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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경희 Jan 11. 2021

중국 속 우리 역사를 찾아

중국2-고구려의 숨결을 찾아 나선 3,000㎞ 대장정

인천시교육청에서 역사교사들을 대상으로 중국 속의 우리 역사문화 탐방 연수 진행되었다. 몇 년 전 역사교사 25명을 인솔하고 참가한 만주지역 탐방은 중국 동북 3성에 산재한 고구려, 발해 및 항일 독립투쟁 유적지 답사를 중심으로 실시되었다. 우리 민족사에 대한 정체성 확립과 역사교사의 전문성 증진 및 역사 교수·학습 자료 발굴 등을 위해  참가한 선생님들은 일본의 역사왜곡도 문제이지만, 중국의 동북공정이 우리 고대사의 뿌리 자체를 바꾸어 버린다는 점에서 더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선생님들은 연수를 통해 얻은 체험을 바탕으로 교실에서 보다 생생한 역사 수업을 진행하고자 했다. 여러 이유로 역사탐방 사업은 중단되었다 2018년부터 다시 추진되었다. 역사 관련 진로를 꿈꾸는 학생들과 역사 교사들이 공동으로 참여하고 사전 토론과 협의, 환류하는 기회도 생겼다. 한자와 불교, 유교 등 동아시아 국가들의 특성을 이해하고 동아시아 시민교육은 세계 시민교육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중국 속 우리 문화 찾기 3,000km


 주요 탐방지는 발해의 전성기 시절 도읍인 상경성, 고구려 도읍인 환인과 집안 일대의 산성과 고분군, 광개토대왕비와 장군총, 그리고 항일 독립운동 유적지인 북간도(용정 일원) 지역, 안중근 의사를 비롯한 신채호, 이회영 선생이 순국한 여순 감옥 등이었다. 최근에는 상해 임시정부와 난징 지역까지 공간을 확대하여 진행하고 있다.



 대내외적으로 여러 어려운 상황이 극복된다면 학생들에게 3천 km의 쉽지 않은 여정을 경험하고, 고대 역사의 현장을 탐구하는 기회를 제공하면 좋겠다. 2018년부터 시작된 학생 교사 독립운동 지역 탐방 프로그램이 인기리에 진행되었지만 올해는 코로나로 인하여 취소되어 아쉽다.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에 감동받고, 고구려와 발해의 유적에 감탄하며, 공정하고 정의로운 새로운 역사의 길을 열어가는 인식을 심어주려면 더욱  현장체험 교육이 필요하다.

       

인천공항에서 2시간 30분 정도 비행하면 도착하는 곳이 흑룡강성 평원지대에 자리한 목단강 하이랑 국제공항에 도착하니 타임머신 타고 60년대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목단강부터 시작하여 환인, 연길, 도문, 백두산, 통화, 집안, 단동 등  남서 방향으로 달려 대련까지 이어지는 3,000km, 7일 동안 하루 평균 6시간 이동하는 상당히 고된 만주 속 한민족 역사 로드였다.     


목단강 하이랑 국제공항


 이동하는 동안 버스 안에서 선생님들은 다음 목적지에 대한 주제 발표가 진행되고, 의견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모두들 열심히 참여하였다. 스마트한 조선족 젊은 가이드도 해박한 역사 지식과 현실 균형감각을 갖고 이동 버스에서 주제 발표하시는 선생님들의 자료를 열심히 듣고 메모하고 있었다.     



목단강 조선족 민속거리


현재 중국의 조선족은 대부분 동북 3성(길림성, 흑룡강성, 요녕성)에 거주하고 있다. 길림성에 120만 명, 흑룡강성에 45만 명, 요녕성(성도인 선양 포함)에 25만 명, 내몽골 자치구 약 2천 명 등이 거주하고 있다.      

그러나, 한중 국교 수교 이후 취업, 결혼 등의 이유로  이 곳의 조선인들이 동북 3성을 떠나 대도시 혹은 한국으로 이동하여 거주 지역이 공동화 현상이 일어나고 있으며 그 자리를 한족들이 메우고 있다. 연변 조선족이 80만 명이라고 하지만 그건 등록 상일뿐 실제로 거주하는 조선족은 20만 명도 채 안될 것이라고 했다. 2011년 기준, 약 50만 명의 조선족이 한국에 살고 있고, 한국으로 귀화한 사람은 2만 6천650명이나 된다고 한다.      


 목단강 영안시는 청나라 때 귀양 가면 돌아올 수 없는 절망적인 유배지로 알려진 영고탑 지역이다. 하지만 만주어로 구부러진 강이라는 뜻을 가진 목단강의 풍경과 넓고 푸른 들판, 건강한 바람, 산뜻한 하늘이 느껴지는 시골마을 풍경이었다.

 흑룡강성의 동남부에 위치한 목단강은 대 러시아 무역의 교두보 역할을 하며 경박호와 팔녀투강비, 조선족 거리, 발해 유적지 등의 명소가 있다. 경박호는 110km 떨어져 있어 일정에 무리가 있어 발해 유적 위주로 다니기로 했다.      


목단 강변 팔녀투강비


 목단강시 빈강 공원에 있는 ‘8녀투강기념비. 1938년 10월 10일 동북 항일 여성 유격 부대원 중 8명이 일본군의 포위 속에 고립되었다. 13세 어린 대원을 포함, 그들은 마지막까지 일본군에 저항하다가 생포되어, 굴욕을 피하려고 목단강의 지류인 우수훈 강에 몸을 던져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 그 후 이들의 이야기는 영화, 연극, 동화책 등으로 각색되어 중국 전역에 항일전쟁의 전형적 사례로 알려지게 되었다.      

1986년 9월 목단강시는 8녀들의 항일 정신을 기리기 위해 빈강 공원 광장에 팔녀투강기념비를 건립했다. 이들 중에 조선족 열사인 이봉선과 안순복이 포함되어 있다. 안순복은 사실상 8녀의 지도적 위치에 있었다. 8녀들의 강인함과 두려움 없는 정신력에 경의를 표했다.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는 지금도 여전히 일상 속에서 용기를 갖고 생명을 지키려 맞서는 그분들께 감사하다.       


발해국 상경 용천부


드디어 흑룡강성 령안시 동경성 발해촌, 발해 행정구역 5경의 하나로 발해 멸망 전까지 수도였던 상경용천부를 찾아갔다. 발해는 우리 역사의 일부분이지만 그 터전을 접하지 못해 관념 속에서 느낌으로 대했는데 직접 그 현장을 찾아왔다. 처음부터 완전 고급 답사 수준이다. 주춧돌 몇 개 있고, 터만 남은 땅에서 발해의 생활상이나 정치 경제 등을 상상해야 했다.      

