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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경희 Feb 15. 2021

황하 문명의 흔적을 찾아

중국3-중원을 얻는 자가 천하를 얻는다는 황하의 옛 도시

최초의 인류,  호모 사피엔스가 약 20만 년 전 세상에 모습을 나타낸 이후 자연의 도구를 사용하며 수렵, 채집 및 이동 생활하는 구석기시대가 시작되었다. 약 1만 년 전부터 기후가 따뜻해지면서 간석기와 토기를 사용하고, 농사지으며 가축을 기르는 정착 시대가 열렸다. 농사에 필요한 물을 얻을 수 있는 큰 강유역 비옥한 땅에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씨족 중심의 마을은 점차 부족 사회를 형성하고,  청동기 사용과 정복활동에 따른 부족 통합으로 도시가 생겼다. 점차 물건을 만들어 판매하는 상업과 도시의 성장, 지배자 등장으로 조직이 정비되고 국가가 생겨났다. 통치자는 신전과 궁전을 짓고 제사와 정치를 담당하며, 교역 과정에서 문자를 발명하고, 기록하는 과정에서 문명이 발생하고, 역사 시대를 열게 되었다.


 고대 토기와 갑골문(중국 정저우 박물관 전시)
세계 4대 문명 발상지와 황허 문명


기록에 따르면, 인류는 지금으로부터 5500년 전에 최초의 고대 문명을 일으켰다. 문명이란 인류가 이룩한 물질적 기술적 발전을 말하는 것으로 세계 최초로 문명이 발생한 지역은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유역의 메소포타미아 지역이었다. 그 뒤 나일 강 유역, 인더스  강 유역과 황허 강 유역에서도 문명이 발생하였다.


중국  기록에 의하면, 기원전 2000년에 황허 강의 비옥한 황토지대에서 농경의 발달과 토기가 사용되었고, 기원전 1600년에 '상'이라는 나라가 세워졌는데 은나라로 알려진 고대 국가이다. 은허에서 국가의 중요한 일을 점을 쳐서 결정하는 신권정치, 청동 무기와 제기, 한자의 기원이 된 갑골문자가 발굴되었다. 갑골문은 거북의 껍질이나 동물의 뼈에 열을 가하여 나타난 균열을 통해 점을 치고 그 결과를 기록한 상형문자를 말한다. 지배층이 죽었을 때 무덤에 가까운 사람이나 노비를 함께 묻었던 순장의 흔적도 발견되었다.

기원전 1100년 경 상을 멸망시키고 주나라가 등장하였는데 동쪽 뤄양으로 수도를 옮겼다. 주나라는 넓어진 영토는 봉건제도로 통치했다. 봉건제도는 주왕이 수도와 주변을 다스리고, 그 외의 지역은 왕의 공신이나 친척을 제후로 삼아 통치하는 제도였다. 제후들은 왕이 주관하는 제사에 참여하였고 공물을 바친 대신, 주왕은 군사를 제공해주는 통치 방식이었다.


허난 성 여행지


중국의 고대 문명이 탄생한 황허강 남쪽, 인구 1억 허난 성에는  5000년 역사를 품은 중국 8대 고도가 네 곳이 있다. 중국 최초의 왕조부터 북송 때까지 20여 개 왕조의 도읍이 이곳에 있었다. '상' 나라 도읍지 정주와 갑골문 최초 발굴지 안양, 북송을 비롯한 일곱 개 왕조의 도읍지 개봉, 후한을 비롯 아홉 개 왕조의 도읍지 뤄양 등이 있으니, 중국 역사와 문화를 만나는 여행지로 제격인 곳이다. 정주에서 기차 타고 동쪽으로는 1시간 거리 개봉, 서쪽으로는  2시간 30분 거리에 낙양이 있는데 세 도시가 수평축으로 연결되어 있다.  


