가난한 농부의 딸로 태어난 고려인 2세 김유경은 스물한 살에 혁명군에 가담해 76 연대에서 소대급 지휘관을 맡았다. 1929년 10월 반혁명군과의 전투에서 그는 짧은 생을 마감했고, 이듬해 하바롭스크는 그를 기리기 위해 이 거리에 그의 이름을 붙였다. 도로에는 나무들이 쭉 늘어서 있고 거리는 생각보다 길게 이어졌다. 모스크바 혹은 페테스부르크에서 느낌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김유경 거리를 걷다 보니 하바롭스크 중앙 시장이 나왔지만, 이른 아침이라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만 보았다.
무라비요르 아무르스키 거리를 따라 쭉 내려가면 레닌광장으로 이어진다. 칼 마르크스 거리의 레닌 광장은 하바롭스크의 중심지로 트롤리버스 노선이 꼭 거쳐 가는 지점이다. 한때는 뜨거운 혁명의 기운이 가득했을 공간이, 지금은 시민들의 일상적인 공원이 되었다. 모자를 쓴 채로 한쪽 손으로 마이를 잡고 있는 레닌 동상은 생각보다 작고 아담했다.
도시가 설립될 당시 공동묘지가 위치해 있었던 이 곳에 최초의 광장이 설립되며 당시 군주의 이름을 따서 니콜라예브스키 광장이라고 불렸다. 이후 1917년 2월 혁명 후에는 자유 광장으로, 1925년에는 레닌광장으로, 1950년에는 광장에 아스팔트가 깔리면서 스탈린 광장으로, 1957년에는 다시 레닌 광장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레닌 동상은 당시에는 광장 중앙에 세웠으나 1998년 광장을 다시 조성하면서 붉은 벽돌의 은행 건물 앞으로 옮겨지면서 광장의 주인에서 밀려나 한편에 자리 잡게 되었다.
러시아 어느 곳에서도 만나는 인물이 레닌이다. 레닌은 1870년에 볼가 강변의 심비르스크에서 부친이 교사와 장학사를 지낸 교육 집안에서 6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본명이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였으나 필명으로 사용하던 레닌을 이름으로 사용했다. 레닌이 혁명가가 된 계기는 평소 잘 따르던 형이 황제 암살 계획에 관련, 발각되면서 처형된 형의 죽음이었다. 큰 충격을 받고 이때부터 반차르 운동, 혁명운동 등에 관심을 갖고 마르크스주의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레닌은 마르크스주의를 공부하면서 혁명 세력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학생 운동에 참여했다가 퇴학을 당하자 독학으로 법률을 공부해 페테르부르크 법과대학의 졸업 검정시험에 합격, 변호사로 일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에 의한 혁명을 주장했다.
1917년 1차 대전과 3월 혁명으로 러시아 왕조는 무너지고, 평화와 빵과 땅을 주장하는 레닌의 볼셰비키가 11월 혁명으로 임시 정부를 무너뜨리고 레닌은 새로운 정부 소비에트의 의장이 되었다. 볼셰비키파가 정권을 장악한 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소련)이 탄생되었고 초대 지도자가 레닌이었다.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이 무너지자 러시아 전역에서 그의 동상도 철수되었다. 그리고 독일 통일과 급변하는 사회변화 속에서 공산당 간부였던 어머니의 충격을 줄이기 위한 가족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굿바이 레닌이라는 영화가 떠올랐다. 2003년 영화인데 당시 공산주의 붕괴의 급작스런 사회 변화가 가져온 일상의 충격과 대체하는 가족의 사랑을 담은 영화였다. 독일 통일과 소련의 해체가 가져왔던 당시의 거대했던 사회 변혁이 떠올랐다.
몇 개 남지 않은 동상 중 하나로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 이어 두 번째 크기이다. 레닌의 동상을 보면서 사상과 정치의 위력과 함께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이 일던 어린 시절, 전쟁의 공포에 대한 기억이 있다.