발해는 서기 668년 고구려의 장수였던 대조영이 고구려의 유민과 말갈족을 흡수해 세운 나라다. 지배층은 고구려인이었다. 문왕 때 발해에서 신라로 가는 육로를 뚫어 신라도가 생겼고, 선왕 때 발해의 영토를 최대로 넓혔다. 926년 패망할 때까지 중국에선 발해를 바다 동쪽에서 번성한 나라라 해서 ‘해동성국’이라고 불렀다.          


상경용천부 입구


입구에서 걸어 들어가니 3~4km 규모의 직사각형 토성에 둘러싸인 외성 안에 돌로 된 내성은 궁성과 황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중심부 내성의 남북 길이가 약 1.4km, 폭은 1.1km이다. 황성 남문 대로는 남북 길이 2,195m, 폭은 110m 규모로 당나라 장안성 도로명을 따서 "주작대로"라 부르기도 했다. 궁성 안의 주요 건물은 이 도로를 따라 늘어서 있다. 현재 성벽과 궁터, 주춧돌, 집터 등의 흔적만 남았지만 해동성국의 웅장함을 느끼기엔 충분했다. 궁성 남문의 지대석과 66개의 원형 주춧돌이 놓여있었고, 북쪽으로 5개의 궁전과 회랑이 이어진 방대한 규모를 갖추었다. 이곳에서 살 수 있는 인구는 내외 성의 크기와 지역 등을 고려하여 80만에서 120만 명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발해 박물관 사진 자료


상경성 인근에 아주 작은 자료전시관이 있어 들어갔다. 복원모형도, 녹색 유약을 바른 치미 사진과 와편들, 당 장안성과의 비교도 등... 전시관은 작고 허름하다. 진짜 유물, 좋은 유물은 없었다. 도자기와 불상 등의 문화재를 전시한 발해 박물관은 낮인데도 어두컴컴하고 조명시설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으며 안내원도 없이 사실상 방치된 실정이었다.     

 중국 정부는 발해 유적을 중국 당나라 시대 한 지방정부였다는 취지로 복원사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모든 관광 안내물도 같은 취지로 만들어져 있다. 발해국 상경 용천부 유적 안내서에 발해국은 북방의 말갈족이 건립한 지방민족 정권으로 규정할 정도다. 한민족의 자랑스러운 역사가 자칫 중국의 것으로 치부될 위기에 처했다. 바로, 동북공정 두려운 역사 현장이었다.  

           

흥룡사 석등탑


약 1,300여 년의 역사를 가진 흥룡사는 목조건물로 관우상도 있었다. 오랜 세월을 견뎌 온 빛바랜 단청이 세월의 흔적을 담고 있었다. 흥룡사에서 만난 높이가 6m나 되는 용암제의 석등탑은 발해 문화의 걸출한 대표작이다. 탑살과 상륜, 탑개, 탑실, 연화탁, 탑기좌 등 12개의 현무함으로 되어있으며 정교하면서도 웅장했다. 두 마리의 사자 석상이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목단강 해림시 산시진은 북만주 지역 독립운동단체의 본산이었다. 1929년 김좌진 장군은 산시의 한 정미소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총탄을 맞고 순국했다. 2005년 해림시와 한국의 김좌진장군기념사업회가 공동으로 한중 우의공원을 건립했다. 항일 독립운동가들의 활약상과 우의를 위해 조성된 기념관에 청산리·봉오동전투 관련 사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두만강은 길이 521㎞,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 긴 강이다. 조선말에는 의병운동을 하던 애국지사들이 두만강을 건너 청나라와 러시아에서 항일 투쟁을 계속하였다. 1910년 이후에는 일본의 식민지 통치를 반대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두만강을 건너 만주와 연해주로 들어가 조직적인 독립투쟁을 전개하고, 학교를 세워 후세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도문 조중 변경 표지


두만강에 위치한 도문은 중국과 북한을 연결하는 변방의 작은 도시이다. 우리 민족에게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의 눈물 젖은 두만강이다. 하지만 현장에는 대중가요 가사에 등장하는 두만강 푸른 물은 없었다. 강 폭은 좁았고, 강물은 많지 않았으며, 마음만 먹으면 밤에 몰래 넘어갈 수 있을 듯했다. 이곳은 중국과 수교가 이루어진 직후 1993년부터 세 번째 방문이었지만, 여전히 색다른 느낌이 들었다. 최근 동남지역의 성장이 한계에 이른 중국이 내륙지역과 동북지역 등으로 개발을 확대하고, 북한, 러시아, 몽골 등과의 연계 개발 등 전략적 지역으로 발전시키려는 곳이기도 하다.     

   

북한 남양과 중국 도문을 연결하는 두만강 다리, 차 두 대가 겨우 교차할 수 있는 정도이다. 다리 안으로 들어가면 ‘조중 변계선(朝中邊界線)’이라고 한글과 중국어로 쓰여 있고 선이 그어져 있는데 바로 국경이다. 그 선을 넘으면 북한 땅이다. 붉은색까지가 중국 땅이고 청색은 북한 영역이다.

두만강의 강폭이 좁고 깊지 않아 보여 더욱 가깝게 북한지역을 볼 수는 있었으나, 중국 공안의 통제로 강 건너 북한 초소나 병사를 찍는 것은 여전히 조심했다. 수수료를 받는 장소가 정해져 있어 사진 촬영도 어려움이 있다. 당시, 북한과 연결된 다리는 중간 이상 갈 수 없었다. 교각 통로와 꼭대기에는 기념품을 파는 상인들이 있었는데 북한 돈을  팔았다.   

 

두만강 유람선


수량은 많지 않았지만 선착장에서 유람선을 탔다. 두만강에서 북한 쪽 가까이 다가갈 수 있어서 나름 좋았다. 유람선 안에서 가이드가 마련한 북한산 단고기를 된장에 찍어먹기도 했다. 이 곳에서는 북한 음식이 인기가 좋다고 하였다. 강 건너편 남양 쪽은 조용하고 사람들의 움직임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북한 쪽 강기슭에 배가 가까이 가면 비탈진 강변에서 열매를 채집하는 사람들이 보이기도 했다. 군인들은 국경 부근에 말을 타고 순찰을 돌기도 하였다. 산들이 대부분 개간되어 있어 나무가 보이지 않았다. 밭두렁이나 다랑이에 4, 5명 정도 언뜻 보일 뿐 사람들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별 달린 봉오동 반일 전적지


 도문 근처 12km 거리에 봉오동 전투 전적지가 있다. 가는 길에 펼쳐진  옥수수밭, 완만한 능선 사이 간간이 마을이 보였고, 도문 시 봉오동 저수지가 나타난다. 입장료를 내고 안으로 5분 들어가면 백양나무가 심어져 있고 왼편 산기슭에 ‘봉오동 반일 전적지’라고 이름 붙은 기념비가 있다.   