황사로 뿌옇게 보이는 정주 정동신구


몇 년 전 약 2시간 30분 정도 비행 후 정저우 신정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에서 북서쪽 시내까지 30km, 약 50분이 소요되었다. 황허에 도착했다는 느낌 때문인지 실제 황토가 날렸던 것인지 시야가 매우 뿌옇게 보였다.  

허난 성의 전체 면적은 16만 7천㎢, 산악 지대와 평야가 반반이다. 지역별로 강우량 차이가 크며, 중국에서 가장 많은 농산물을 생산하는 지역이라 중국의 ‘식량 창고’라고 부르는 곳이다. 1978년 개혁, 개방 정책 이후 동해연안 공업개발 우선 정책으로 낙후되었다가 1990년대 내륙 물류 기지로 다시 성장하고 있다.

 

황토가 흐르는 황하강


 황하강 남쪽 대평원에 위치한 정저우, 북쪽에 황허강이 흐르고 있다. 인구는 2021년 1월 기준 약 1000만 명 정도이며, 4계절이 다양한 우리나라 기후와 비슷하다. 3500년 전에는 상 왕조의 도읍이던 역사도시이며, 1,400여 곳의 문물과 유적이 있다. 이곳 출신의 한비자, 두보, 백거이 등은 역사 시간에 많이 들었던 인물들이다. 주요 철도와 고속도로, 항공이 운항하는 중원의 중심 도시이다. 삼국지에 등장하는 조조가 중원을 얻는 자가 천하를 얻는다고 한 것처럼 전략적 요충지이다. 정저우에서 펼쳐진 고대 중국의 역사를 느끼고 황허강을 만난다는 기분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정저우 2.7 탑과 광장


우리가 묵을 호텔이 2.7 광장 주변에 있었는데, 이 곳에 서울의 명동 거리처럼 '덕화 거리'가 있다. 고대 상나라 때 최초로 대규모의 물물 거래가 이루어졌던 덕화 거리는 3500여 년의 상업 전통을 이어오는 동북아시아 최초의 상업 지구인 셈이다.

저녁 먹고 슬슬 나가본 덕화 거리 광장을 중심으로 둥근 원형 2층 도로를 연결해 놓았는데 이동에 효율적이고,  안전하게 야경을 보기에도 좋았다. 덕화 거리에는 다양한 수공예품이 판매되고 있었지만, 디자인이나 품질은 다소 떨어졌다. 야시장에는 독특한 향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먹거리도 많았다. 아이들은 잘 먹는데 나는 향이 너무 역해서 힘들었다. 음, 아직 중국 음식은 편치 않은가 보다! 광장에 자리 잡은  KFC(배덕기) 도 중국 맛이 강해서인지 주강 비주 맥주 맛은 대단히 깔끔하고 맛이 좋았다. 정저우에 도착한 첫날밤에 맛사지샵에 들러 그럭저럭 피로를 풀었다.


정저우 인민공원


정주 시내는 격자 도로 체계를 갖추고 있어서 교통이 편리하며, 그 중심은 ‘2·7 광장’이다. 광장에는 14층으로 된 63m의 ‘2·7 기념탑’이 있다. 1971년 기차역 노동자들의 민중 운동 정신을 기리기 위해 정저우의 랜드마크로 세워졌다. 탑의 윗부분에  높이 2.7m의 종이 있고, 시계탑에서 매 정시에 '동방홍'이라는 곡이 연주되었다.

1923년 2월 1일, 기차역 노조 대표들이 정저우에 모여 총공회를 결성하는 과정에서 군벌 우페이푸가 군경을 동원해 강제 연행 및 대회장을 폐쇄하자, 격분한 노동자들이 총파업을 단행, 여객과 화물 수송이 완전히 마비되었다. 1만여 명이 가두시위를 벌이자, 2월 7일에 우페이푸는 이칠참안이라고 불리는 유혈 진압을 단행했다. 이후 1951년, 노동자 민중운동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2·7 광장을 조성하고, 2.7 기념탑을 만들었다.