소련 시절 정치적 광장은 이제 시민들의 공원이 되었다. 무소불위의 권력도 영원하지 않다. 당시의 어렵고 힘든 과정이 때로는 후손들에게 유산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역사의 변곡점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도로 안쪽의 넓은 광장은 예쁜 꽃들과 분수로 꾸며져 있었다. 이곳은 하바롭스크 주정부 청사가 광장에 자리하고 하바롭스크의 중심부였다. 백화점과 상가, 환전소 등이 몰려있어 여행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고, 겨울에는 얼음조각 공원으로 변한다고 한다. 주청사 앞 분수와 정원이 잘 가꿔져 있고 푸른 공원 따라 쭉 걸으니 예술극장으로 이어진다.
레닌 광장 뒤쪽에 디나모 공원이 굉장히 크게 자리 잡고 있다. 하바롭스크의 푸른 허파 같은 곳이었다. 여러 갈래 나눠진 산책길을 걸어보는데, 한가롭고 여유가 있었다. 시내 중심에 위치한 시민공원으로 산책로, 인공호수, 폭포, 아이스링크, 테니스 코트와 어린이 놀이시설 등이 잘 갖춰져 있었다. 아침나절에 다녀서 그런지 사람들이 별로 없었고, 목줄 없는 개들이 이리저리 다니고 있어서 근처 예술극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공원 도로변에 자리 잡은 하바롭스크 뮤지컬 극장이 보였고, 예술의 나라 러시아를 보여주고 있었다. 흑야의 긴긴 시간들 속에 탄생한 예술과 문학, 음악을 떠올려보았다.
광장을 쭉 둘러보다 점심을 먹기 위해 디나모 공원 안쪽에 위치한 호수를 찾아갔다. 근처 연못 주변에 자리 잡은 붉은 지붕과 팔각정처럼 생긴 식당에서 숯불에 구운 꼬치고기 요리 샤슬릭을 먹었다. 디나모 공원 사랑의 다리 부근에 자리 잡은 식당이었다. 예쁜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고 호수 주변을 산책했다. 레닌광장 뒤와 연결되어 있으며 칼 마르크스 거리와 푸시킨 거리에 면해 있다.
광장에서 강을 따라 남쪽으로 걸어서 20분이면 도착하는 곳. 슬라브 광장과 영원의 불꽃을 먼저 찾았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모스크바를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바친 무명용사를 기리기 위해 만든 묘이다. 묘비 앞에는 전통의상을 입은 의장병들이 교대식을 한다. 의장병들이 가만히 서있을 때는 옆에서 기념촬영이 가능하며, 교대식을 할 때는 신발 아래에 박힌 징이 '딱딱' 소리를 내며 요란한 폼으로 교대식이 거행된다.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32,662명의 이름이 검은 비석에 새겨져 있다. 근처에 2차 대전 참던 용사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을 두른 영원의 불꽃과 광장 속에서 김 씨 성을 가진 민족의 이름을 찾고 가슴이 뭉클해졌다. 낯선 이국에서 그들은 무엇을 위해 전쟁에 나가서 목숨을 잃었을까? 누군가 해준 대답은 다른 일을 할 것이 없어서라는 답변이 가슴을 쳤다. 연해주로 떠나온 사람들, 조국을 떠나 그들이 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프레오브라젠스키 구세주 성당은 2004년에 세워진 비잔틴 양식의 성당이다. 하얀색과 금색의 둥근 지붕이 어우러진 건축양식이 매우 아름답다. 러시아 정교회의 특징인 양파형의 돔이 황금색으로 빛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나름 위용이 넘치고 웅장한 면모를 갖추고 있다. 내부 벽면에 5층 구조로 마련된 이콘화가 성스럽다. 로마 카톨릭에 비해 성서의 기본에 충실하려던 러시아 정교회는 성당 안에 의자가 없다. 다만, 노약자를 위한 의자가 한편에 마련되어있을 뿐이다. 형식보다는 내용에 치중하겠다는 신암심이 느껴진다. 서서 예배보고, 노래하는 순박한 사람들이다.