 구석의 작은 전적비와 달리 2012년 새로 세운 전적비는 중앙에 큰 별을 달고 있다. 봉오동 전적비에는 1920년 6월 7일 반일 명장 홍범도를 사령으로, 일군 19사단 남양 경비대와 싸워 반일무장투쟁의 첫 봉화를 올려 일본 침략자의 기운을 여지없이 꺾어 놓았고 인민대중의 반일 투지를 크게 북돋아주었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홍범도 장군이 우리나라에서 저평가된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소련으로 건너갔으며, 후에 사회주의자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은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홍범도 장군의 업적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연길시 전경
연길시 거리의 간판


 연변 조선족 자치주 중심도시 연길에 도착했다. 이 지역 인구는 217만 9천 명이었으나 최근 저출산과 고령화, 타 지역으로의 인구 유출로 인구가 급격하게 감소하고 있다. 80만 명의 재중동포가 거주하는 중국 최대의 조선족 거주 지역이다. 조선족 인구 비율은 36.7%로 아주 높으며, 과거에는 소득 수준이 상위권이었지만 공업이 발달하지 않아 지금은 1인당 GDP는 중국 평균(8,068) 보다 낮은 수준이다.     

북쪽에 위치하여 겨울은 몹시 추운 편이다. 연길의 1월 평균기온은 -13.6℃이며, 7월 평균기온은 21.5℃이다. 한반도에서 비가 오는 날에는 여기도 십중팔구 비가 오고, 한반도에 한파가 몰려오는 기간에는 여기도 추위에 시달린다.


과거 북간도라고 불리던 연변은 19세기 이래 조선인들이 가장 많이 이주한 지역이기도 하며 현재 역시 조선족의 주요 집거지이다. 약 150년의 이주, 정착의 역사를 거쳐 오면서 조선족은 수많은 삶의 자취를 남겼는데 한글이 대표적인 증거이다.

연변 자치주 거리 곳곳에 한글을 위에 쓰고 아래에 중국어를 병기한 경우나 좌우로 한국어와 중국어를 병기해 놓은 곳이 많은데, 간판에 한국어를 써넣지 않으면 가게 허가가 나지 않는다고 한다. 한국 매체를 손쉽게 접할 수 있고, 최근 노래나 음식도 쉽게 맛볼 수 있다. 이곳은 북한 조선족이 많이 거주하여 북한 입장에서는 매우 중요한 창구이기도 하다.  

    

연길시 곰 사육장


연변 호텔에 짐을 풀고, 슬슬 산책을 나갔다. 시원하게 뻗은 미인송들을 보았는데 정말 늘씬했다. 연길 서시장에 가서 뱀구이, 수공에 품, 작은 액세서리, 풍로에 구운 꼬치구이 등등 구경했다. 예전에  흙과 도로가 엉켰던 거리들은 깔끔하게 단장되었다. 잠깐 북한 수예품 판매점을 다녀왔는데 섬세한 표현에 놀랍지만 작품의 디자인은  멋있었다. 북한 작가의 그림전시도 봤는데 원색적이고 호전적인 작품에서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음식은 옛날 시골 음식처럼 순박했고 담백했다. 우리나라 옛날 시골 마을을 찾아간 기분이었다.

연길 곰 사육장을 돌아보았다. 이곳에만 1800마리의 반달곰이 있다고 했다. 곰 사육과 관련된 설명, 그리고 곰쓸개, 웅담을 채취하는 과정 등에 대해 설명을 듣고 일행 중 몇 사람이 웅담을 구입했다. 곰은 크고 무서운 줄 알았는데 사육장의 곰은 작고 가엾게 느껴졌다. 그리고, 연길에서 용정으로 이동하는데 끝없는 들판은 옥수수밭과 콩밭으로 이어져있었다. 물론 사과배나무 과수원도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용두레 우물 자리


살길을 찾아 두만강을 건너온 조선의 농민들이 발견한 우물이다. 여진족이 남기고 간 우물을 한족 청년이 발견해 용두레를 달아 이용하였다. 이 동네는 용두레 촌이라 불리기 시작했고, ‘용정’의 유래가 되었으며, 조선족의 뿌리가 되기 시작한 장소이다.

60년 대, 중국의 문화 혁명 시기, 용두레 기념비석은 홍위병들의 손에 산산이 부서져 자취를 감추었고 우물도 메워져 버렸으나 1989년 용정 인민정부에서 애국과 향토애 교육의 차원에서 용두레 우물 비석을 복원했다. 동네 한쪽에 위치하고 있어 그냥 지나칠 뻔했다. 선구자 노래 가사 속 용두레 우물가는      


한줄기 해란강


 용정 시가지를 흐르는 강이 바로 선구자에 나오는 해란강이다. 옛날, 강변에 '해'와 '란'이라는 조선인 오누이가 살았는데 두만강 건너 외가에서 볍씨를 가져와 어른들에게 심게 했다. 그 뒤 강변은 논으로 개척되었는데 어느 해 가뭄이 들자 오누이가 산기슭을 헤쳐 샘물을 찾아내고 물길을 내니 그것이 강이 되었고 그래서 해란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조선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면서 항일 운동을 펼치자 일제에 의해 해란강 대학살 사건이 있기도 했다. 일송정과 해란강이 우리에게 익숙하고, 유명한 이유는 윤해영 작사, 조두남 작곡의 "선구자"에 나오는 곳이기 때문이다.


용정 비암산에서 시가지
일송정


용정에서 연길 가는 곳에 나지막한 비암산이 있는데, 정상에 작은 정자가 바로 일송정이다. 원래 정자처럼 생겼고, 돌바위에서 솟아난 소나무라 신성하게 여겼는데 일본 경찰들이 총을 쏘고 구멍을 뚫어 소나무가 죽었다고 한다. 조선인의 기상을 짓누른 행위였을 것이다. 이후 여러 해프닝을 거쳐 용정의 한인들이 노력해서 나중에 다시 ‘일송정’ 기념비를 세우게 되었다는 것이다. 해란강이 유유히 흐르는 모습을 보며 나라를 떠나와 외로운 싸움을 했던 이름 모를 우리의 선조들의 외로움과 강인함을 느낄 수 있다.      

일제 치하 조선에서 온 악단들에 의해 1960년 이후 우리나라에서, 1990년대 한중 수교 후에 이 노래가 다시 용정으로 건너와, 널리 불리게 되었다는 ‘선구자’ 노래도 사실은 ‘용정의 노래’라고 한다.