광장 주변에는 정주에서 가장 큰 인민공원이 있는데 수령이 백 년 가까이 되는 듯 한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어 정주의 허파라고 부르는 곳이다. 호수와 강이 부드럽게 흐르고 많은 사람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는 곳이다. 오래된 나무들은 오래된 역사를 느끼게 했고, 공원의 큰 나무들이 주는 여유는 충분히 매력이 있었다.


허난성 박물관


다음날, 아침부터 찾아간 곳은 허난성 박물관이었다. 이집트 피라미드 모양과 비슷한데,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인 관성대를 본뜬 것이라고 했다.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박물관 중 3위로 꼽히며, 부지 면적이 10만㎡,  전시관 면적 1만㎡에 달하는 규모이다. 1, 2층 양쪽 7개의 기본 전시관, 테마전시관과 임시 전람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상나라 때의 갑골문, 청동기 유물들을 비롯하여 현대에 이르는 13만 여 점 유물은 대부분 허난성 출토품들이다. 중원에 위치한 만큼 중국의 유구한 역사와 찬란한 문화가 담겨있다. 그중 선사시대 유물과 상·주 시대의 청동기, 중국 역대 왕조에 걸쳐 제작된 도자기와 옥기 등 1급·2급 유물이 약 5000점에 달한다. 대단한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가장 오래된 관악기 가호골적
청동기 그릇 두령방정


그중에 꼭 관람해야 할 국보급에 달하는 9대 보물을 꼽을 수 있다. 기원전 7000년 경에 만들어진 뿔피리, 전 세계적으로도 가장 오래된 관악기인 가호골적은 황새의 뼈로 만들어져 총 7개의 구멍이 나있는 모습이 우리나라 단소 같다. 상나라 청동기 유물로 제사 때 육식을 담아 놓는 그릇으로, 통치자의 권력을 상징하는 청동 재질 푸른빛의 두령방정이 멋졌다. 상나라 은허 유적지에서 출토된 부엉이 모양을 한 술잔으로, 조형이 아름답고 화려한 상나라 대표 유물 부호효존, 서주시대  철기로 이루어진 심과 옥으로 된 손잡이로 구성된 철기옥병철검은 중국에서 최초로 제련한 유물이었다. 춘추전국시대 뚜껑에 연꽃잎이 이중으로 조각되어있고,  가운데에는 날아가는 학 한 마리가 장식된 연학방호, 12개의 용과 구름이 세밀하게 조각된 술잔 받침 장식 탁자인 청동으로 만들어진 운문동금도 멋졌다. 서한 시대 가운데 7미터 길이의 용과, 동쪽 주작이 서쪽 백호가 그려져 있고, 둘레에는 괴수, 영지, 운무 등의 무늬로 장식되어 있는 가장 오래된 벽화사신운기도,  측천무후가 서기 700년 숭산에 올라 신들에게 던졌다던  황금 죽간인 무측천금간, 북송시대 으뜸가는 신비스러운 도자기 여요천람유각화아경병 등이 특별했다.


삼색 도자기  당삼채
옥으로 만든 무와 사마귀


왕조 시신의 부패를 막기 위해 옥 조각을 금실로 엮어서 한 땀 한 땀  만들었던 수의 옥감을 여기서 또 만났다. 책으로만 보았던 측천무후의 유물이나 당대 이슬람과의 활발한 교역을 보여주는 3가지 색깔로 만들어진 도자기 당삼채, 상아로 만든 예쁜 무에 붙어있던 정교하고 사실적인 사마귀 등이 대단했다. 돌로 만든 정교하고 고운 부채모양의 유물도 눈길을 끌었다. 중국에는 독특하고 진귀한 유물들이 참 많다.