하바롭스크 명예 광장에 위치하고 있으며 러시아에서 세 번째의 규모인 황금색 돔이 아름다운 성당이다. 명예 광장의 언덕에 자리 잡고 있어 이 성당은 콤소몰 광장에서도 볼 수 있다. 하바롭스크를 여행하는 사람은 꼭 찾는다는 명소이다.
유람선 선원이 러시아 순양함대처럼 해군 복장을 하고 있다. 바다처럼 넓은 아무르강에 유람선을 타고 나가 강 폭이 좁은 대교까지 갔다 돌아오는 코스이다. 유람선이 떠난 후 이 지역 주민들의 삶의 모습이 궁금해 슬슬 돌아다녔다. 근처 공원에서 그야말로 밍밍한 커피 한잔 마시고, 솔솔 부는 바람을 맞으며 벤치에 누워버렸다. 산들거리는 바람에 영혼을 맡기고 하늘을 바라보는 기분, 바람이 전해주는 힐링이다. 검박한 이곳 사람들의 일상 속에 잠시 머무른 느낌이랄까? 공원은 작고 소박했지만 편안함을 선사했다. 지역 주민들이 편하게 이용하는 곳으로 보였다.
하바롭스크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테마파크 같은 느낌의 휴양지 자임까를 찾아갔다. 안으로 들어가니 미니 골프장, 작은 놀이기구, 캠핑장 등이 있다. 겨울에는 겨울에는 스케이트장, 썰매장, 스키장이 개장한다고 하며, 음식점들도 있어서 시민들의 휴식처로 자리 잡고 있다. 레스토랑에는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풍선을 든 피에로가 다가와 사진을 찍기도 하고, 예쁜 정원에 앉아 강변을 바라보기도 했다. 자작나무 숲이 어우러진 휴양지 자임까에서, 유럽풍의 건물과 여유로운 일상의 휴식을 공감하며 산책하는 것도 좋았다.
하바롭스크 역에서 우리를 가이드해 주던 순박한 러시아 여성 마리아와 작별을 하고 다소 엄한 경비를 뚫고 역사 안으로 들어갔다. 100여 년 전 조선 독립을 염원했던 사람들, 그들의 이념이 달라도 독립을 향한 뜨거운 가슴을 마음에 새기며 하바롭스크와 작별을 했다. 하바롭스크가 잘 가라고 배웅이라도 하듯 무지개가 빛나고 있었다. 저녁 6시 30분, 블라디보스토크행 열차 객실에 올라탄 러시아 군인들을 비롯한 승객들은 부산하게 짐을 부리고 있었다. 열차가 움직이자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처음 타보는 감동을 누리고 있었다.
유럽 기차 쿠셋에서 잠자던 기억, 중국 장가계에서 북경까지 24시간 기차, 심양에서 침대차를 타던 기억이 있어 14시간 기차를 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승무원처럼 복장을 갖춘 여성 승무원은 비닐 포장 한 아름 안고 와서 침대칸 방마다 나누어 주었다. 요와 이불을 싸는 시트와 베갯잇, 수건이 비닐 안에 들어있다. 차창 양쪽으로 2층 침대가 마주 보고 있었고, 사이 작은 탁자가 있었다. 우리 일행 네 명은 한 객실에 모였고, 하바롭스크 역 마트에서 사 온 음식들로 저녁식사 후, 커피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무려 25년이 걸려 1916년에 완공된 시베리아 횡단철도 따라 발달한 90여 개의 도시 중 열차는 약 50개 역에 정차한다. 모스크바에서 종점 블라디보스톡까지 6박 7일 논스톱으로 운행하는데 비행기로 9시간 반이 걸리는 거리. 모스크바에서 아시아의 극동 블라디보스톡을 연결하는 그 총길이는 자그마치 9,288km이다.