일제 강점기 모진 탄압 속에서도 역사의 물줄기를 이어가는 한민족의 집념과 끈기를 보여주는 것 중 사과배가 있다. 연변 특산물 사과배는 물이 많고 시원한 맛이 일품이다. 연길에서 용정으로 가는 구릉지역을 따라서 끝없이 사과배 과수원이 펼쳐져 있었다.


배꽃이 피는 사원한 맛의 사과배
끝없는 사과배 과수원


사과배의 역사는 100여 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1921년 함경북도 경성에서 북간도로 이주한 2대째의 최병일이 동생에게 부탁해 조선에서 가져온 여섯 그루의 배나무를 심으면서 시작되었다. 천신만고 노력 끝에 6년 만에 여섯 그루 중 세 그루에서 배가 열리게 되었다. 이 배는 1930년대 연변지역에 널리 퍼졌고, 맛이 일품이라고 해서 ‘참배’라고 불렸으나 1952년 새로운 품종으로 확인, 사과를 닮았다고 해서 ‘사과배’로 불리기 시작했다.     

용정에는 무려 25만 그루나 되는 사과배 과수원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이 땅에 정착하기 위해 벼농사, 추운 북방에서 살려낸 사과배 품종을 만들어낸 이들도 조선족이다. 용정 벌에서 누렇게 익어가는 벼를 바라보면서, 더 넓게 펼쳐진 사과배 과수원을 보면서 나는 새삼 우리 조상의 끈기와 지혜에 감동했고, 그들에게 자부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함께 자란 윤동주와 송몽규
명동촌 교회


 용정에서 꼭 해야 할 것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인 윤동주 삶의 발자취를 따라 명동촌에 가보는 것이다. 윤동주 시인은 명동촌에서 태어나 송몽규와 함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후 평양으로, 또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누구에게나 그렇듯 고향은 그에게 정신의 보금자리였다.

일본 교토의 도시샤대학에서 유학 중이던 윤동주는 해방을 반년 앞둔 1945년 2월 16일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송몽규, 고희욱과 함께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으며, 징역 2년의 선고를 받고 복역하던 중에 원인 모를 병으로 옥사했다.      


윤동주 생가 표지석


유골이 되어서야 고향으로 되돌아온 시인은 용정의 동산에 있는 중앙교회 묘지에 묻혔다. 윤동주의 삶과 문학 세계는 그의 친구 정병욱, 강처중 등의 노력으로 해방 뒤 널리 알려졌고, 민족시인으로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시인 윤동주가 시대의 아픔을 온몸으로 느끼며 부끄러움의 역사를 가슴 절절이 풀어낸 시들이 생가 곳곳에 새겨져 있었다. 찌는 듯한 더위에 숨이 막히고 땀은 비 오듯 흘렀지만 모두들 시비들에 눈을 모으며 시인의 생애와 일제 강점기 민족의 아픔을 새삼 되새겼다. 집 앞에 세워진 기념비와 안내문의 한국이 아닌 “중국 조선족 애국시인”이라는 문구를 보며 안타까웠다.


용정 대성중 윤동주 시비


용정의 대성중학교 한편에 윤동주 시비가 세워져 있고 윤동주 기념관이 들어서 있다. 안내인의 해설을 들으면서 조선족의 애국심이 갖는 힘을 느꼈다. 윤동주의 당시 상황을 제시하는 자료들을 둘러보고 밖으로 나왔다. 수수한 차림의 학생들은 평범하게 수업을 하고 운동장에서 공을 차고 있었다. 시인 윤동주의 서정적이고 심지 굳은 애국심이 저 학생들에게 자연스럽게 교육이 될 것 같았다.


서전서숙 자료-중앙일보


서전서숙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만주로 망명한 이상설 등 독립투사들은 간도에 있는 한국인 자녀에게 교육을 통해 독립사상을 고취할 목적으로 학교 설립을 추진하였다. 서전 평야에서 이름을 따 사립학교 서전서숙을 설립, 1년 만에 폐교하고 명동서숙으로 승계되었으며, 1925년 폐교까지 17년 동안 총 천명 이상의 애국청년들이 졸했으며, 애국지사를 배출한 서전서숙터는 현재 룡정 실험소학교로 운영 중에 있었다.   

  

 간도지역은 조선말 조선의 관리 이윤범이 간도 관리사로 파견되어 조세를 받는 엄연한 조선의 땅이었다. 그러나, 일본이 간도의 영토권을 청국에 넘겨준 안타까운 역사의 우리의 땅이었다.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응하는 역사연구, 조선족이 한민족임을 잊지 않는 동질성 회복을 위해 지속적인 노력이 더욱 필요한 때이다.     


백두산과 천지

  

용정에서 백두산으로 향했다. 끝없이 펼쳐진 옥수수밭과 콩 밭 사이로 버스는 한없이 달리고 있었다. 고속도로를 따라 세 시간 이상 달리다 드디어 주차장에 도착하여 6인승 차로 갈아탔다. 백두산으로 가는 길을 따라 위로 올라가면 아름다운 경치와 하얗고 노란 풀꽃 등을 볼 수 있다. 흑풍 구의 바람을 느끼고 구불구불 정상으로 올라갔다.  

백두산은 마치 흰머리와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중국에서는 장백산이라고 부른다. 우리 민족이 대대로 신성시하는 성산으로, 중국에서도 청대 왕조의 발상지라 하여 숭배하였다. 위엄 있으면서 장엄한 느낌을 주는 백두산에 중국인들도 많이 찾아와 휴일에는 백두산 찾아가는 것이 두려울 정도이다. 사람 많은 중국을 확실히 느낄 수 있다. 셔틀버스 타려고 기다리고, 내려서 또 입장 순서 기다리고, 마냥 기다리다 다른 일정을 놓치기도 했다. 일정 인원만 입장시키는데도 발 디딜 틈이 없이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백두산 이용 승합차


백두산 천지는 “3대가 덕을 쌓아야 한 번에 볼 수 있다.”는 말이 있듯이 쉽게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운이 좋아 천지를 볼 수 있었다. 우아하고 장엄한 느낌이었다. 용문봉에서 바라보는 북녘땅의 장군봉은 위엄이 있었다. 언제 저 봉우리에 가볼 수 있을까? 16 봉우리 속에 담긴 천지의 빛깔은 산봉우리를 품느라 푸른빛이었다.      