미술관 관람을 마치고, 유람선을 타러 정동 신구로 향했다. 정동신구는 구도심의 인구 밀집 문제, 교통 체증, 환경오염 등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고 환경친화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도시건설을 위해 개발하는 곳이다. 황하에서 끌어온 인공호수 여의호에서 유람선을 타고난 후 낙양 쪽 숭산과 소림사로 이동했다.

 

숭산 소림 입구
숭산 절벽 중간의 보행길


숭산은 사원, 탑림이 있는 신성한 도교의 성지로 중국 오악 중 하나이다. 총면적 450km로 모두 72개의 봉우리가 있다. 해발 1,512m의 연천봉이 주봉으로 1982년 중국 정부가 처음으로 국가급 풍경 명승구로 지정, 2004년 유네스코 세계 지질공원이 되었다. 신선이 모여사는 땅으로 여겨 30여 명의 황제와 150여 명의 저명한 문인들이 숭산에 올랐다. 72 봉우리마다 절이 있는데 495년 북위 때 천축의 승려 발타를 위해지어 준 절이 소림무술로 유명한 소림사이다.  숭산(嵩山)의 숭은 높을 고 한자 위에 뫼 산이 얹어진 글자이다. 높은 곳보다 더 위에 있는 산이라는 의미이다.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 숭산 낭떠러지 중간에 이어진 길을 따라 한 바퀴 돌아보는 데 아래를 내려다보니 아찔아찔했다. 주상절리  지형이 국수가락처럼 길게 이어진 숭산 절벽은 독특했다. 이런 곳에 도보길을 만들었다는 것에 대해 일단 경의를 표했다.

'높을 高에 山이 올라 있는 嵩山이라 과연 이름 그대로 숭산이다'라는 이상옥 교수의 디카 시라는 신조어 글귀가 떠올랐다. 한겨레 신문에서 보았던  디카시로 여는 세상이 떠올랐다. 디카시는 디지털카메라로 자연이나 사물에서 시적 형상을 포착하여 찍은 영상과 문자를 표현한 멀티 언어 예술로 실시간 소통하는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문학 장르라 할 수 있다.

소림사는 소실산 숲 속에 있다고 하여 소림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보리달마가 9년 동안 면벽 수도 이후 중국 선종의 본산으로 알려졌고, 소림 무술은 스님들이 용맹정진을 위해 고안한 운동이었다. 당나라 태종 이세민이 소림사 스님들의 도움으로 할거 세력을 물리친 후, 소림 무술은 전국적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역대  황실의 승병 친위대로서 위세를 떨쳤다.



 주차장에서 경내 입구까지는 1㎞ 남짓한 거리인데 전동차를 타고 들어갔다. 사찰은 의외로 규모가 작지만 수령이 수백 년 넘은 고목들이 울창하여 오랜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산문을 들어가자 비석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거대한 나무에는 작은 홈들이 파여 있다. 스님들이 무술을 연마하면서 손가락으로 낸 구멍들이라고 한다.  천왕전을 지나자 4층 종루가 하늘을 향해 날아갈 듯이 앉아 있고, 대웅보전 옆에 당나라 황제 이세민의 글을 새긴 거대한 비석이 있다.  

토산 부근의 이조암. 선종 2대조 혜가 스님과 제자들의 동상이 있는데, 혜가는 중국인으로 실질적 선종을 이끈 인물이다. 소림사 스님들은 한 손으로 절을 하는데, 혜가 스님에게서 유래했다. 혜가 스님이 달마를 찾아가 제자가 되겠다고 하자, 달마는 하늘에서 붉은 눈이 내리지 않으면 제자로 삼을 수 없다고 거절했다. 혜가는 자신의 한쪽 팔을 잘라 눈을 붉게 물들이며 제자가 되기를 간청했다고 한다. 소림사 스님들은 한쪽 팔이 없는 혜가 스님을 따라 한쪽 팔로 인사하고, 붉은 천을 두른 복장 또한 가사를 벗어 잘린 팔을 감싸니 붉게 물들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소림무술 공연 모습