세계에서 가장 긴 철도인 시베리아 횡단 열차, 덜컹거리는 열차를 타고, 끝없이 이어지는 자작나무 숲, 황량한 대지 위에 빛나는 태양과 해가 진 뒤 어둠 속에서 푸르게 빛나던 밤하늘을 보았다. 하바롭스크 역에서 14시간 달려 아침 8시경 도착한 블라디보스토크 역. 약 767km 거리를 달리며, 창밖에 별이 쏟아지던 시베리아의 밤하늘이 아직도 생생하다. 별이 이렇게 우리들 가까이 있었던가?
드디어 극동 연안의 최대 항구도시 겸 군항 블라디보스톡 역에 도착, 블라디보스토크란 ‘동방을 지배하라’라는 뜻이다. 17세기 화려한 러시아 양식의 블라디보스톡 역사는 모스크바 야로슬라블 역과 닮았고, 박물관 건물처럼 생겼다.
플랫폼에 내리니 단일 노선으로는 최장 거리인 시베리아 횡단 열차의 종착지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기념비가 시베리아 횡단 열차가 서 있다. 시베리아 횡단철도 종점 기념비에는 왕가의 문양인 듯한 머리 둘 달린 독수리 모양의 조각이 위에 달린 모양이었다. 이 기념비는 모스크바 야로슬라블 역에서 블라디보스톡까지 연결된 구간 9,288km를 표시해 놓은 것으로 반대편 야로슬라블라역에는 0km라 적힌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이 곳은 이준 열사와 안중근 의사가 거쳐간 곳이며, 연해주 항일 투사들이 이용하였던 역이며, 홍범도 장군을 비롯 한인 강제이주로 인한 눈물이 어려있는 곳이다. 뭔가 찡하면서도 아픈 역사의 현장에 서 있었다.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기차역으로 엘리베이터, 에스컬레이터가 없어서 짐을 가지고 이동하는데 다소 불편했다.
포크롭스키 공원에 위치한 포크롭스키 성당을 맨 처음 찾아갔다. 블라디보스톡의 대표적인 러시아 정교회 성당으로서 20세기 초 마을 묘지에 건립되었으나 1935년 파괴되었다가 2007년 재건축되었다. 시민 모금을 통해 새롭게 완성된 성당으로 파란 빛깔의 돔이 화려한 느낌이었다. 역시 러시아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건축 양식과 이콘화가 중앙에 자리 잡고 있다. 조명을 받고 있는 이콘화의 모습에 더욱 신성한 느낌이 들었다. 이슬람처럼 엄숙한 종교문화는 이곳도 역시 마찬가지, 종교는 삶의 일부이다. 성당 내부로 들어갈 때는 모자를 벗고, 여성은 입구에 마련돼 있는 머플러를 둘러야 한다. 경건함을 유지해야 하는 곳으로 모두의 공간이라는 것을 전해준다.
러시아 혁명 정부가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광장에는 그 당시 전사들의 동상이 곳곳에 있다. 러시아 혁명을 위해 목숨 바쳤던 병사들의 추모탑도 위치해 있어 혁명 광장으로도 불린다. 하지만, 이 곳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가슴 아픈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1937년 블라디보스톡 고려인들을 강제 이주시키려고 집합시켰던 곳이다. 독립을 위해, 일제를 피해 연해주로 갔던 우리 민족은 얼마나 황당하고 막막했을까? 한 달 이상을 기차에 실려, 항의하다가 형벌을 받기도 하고, 아파서 죽기도 하던 그들의 손에 꼭 쥐어진 것은 볍씨. 건조한 중앙아시아를 벼농사 지역으로 바꾸어버린 조선인들. 오늘의 대한민국은 그 이름 없는 사람들, 무명인들의 끈기와 적응의 흔적으로 만들어졌다.