1993년에 백두산을 방문하고 허름한 시설에서 온천을 했었는데, 2006년에 온천시설이 크게 생기더니 2013년에는 무료였던 지하 삼림대에도 입장료를 받았다. 공산주의 국가가 자본주의의 속성을 빠르게 적응하고 있었다.  최근에는 화장실 등 공공시설물도 천지 인근까지 설치되어 누구나 쉽게 백두산을 오를 수 있도록 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었고, 풍경구 내 에서의 방뇨, 흡연, 환경 훼손 등 위반 시 관광객은 물론, 해당하고 여행종사자도 같이 과중한 벌금과 엄한 벌칙으로 철저하게 통제하고 있었다.


천지폭포
천지 온천 원천수


천지폭포 가는 길에 웅덩이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것을 볼 수 있다. 화산지형이라 온천이 퍼져있고, 검은 현무암이 넓게 보인다. 천지폭포는 60미터 물줄기가 시원하게 내려오는 장관을 이루고 있다. 그 뒤쪽으로 계단을 타고 올라가면 천지 가는 길이다. 6월 중순에 올라갔을 때 녹지 않은 눈들을 볼 수 있었다. 경사가 몹시 급한 언덕을 다 오르면 평탄한 분지가 나오고 안으로 한참 걸으면 푸른 바다처럼 펼쳐진 천지가 보인다.

천지의 물줄기가 하나로 흐르다 두 갈래로 나눠지는데 동으로 두만강, 서로 압록강으로 흘러간다. 물은 몹시 차갑고,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그런지 깨끗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관리가 잘되니 깨끗해졌을 것으로 보인다.      

 부근의 지하삼림대를 걷는 것은 참으로 상쾌했다. 침엽수림이 쭉쭉 뻗은 테크 길과 곳곳에서 우렁차게 들리는 계곡 물소리, 백두산 봉우리 보려고 5시간 기다리던 피로가 씻겨나갔다. 개마고원 지역의 고위평탄면 숲 길을 걷고 있는 느낌을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었다.      


졸본성-오녀산성

 

통행료를 내고 신나게 고속도로를 달리던 버스는 고구려의 첫 도읍이었던 졸본성이 위치하던 환인현에 도착, 점심을 먹었는데 한국인이 많이 오지 않은 듯 현지 음식은 향이 강했다.

 환인 시 동북쪽 8.5km 거리에 있는 오녀산성 올라가는 계단은 두 가지, 바로 올라가는 것과 지그재그로 올라가는 것으로 되어있다. 바짝 긴장하고 성큼성큼 위로 올라갔는데 땀이 비 오듯 흘렀다. 이런 지형에 만든 산성은 전쟁 시 피신용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녀산성 18반 -18 구비 올라간다는 뜻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한 졸본성으로 짐작되는 오녀산성은 200m 높이의 절벽 위 천연의 요새가 되어 왔다. 고구려 멸망 이전에 한 번도 함락된 적이 없는 성이다. 오녀산이라는 이름은 다섯 명의 선녀가 흑룡과 싸우다 전사했다는 당나라 전설에서 따온 것이다. 성벽의 둘레는 약 4,754m 정도이고, 남·서·북벽은 높이 100m가 넘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다. 남동쪽 일부와 동쪽에만 인공 성벽을 쌓았다. 산 정상에는 남북 1,000m, 동서 300m 정도의 넓은 평지와 천지라고 부르는 연못이 있고, 성의 남쪽 끝에는 전투지휘소인 장대가 있다. 여기서 멀리 혼강과 환인 시내 전체를 한눈에 굽어볼 수 있다. 성내에는 왕궁터, 병사들의 숙소 등으로 추정되는 대형 건물지, 온돌 시설, 연자방아, 저수지와 우물, 점장대 등이 있다. 또 주변에 고구려 초기 돌무지무덤 떼들이 있어 이곳이 고구려 초기 도읍지임을 증명하고 있다.      

 

하고성자토성 표지석
오녀산박물관


서북쪽 귀퉁이에 토성의 기단부 흔적과 마을 안에 성터임을 알리는 표지석만이 남아 있어 이곳이 하고성자성터였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혼강을 따라 10km 정도 내려가면 평지에 존재하던 하고성자토성이 평지성으로 추정된다. 산성인 오녀산성과 평지성인 하고성자토성이 고구려의 도성구조 양식인데 이후 국내성과 평양성에도 나타난다. 하고성자토성을 찾아갔지만 많은 부분이 훼손되었고 논밭 사이에 헤매다 찾기도 쉽지 않았다.  서북쪽 귀퉁이에 토성의 기단부 흔적과 마을 안에 성터임을 알리는 표지석만이 남아 있어 이곳이 하고성자성터였음을 알 수 있었다.

오녀산박물관은 2008년 개장한 곳으로 전시실은 모두 5개, 오녀산 및 환인 지역에서 출토된 여러 유물이 전시되어 있지만 크게 특별하지 않았다. 이 곳이 고구려 발원지였다는 것 자체, 이 곳에 서 있다는 것이 더 큰 의미였고, 남북 분단으로 소홀했던 고구려에 대해서 더 깊이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집안 박물관
집안 국내성 성벽


버스는 환인현 오녀산성을 들러보고 고구려 유적지와 고분을 만나러 두만강 근처 지안으로 향했다. 국내성은 고구려 제2대 유리왕부터 장수왕이 평양성으로 수도를 옮기기 전까지 고구려의 수도이다. 고구려는 이곳을 중심으로 영토를 넓히고 강력한 중앙집권적 고대국가의 틀을 갖추어 나갔다.     

국내성 성벽의 전체 길이는 2,686m이며 동서가 남북에 비해 약간 길며, 현재 성벽이 상당 부분 훼손되어 있다. 오녀산성처럼 지안 서북쪽 2.5km 지점의 해발 676m 환도산에 위나암성이 있는데, 국내성이 공격받을 때 피난하는 산성이다.  2013년 5월 1일 개관한 집안 박물관, 2달 뒤 7월에 들러 이런저런 유물을 살펴보고 나왔다.


국경 철교에서 보이는 북한
북한 만포 공장


지안시 면적은 3408 km², 인구는 약 23만 명이다.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 자강도 만포시와 마주 보고 있다.

 209년에는 부근의 환도성으로 천도하여 427년에 평양성으로 천도할 때까지의 425년간 고구려의 수도였으며, 당시의 유적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옥수수밭을 지나 오솔길을 따라 이름 그대로 둥근 모양의 환도산성에 올라가니 국내성 방어용 산성으로 짐작되었다.      

환도산성 일부만 살펴보고 내려왔지만, 돌로 쌓은 성벽 전체 둘레는 6,951m에 달한다. 내벽과 외벽은 쐐기형 돌을 사용하여 퇴물림 방식으로 가지런하게 겉 쌓기를 했으며, 안채움부는 쐐기형 돌 안쪽에 길쭉한 북꼴돌을 끼워 넣고 잔돌로 빈틈을 채워 견고하게 속쌓기를 했다. 성문터는 7곳 확인되었는데, 문루의 지붕에 얹었던 기와 조각과 와당 조각이 많이 흩어져 있다. 남문 뒤쪽 장방형 석대와 초석, 38기의 고분도 분포하고 있다.

1994년에 고구려의 풍부한 역사 유적으로 인해 국가 역사문화 명성으로 지정, 2004년에 오녀산성과 함께 지안의 고구려 전기 도성과 고분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환도산성 표지석


 환인과 지안은 동북공정 사업이 본격화되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을 기점으로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다. 반면, 고구려 유적지들은 심각하게 훼손될 위기에 처해 있다. 환런 댐 건설 이후  대다수의 고분군과 마을은 수몰됐고 역사적 가치가 높지만 지금은 물아래로 자취를 감춘 셈이다.

  2004년부터 공개하고 있는 지안시 우산하고분군에 자리한 오회분 5호묘의 무덤벽화 역시 이미 훼손 상태가 심각한 것으로 확인됐다. 높은 습도에 더해 관광 인파에 노출되면서 결로와 백화현상이 두드러졌고 어두운 실내 공간을 비추기 위해 전등을 설치한 부분에서는 이끼가 피어올랐다. 공개하고 난 이후 훼손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5회분 5호 무덤을 방문했는데, 크기가 다른 삼각석을 겹으로 쌓아 올린 2단의 삼각 고임이 있는 특이한 구조를 봤다. 널방은 잘 다듬은 화강암제 판석으로 쌓았으며, 바닥에 세 개의 돌관대가 놓였다. 석면 위에 직접 벽화를 그렸으며 주제는 사신으로 북 현무, 서 백호, 동 청룡, 남 주작이 그려져 있었다. 천장에는 해신과 달신을 비롯한 신들이 하늘세계의 나무와 함께 표현되었다. 각각 해와 달을 두 손에 받쳐 든 신들의 상체는 사람이고 하체는 용이다. 해와 달 안에는 각각 삼족오와 두꺼비가 그려졌다. 소 머리에 사람의 몸을 한 농사신과 불을 받쳐 든 불의 신이 보인다. 농사신은 두 팔을 벌리고 달리는 자세이고 불의 신은 춤을 추는 듯한 모습이다.

5회분 5호묘 벽화
무용총 수렵도


오회분 5호묘 널방 천장 고임에는 해와 달, 북두칠성을 비롯한 별자리, 구름무늬, 해신, 달신을 비롯한 각종 문명신, 기악천과 상서로운 짐승들이 함께 표현되었다.

 광개토왕릉비의 북서쪽 약 1km 지점에 있는 무용총은 수렵도로 유명한 곳. 한 면이 약 15m인 방추형으로  높이는 3m 내외이다. 회반죽을 두껍게 칠한 벽면에 사냥 장면을 그린 벽화가 있다. 무를 숭상한 고구려는 수렵이 중요한 문화코드였다. 말을 타고 달리는 모습과 도망가는 호랑이와 사슴을 향해 뒤를 돌아 화살을 당기는 장면에서는 속도감과 박진감을 강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오른쪽은 수렵도, 왼쪽 벽에는 인물의 기마도와 주방 등의 가옥 2동, 5명의 남녀 군무상, 9명의 합창 대상이 그려져 있다. 이 장면의 특이함에서 무용총이라고 불렀는데, 천장에는 연화문 등의 장식문, 사신도, 일 월상도를 포함한 그림이 있다.


각저총 씨름 장면


  1905년 씨름꾼이 씨름하는 모습이 그려진 고분벽화 고구려 각저총이 발견된 지역이 고구려의 옛 도읍지 지안이다. 각저총은 우리말로 씨름 무덤이며, 고유문화인 씨름이 정월 초하루와 백중, 단오절, 팔월 한가위 등 명절놀이 문화로 자리 잡았다. 큰 나무 밑에서 샅바 없이 허리와 바지를 잡고 겨루는 통씨름을 하는 고구려 각저총의 고분벽화를 자세히 보면 왼쪽에 있는 사람은 매부리코에 큰 눈을 가진 사람임을 알 수 있다. 벽화는 당시의 생활상을 추정하는 좋은 자료이다.

            

훼손된 장군총 태왕릉


고구려 제19대 광개토대왕 능을 알리는 표지석에는 ‘태왕릉’이라 표기하고 태왕의 일대기를 간략하게 새겼다. 태왕릉은 집안에 있는 고구려 왕릉급 고분 가운데 천추총에 이어 두 번째로 규모가 크다. 광개토대왕비 서남쪽으로 200미터 지점에 있다. 태왕릉 주변에 토끼풀을 심고,  나무를 심어 공원처럼 가꿨다. 거석을 쌓아 만든 적석총으로  7층을 만들어 정상부를 돌로 덮고 가파른 계단을 만들어 능 위까지 안전하게 갈 수 있다. 능위에는 석실이 텅 비어있고, 유리벽이 있지만  도굴당하여 남아있는 것이 없다. 세 번째 방문인 광개토왕릉은 무너져 있었지만, 그래도 그 규모나 위용은 짐작할 수 있었다.


광개토대왕비

 

왕릉에서 가까운 곳에 광개토왕 비석이 서 있었다. 사진으로 익히 봐 왔던 대로 광개토왕의 비는 유리 집 속에 갇혀 있었다. 414년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이 세웠으며, 응회암 재질로 높이가 약 6.39m, 면의 너비는 화폭 1.35m~2m, 네 면에 걸쳐 1,775자가 예서로 새겨져 있다. 그 가운데 150여 자는 판독이 어렵다. 내용은 대체로 고구려의 역사와 광개토왕의 업적이 주된 내용이며, 고구려사 연구에서 중요한 사료(史料)가 된다.

 비석의 현재 상태는  자연 마모된 뒤 표면에 가득 낀 이끼를 제거하기 위해 불을 질렀기 때문에 비면이 크게 훼손되었다. 이후 석회를 바른 데다가, 탁본을 거듭하며 훼손이 계속되었다. 음~~


장군총
장수왕 애첩의 비로 추정되는 무덤


가까운 곳에  장수왕릉으로 알려진 장군총을 찾았는데 비교적 온전히 보존되었다. 광개토왕릉보다는 작았지만 위용 있게 서 있었다. 장군총 옆에는 작은 무덤이 하나가 있었다. 도굴로 앞면이 다 드러나서 마치 우리나라의 북방식 고인돌처럼 보였다. 장수왕이 총애했던 애첩의 무덤이 아니었을까 추정되고 있는 부속 무덤이다.