현재는 시가 주최하는 시행사가 개최되고, 재래시장이 열리는 시민들의 모임 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이곳의 특산품은 꿀이라고 해서 작은 밤꿀을 하나 샀다. 차가버섯도 품질이 좋다고 했고 과일도 싸게 살 수 있었다. 혁명광장 옆에는 연해주청사 건물을 볼 수 있으며 중요 국경일 행사가 개최되는 광장으로, 시민들의 휴식처 역할도 톡톡히 한다. 광장 한편에 온통 황금색의 러시아 정교회를 짓고 있었다. 아마 완성되면 이 지역에서 가장 규모가 큰 정교회 사원이 될 것으로 보인다.
블라디보스톡 개선문은 시가지로 이어지는 관문 역할을 하고, 개선문 너머의 도로가 이어지고 있다. 러시아 황제였던 니콜라이 2세는 황실 전통에 따라 왕위를 계승하기 전에 여러 도시를 방문했다. 블라디보스톡부터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많은 도시를 여행했고 거쳐간 모든 도시에 비슷한 모양의 개선문을 세웠다. 블라디보스톡 개선문은 1891년에 세워진 것으로 규모는 작지만 화려한 색과 장식이 인상적이다. 개선문은 과거 소련 정부에 의해 철거되었다가 지난 2003년 복원되었다. 알록달록 아름다운 외관의 개선문 앞면에는 니콜라이 2세의 얼굴이, 뒷면에는 블라디보스토크의 상징인 호랑이가 조각돼 있다. 화려한 색감과 장방형의 독특한 디자인은 매우 멋스러운 공간을 연출했다.
개선문에서 바다 쪽을 향한 계단 아래에 잠수함 박물관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역사의 증거와 현장이 그대로 남아 있는 전설적인 잠수함 C-56호를 개조하여 박물관으로 만든 곳이다. 강한 지뢰와 대포를 보유한 빠른 속도의 잠수함은 미국 국가 안보국조차 실체를 알지 못했다고 한다. 선내를 개방하고 당시 승무원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으로 그 영광을 전하고 있다. 선실과 기관실, 조타실 등 잠수함 내부를 둘러볼 수 있으며, 관련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잠수한 박물관 옆에는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용사들을 기리는 '꺼지지 않는 불꽃’ 이 위치해 있다. 옆 쪽에는 작고 예쁜 사원이 바다를 향해 자리 잡고 있다. 십자가의 모양은 유럽 가톨릭 성당과는 다른 모양을 하고 있다. 금색 판으로 덮인 성당의 지붕이 나름 멋을 부린 모양새다.
무명용사 참전비, 블라디보스톡에서 영원의 불꽃과 함께 세운 참전비로 1941년 제2차 세계대전에 참가했다가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용사들을 기리고 있다. 참전비에는 당시 목숨을 잃은 군인들의 이름을 새겨놓았는데 그중 김 씨 성을 가진 고려인의 이름을 비롯하여 당시 희생되었던 군인들의 이름이 모두 기재되어 있다. 일반 병사들은 위쪽에 적혀 있고 장교들은 아래쪽에 적혀 있다.
루스키 섬은 2012년 APEC 개최 시 완공한 사장교로 블라디보스토크 시내와 섬을 잇는 루스키 대교가 완성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는 곳이다. 루스키라는 섬의 이름은 동시베리아를 통치한 니콜라이로 아무르스키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이 섬은 소련 시절에는 군사기지가 있었던 곳이며, 섬이라 보안문제이 수월하므로 북러 정상회담 때 북한 김정은 위원장이 빌딩 스포츠센터에서 회의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은 안개가 자주 끼는 곳이다. 우리가 찾아간 날도 7월이라 습하게 안개가 자욱했다. 안개를 뚫고 다리를 건너 블라디보스톡 최대 규모의 대학, 극동연방대학교 캠퍼스를 찾아갔다. 규모가 크고 대단위로 구성된 학교로 우리나라 유학생도 제법 있다. 남쪽에 자리 잡고 있는 따비지니 곶은 모양이 한반도 북한의 지도와 비슷하다고 해서 "북한 섬"이라는 별칭도 있다.