무덤 안에 있던 유품이 모두 도굴당했기 때문에 무덤의 주인은 정확하지 않다.  장군총이 만들어진 시기는 대략 4세기 후반~5세기 전반으로 추측된다. 무덤의 전체 모양은 이집트의 고대 무덤인 피라미드와 비슷하고 형식은 돌무지 돌방무덤이다. 먼저 화강암으로 널방을 만든 다음에 길게 다듬은 장대석 1,100여 개를 7층 쌓았다. 무덤의 높이는 약 13미터에 이르며, 무덤 꼭대기에는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씌웠던 흔적이 남아 있다.

    

압록강 단교 너머 신의주


 단동으로 이동 후 호텔에서 가까운 곳, 길 건너편 도보 1분 거리에 위치한 압록강 단교를 찾았다. 말 그대로 끊어진 다리라는 뜻인데,  우리 민족의 아픈 상처인 6.25 전쟁의 상흔이 남아 있는 곳이다. 입장료를 내고 단교 입구에서 사진 몇 장 찍고, 다리 위로 향했다.

 단교 입구에 평화라는 동상이 북한을 바라보고 있다. 인민해방군 총사령관 펑더화이가 중앙에 있고 십여 명 군인이 함께 진격하는 동상이었다. 옆에는 철교가 미군에 의해 끊어진 날짜 1950년 10월 19일을 대리석으로 만든 달력에 표시해 두었다. 압록강 철교 부근 잡상인들은 역시 김일성과 김정일 그림이 그려진 북한 돈을 한국인을 상대로 팔고 있었다.


압록강 단교는 현재 중국과 북한을 연결하는 철교 옆에 있으며 1950년 10월 19일 한국전쟁 당시 미군에 의해 폭격당해 끊어진 것을 그대로 보존해놓았다. 중국 정부는 애국심을 드높이는 유적지로 보전하고, 북한을 압박하며, 짭짤하게 외화를 벌어들이는 수단으로 활용했다. 철교 건너편은 평안북도 도청 소재지인 신의주시다. 이른 새벽에도 단교를 다시 찾았는데 막막한 물안개 속에서 보이지 않는 건너편, 알 수 없는 북한을 생각해봤다.


고구려 박작성으로 알려진 호산장성


박작성은 요동반도에서 평양성으로 이어지는 교통로를 방어하는 성의 하나이다. 문헌기록은 고구려와 당의 전쟁 기사에서 처음 나타나며, 당태종의 대규모 고구려 침략이 실패한 지 3년 후인 648년에 대규모 전함을 축조케 하는 한편, 설만철이 3만여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의 박작성을 공격케 하였다, 당시 박작성 성주는 1만여 명의 군대로 대항하여 성을 지켰다는 기사가 있다.


압록강 하구의 경계를 맡았던 요충지로 고구려 천리장성의 일부이기도 했다. 고구려 멸망 후 봉황성이라고 불렸으며, 조선 사신들이 명이나 청으로 갈 때 지나쳤던 길이기도 하다.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에도 봉황성을 지나는 장면이 나온다. 단동시에서 20km 떨어진 박작성, 지금은 그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인해 모두 철거되고 만리장성의 일부라고 하면서 호산장성이라 부르고 있다. 천리장성에 오른다라는 마음으로  800미터 높이의 호산에 장성에 땀을 뻘뻘 흘리며 올라갔는데 성루에 오르니 북녘 들판도 보였다. 국력의 양적 요소 중 하나가 영토임을 실감했다.


압록강 유람선
압록강 위화도


압록강변에 있는 압록강 공원은 북한 신의주시를 조망할 수 있다. 외국인들에게 북한이 폐쇄적이어서 압록강 공원은 사시사철 관광객들이 찾는 명소이다. 압록강 유람선을 탈 수 있는 선착장이 있어서 배를 탔다. 유람선은 몹시 허름했지만 북한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고 압록강 하구를 둘러볼 생각에 기 꺼이 탔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알려진 압록강 하구 위화도까지 다녀왔다. 국경 근처 가까이에서 북한의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산은 다락밭으로 누더기처럼 되어있고, 비탈진 경사길에서 작물을 살펴보기도 하고, 평지에서는 모를 심고 있었다.

 

일보과 너머 북한땅
압록강 하구 유람선
압록강 하구 삼각주-구글


성곽을 우측으로 두고 가로지르니 숲길과 밤나무 등이 보이면서 작은 공터가 나왔다. 녹색 글씨의 돌판에 ‘일보과(一步跨)’라고 새겨져 있다. 글자 그대로 한걸음에 넘을 수 있다는 뜻이다. 하천 습지 도랑 하나를 사이에 두고 중국과 북한이 경계를 이루는 곳이다. 북한 사람들이 이 습지에서 뭔가를 잡고 있거나 기르고 있었다. 북·중 국경 가운데 가장 근접한  50미터 지역이다. 넓이 뛰기를 하면 단번에 건널 정도의 폭이다. 중국 쪽으로 접근하지 못하게 철조망이 쳐있다.

 압록강은 강 중간에 섬이 아주 많고 습지 형태로 된 곳도 굉장히 많다. 이 섬들이 백두산의 천지를 중국과 분할하는 조건으로 모두 북한 소유이다. 중국돈 50원 정도면 보트를 타고 둘러볼 수도 있다.


여순감옥
여순감옥 고문실


대련에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곳은 여순 감옥이었다. 독립운동가들이 고문을 당하고, 죽임을 당했던 곳이다. 고문실과 고문기구, 수감방, 사형집행 장소 등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여순 감옥에서 순국하신 독립운동가이면서 사상가이신 안중근 의사와 이회영·신채호 선생의 동상에서 감사함과 죄송함이 동시에 일었다.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하르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고 1910년 3월 26일 32세로 순국하였다. 이회영 선생은 1932년 11월 관동군 사령관 암살 계획 추진 중에 일경에 체포되어 여순 감옥에서 심한 고문으로 66세 나이로 순국하였다. 신채호 선생은 항일투쟁자금 연루자로 체포되어 여순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는 중 1936년 2월 57세로 순국하였다.               


신채호 선생


신채호 선생은 1919년 상해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으며, 1923년 의열단의 “조선혁명선언”을 작성하였다. 1924년 집필한 『조선상고사』는 최초의 본격적인 근대역사 방법론으로써, 과거 우리 역사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통해 우리 역사의 자주적 체계화를 시도했다.             