블라디보스톡의 시내에서 남쪽으로 15분 정도 떨어진 땅 끝 토카랩스키 만에 작고 낡은 등대가 하나 있다. 토카랩스키 등대인데 러시아어로 '등대'는 '마약(маяк)'이라고 발음되기 때문에 우리나라에 마약 등대로 알려져 있다. 평소에는 바닷속에 잠겨있다가 썰물이 되어야 길이 생겨 등대로 갈 수 있었다.
양쪽으로 바다를 끼고 등대까지 걸어 들어가 보니 빨간 머리를 하고 있는 오래된 등대가 반겨주었다. 이 곳은 특히 연인들이 많이 찾는데, 등대가 두 사람의 앞날을 환하게 비춰준다는 이야기 때문이다. 특히, 루스키 대교를 바라보는 전망이 좋고 일출 장소로 유명한 곳이다 보니 흐린 날씨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1860년대부터 연해 지방으로 이주해 온 한인들이 모여 살며 형성된 마을이 개척리. 1911년 후반 콜레라가 발생 등의 이유로 강제 철거되고, 새롭게 형성된 곳이 신한촌이었다. 신한촌은 일제 강점기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거주했던 지역으로 독립운동의 중추기지 역할을 한 곳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역임한 이동휘 선생의 집, 독립만세를 기린 독, 한민학교 등 다양한 흔적이 있지만 현재 아파트 단지로 변해있다.
1920년 3월 12일 조선인 항일 세력이 가담한 소련군의 공격으로 일본 군대가 후퇴당하고 일본 민간인과 러시아 주민까지 대량 학살된 사건에 분개한 일본군이 4월 5일에 조선인 마을인 신한촌을 습격하여 조선인 민간인을 학살하였다. 이후 1937년 스탈린의 강제 이주 정책으로 인해 한인들은 중앙아시아 일대로 강제 이주당하였고, 신한촌은 해체되었다.
3.1 독립 선언 80주년을 맞아 1999년 8월, 신한촌 일대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선열들의 숭고한 넋을 기리고, 고려인들의 마음의 상처를 위로하기 위한 신한촌 항일운동 기념탑을 세웠다. 기념탑은 남한과 북한, 그리고 러시아 거주 고려인을 의미하는 세 개의 길고 큰 비석이 중앙에 세워져 있고, 그 주위로 조선 8도를 상징하는 8개의 작은 돌비석이 에워싼 형태였다.
독립운동가 최재형은 1860년, 함경도 경원에서 노비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우여곡절을 겪고 러시아 선장 부부의 후원을 받아 세계를 돌며 무역을 배웠고 풍부한 학식과 폭넓은 사고를 가진 지식인으로 성장했다. 17살에 블라디보스톡으로 돌아온 최재형은 유창한 러시아어로 한인 노동자들의 부당한 대우를 시정해주고 도로공사, 군수업 등에 부를 쌓는데 특별히 조선인들을 직원으로 고용해 조선인들은 자력으로 돈을 벌 수 있게 했다.
최재형은 한인들의 교육에도 힘을 쏟아 한인 마을의 정교회 학교를 32개나 세웠다. 조선인들은 그를 페치카(따뜻한 난로)라고 불렀다. 러일전쟁에 참여한 최재형은 일본의 야욕을 간파하고 항일운동에 뜻을 두었다. 1907년 이후 안중근을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자신의 재산 대부분을 항일투쟁을 위해 의병들의 총기 구입 등 무장을 도왔고, 안중근이 1910년 일본 법정의 불법 재판 끝에 순국하자, 안중근의 가족을 보호했다.
최재형은 1920년 러시아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우수리스크에 있던 연해주에 침입한 일본군에 의해 총살당했다. 그가 살던 유럽풍 벽돌집은 러시아인에게 넘어갔었는데 2014년 러시아 한인 이주 150주년을 기념하여 10억 원에 매입했다. 이후 <최재형 기념관>으로 리모델링해서 2019년 3월 28일에 개관했다.