  

이회영 선생


우당(友堂) 이회영 6형제의 만주 이주는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다. 노블 레스 오블리주(상류층 신분의 도덕적인 책무)를 실천한 이회영 일가는 통화 합니하 부근에 신흥강습소(신흥무관학교 전신)를 세워 광복군을 양성하는 등 전 재산을 희사하였다.          


안중근 의사


  안중근이 1909년 11월 3일부터 1910년 3월 26일까지 145일간 수감됐던 곳이다. 여순 감옥 내부를 관람하는 가운데 마침내 '조선 애국지사 안중근을 구금했던 방'이라는 안내판 옆에는 안중근 의사의 감방이 있었다. 쇠창살 틈으로 들여다본 안 의사의 감방은 1인용 특별실이었다.
 감방 내 왼편에는 딱딱한 나무침대 위에 담요가 깔려 있었고, 오른편 책상에는 의자와 함께 안 의사가 쓰던 필기도구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감방 내부는 마치 안 의사가 글씨를 쓰다가 잠시 나들이 간 듯 꾸며놨다. 감시하던 일본 교관이 안중근을 존경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안중근 의사의 업적이 남겨진 기념관을 갔는데 가슴을 치는 문구, 일일부독서 구중생형극!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는 글귀 앞에 섰다. 마지막 사형 집행인이 그에게 죽기 전에 소원이 있냐고 물었을 때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던 말.‘5분만 시간을 주십시오. 읽던 책을 아직 다 읽지 못했습니다.’ 그 5분 동안 독서의 중요성에 대해 불언지교의 가르침을 주셨다. 묵묵히 조국의 독립을 위해 자신의 소명을 다하신 안중근 의사의 모습을 떠올리며 헌화를 한 뒤, 묵념을 하며 교육자로서 나의 소임을 성실히 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애국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중근 의사와 함께한 18세 소년 유동하
안중근 의사 법정 스케치-서울시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월에 11명의 동지들과 함께‘단지동맹’을 결성하고 조국을 위해 한 몸 바칠 것을 맹세,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한국 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조국의 광복과 동양평화를 위해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였다. 물론 블라디보스토크의 최재형 선생의 도움으로 가능한 일이었다.   

여순 감옥과 가까운 곳의 법원을 찾았다. 옛 일본 관동지방법원은 현재 뤼순구 인민병원으로 쓰이고 있다. 법정은 1910년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법정 벽에는 안중근 의사의 사진과 이토 히로부미 죄상 15개 항이 한글과 한자로 액자에 담아 걸어두고 있었다.  법정 옆 전시실에는 안 의사가 감옥에서 재판정으로 오갈 때 탄 마차 수레와  죄수에게 씌웠던 모자 용수가 전시됐고, 이어 법원장실, 검찰 관장실 등이 있었다.


당시 안중근 의사와 함께한 18세 소년 유동하는 징역 1년 6개월을 집행하고, 안창호 선생을 도우며 연해주의 독립운동을 하다 2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정부는 1988년 독립훈장을 추서 했다.  그리고 다시 재판을 취재하던 기자가 법정 현장을 스케치한 것과 안중근 의사가 옥중에서 남긴 글씨 등 총 5점을 국가문화재로 등록해달라는 서울시의 신청이 이루어졌다.    


 ‘만약 한 민족이 역사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이해가 없다면 당연히 생명력을 잃게 될 것이다. 나는 앞으로 나의 일상과 삶에서 항상 정당한 행동을 위해 싸울 것이며 이 정당한 행동이 잘못됐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절대 지지 않을 것이다. ’를 기억하며 정의와 용기의 힘을 되새겼다.      


여순 풍경


여순에 가면 발해와 황해를 조망할 수 있는 백옥산(白玉山) 공원 광장, 러일 전쟁 승리 후 일제의 수탈을 미화하기 위해 강제노역  10,000명을 동원하여 만든 기념탑은 백옥탑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여순의 전경을 조망할 수 있다.

청일전쟁 후 러시아 조차지역으로 인해 작은 어촌이 항만으로 아름다운 해변의 도시로 알려져 있는 대련, 35개의 소수민족이 거주하고 있기 때문에 다양한 민족문화가 공존한다.  러시아 어로 먼 곳이라는 의미의 '다르니'가고 중국 이름인 다롄으로 되었다. 러일 전쟁 후 일본이 50여 년 동안 조차하여 자유항으로 발전, 만주 침략의 거점으로 삼았으며, 2차 대전 후 중국에 반환되었다. 최근 해군기지가 있는 보하이 만의 여순과 상업도시로 발전한 다롄이 둥베이 지방의 주요 무역항으로 발달하고 있다.


고려박물관 옥감


인구 천만이 살고 있는 대련에서 한국인 황희면이 해운업과 한국어학원을 운영하다 만든 박물관이 있다. 바로 2011년 문을 열게 된  ‘고려박물관’. 총 3000평방미터의 영성자 민속박물관에 자리 잡은 고려박물관은 전시면적이 800평방미터로 고려관, 조선관을 비롯해 다섯 개의 전시관이 있는데 한민족이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이 무려 2000점이 전시되어 있다. 황희면 관장이 평생 모은 유물로 가장 아끼는 것 중의 하나가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이다.

 1미터 80센티 크기의 고구려의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5-6세기경의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 국보 83호 반가사유상도 삼국시대 것인데, 그 보다 더 크고 금동의 흔적도 역력하다. 고구려 광개토태왕의 경우도 불교 사찰을 9개나 지었다고 하니 고구려 불교유물들이 많이 출토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디서 발굴되어 이 대련 고려박물관까지 오게 되었을까?

 황제가 죽고 난 다음 입는 수의를 옥돌을 갈아서 만든 옥갑도 특별하다. 옥돌 조각 사방 모서리에 바늘구멍을 뚫고 비단실을 엮어 옥으로 된 수의를 만든 것이다. 정교하고 까다로운 작업을 해낸 사람들의 손끝이 떠오른다.


돌아보니 지난 일주일 동안 참 많은 거리를 이동했다. 무려 3,000km를 남서 방향으로 달려왔다. 고구려 유적과 발해의 흔적을 만났다. 특히 역사 교과서에서 만나던 발해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보고 들을 수 있는 귀중한 시간들에 감사했다.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을 위해 온 몸으로 맞선 그분들이 있어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다는 생각에 또한 감사했다. 만일, 그 시대 살았던 나였다면 결코 애국지사들의 선택을 따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신념과 용기에 따라 행동하는 그분들께 깊은 경애를 드렸다. 대련 공항에서 우리나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 몸을 싣고 피로감에 지쳤지만 뭔가 어려운 상황이 생긴다면 신념과 끈기로 돌파해나가야겠다는 또렷한 의지가 자리 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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