최재형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지식인이라고 생각했다. 전재산을 바쳐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안중군 의사의 가족을 돌보고, 독립 무장을 지원한 그의 모습에서 영화 쉰들러 리스트, 드라마 미스타 선샤인 등을 떠올렸다.
금각교와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 독수리 전망대를 찾았다. 시내에서는 가장 높은 곳 블라디보스톡 전망을 감상하기 딱 좋은 곳이다. 214m 전망대에는 러시아와 일부 슬라브 국가에서 사용되는 키릴 문자를 만든 키릴 형제 동상도 서 있다. 어두운 빛으로 서 있는 두 형제의 조각상을 바라보며, 프런티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2012년에 세워진 금각만 대교는 블라디보스토고 대교라고도 하는데 APEC 행사를 준비하면서 급하게 지어졌다. 현지 사람들의 반응은 썩 좋은 편이 아니라지만 육지와 루스키섬을 연결해주는 블라디보스톡의 랜드마크로 인정받고 있다. 걸어서 혹은 자전거로 건널 수 있으며, 특히 저녁이 되면 화려한 조명이 들어와 멋진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독수리 전 방대에서 내려오는 길에 수하노바의 집을 들렀다. 1895년부터 1921년까지 이 집에는 연해주 지역 수석 관리인 수하노바의 가족들이 살았다고 한다. 19-20세기 가정집으로 당시 사용했던 가정용품들과 가구들을 볼 수 있었다. 블라디보스톡에 얼마 남지 않은 19세기 목조 주택으로, 1977년 주민들이 주도해서 박물관을 개관했다고 한다.
신발에 커버를 씌워주고 입장, 커다란 턴테이블, LP 플레이어, 테이블과 피아노가 눈에 들어왔다. 특히 피아노 위에 이 집에 살던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영어 번역본으로 쓰여 있었다. 가족들이 모여서 밥을 먹었던 식당에는 어떤 음식들을 먹었는지 모형과 함께 일러스트가 놓여있다. 특히 편지들과 예쁘게 놓인 수예작품이 마음에 들었다.
바다로 길게 이어지는 해양공원은 여행자 거리라 하며 과거 태평양을 지배한 포키나제독의 거리이기도 하다. 블라디보스톡 시내와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이곳에 멋진 레스토랑, 독특한 카페 등이 밀집해 있어 가족, 친구, 연인들이 많이 찾는다. 아담한 규모이지만 놀이공원, 분수대, 야외 공연장 등이 갖춰져 있다. 아르바트 거리와 이어지는 해안 산책로. 여름에는 해수욕을 즐기는 사람들을 봤는데 이곳에서 겨울에 꽁꽁 얼어붙은 바다를 볼 수 있다고 한다.
아르바트 거리는 모스크바에 있는 아르바트 거리를 본떠 만든 거리이다. 15년 전 모스크바에서 빅토르 최의 벽화를 보고 꽃을 올려놓았던 기억이 있다. 블라디보스톡 아르바트 거리에서는 우리나라의 국력을 느낄 수 있었다. Admirala Fokina Street가 있는데 우리 기업 KT에서 조성해준 거리로 KT 거리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모스크바에서는 크렘린 궁 앞의 다리에 LG 광고 깃발을 쭉 달아놓고 통째로 LG대교라고 불렀었다. 기업의 의리를 중시 여기는 러시아인들의 자세를 또 한 번 느꼈다. 앉을 수 있는 벤치와 분수대가 마련되어 있다. 건물 사이사이에 낙서와 카페, 모임공간이 있어 아티스트들의 흔적을 찾아 돌아다니며 영감을 얻는 '예술의 거리'로도 활성화되어 있다
블라디보스톡 여행에서 실컷 먹었던 킹크랩과 바닷가재를 잊을 수 없다. 킹크랩이 1kg에 1900 루블! 한국 돈으로 3만 원이 조금 넘었다. 킹크랩이 수조 속에서 꺼내 요리를 해주었던 식당은 오마이크랩. 실컷 먹었는데 9월이 축제기간이라고 하니 다음에 다시 와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