소림사에서 내려오다 공연장으로 들어가 많은 사람들과 함께 소림무술 공연을 보았다. 소림사에서 받은 인상은 소림 무술을 상업화하여 더 많은 관광객들을 끌어들이려는 느낌이 컸다. 그래서인지 소림사 주변에는 무술 도장들이 많다. 학생들은 이소룡을 꿈꾸며 무술을 연마하고 있는데, 대여섯 살 밖에 안 되는 어린이들도 부모의 손에 이끌려 이곳에 와 수련하고 있다. 음~~ 소림사는 불교 성지보다 무술로 더 유명하다.  


소림사 탑림

 

소림사는  201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탑림으로 유명하다. 탑림은 소림사 역대 고승의 사리를 안장하는 묘지로 탑이 많이 서 있어 탑림이다. 소림사의 탑림의 전탑은 당시 건축설계를 보여주는 것으로 고탑 예술박물관이라 불리며, 중국 건축과 예술사, 불교 발전사 등의 자료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탑림에는 벽돌을 구워 만든 전탑이 줄지어 있는데 여주의 신륵사 전탑이 떠올랐다. 우리나라 사찰의 입구에서 만나던 부도밭인 셈이다.   



여경문 안쪽


소림사에서 다시 1시간 반 정도 서쪽으로 달리다 보니 중국 역사상 13개 왕조의 도읍이었던 뤄양에 도착했다. 뤄양은 세계문화유산 용문석굴을 비롯 주나라부터 현재까지 다양하고 많은 유적지와 문물이 남아 있는 곳이다.  

수 나라 때 처음 만들어진 뤄양 고성의 서대문 여경문은 2002년에 복원되었으며, 성문루, 성벽 등으로 이루어졌다. 뤄양의 대표 건축물로 당시 여경문 안쪽은 관청과 관리들이 거주하던 곳이었다. 지금은 먹거리, 숙박, 관광, 쇼핑까지 즐기는 관광구역으로 매우 붐비는 곳이 되었다. 뒤쪽 거리는 옛날부터 가난으로 내몰린 사람들이 성루 주변에서 관광객을 대상으로 장사를 시작한 것이 수천 년을 지나 지금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용문석굴과 불상
봉선사 용문 석굴


뤄양의 상징인 용문석굴은 이하강을 기준으로 서산 석굴과 동산 석굴 그리고 장제스의 별장이 있던 향산사, 당대 시인 백거이의 무덤이 있는 백원까지 4구역으로 되어있다. 용문석굴은 낙양시 외곽을 흐르는 이하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용문산과 향산의 암벽을 따라 약 1.5km에 조성되어 있다. 북위시대인 5세기 말부터 당나라 때인 9세기까지 2,300여 개의 석굴과 벽감이 조성되었다. 그 내부에는 10만 개가 넘는 불상, 2,800여 개의 명문, 40여 개의 탑이 조각되어 있다. 뤄양의 용문석굴은 대동의 운강석굴, 둔황의 막고굴과 더불어 중국 3대 석굴로 칭해지며, 예술성이 높고 정교하여 아름다운 조각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미신과 도굴, 문화혁명 등으로 인해 많이 훼손된 상태이다.

그중 당나라 불교조각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봉선사의 불상은 귀 길이만 해도 1.9m, 규모도 가장 크고 예술적인 가치가 높아 용문석굴 대표 브랜드이다. 총 9개의 불상 중 후덕한 얼굴형, 높은 코, 얇은 입술로 옅은 미소를 머금고 있는 석가모니 불상은 막대한 건축자금을 대면서 남다른 애정을 보였던 측천무후를 모델로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뤄양 석굴의 엄청난 규모에 놀랐고, 마애석불의 표정과 정교한 조각에도 놀랐다. 후대가 누리는 즐거움의 뒤안길에는 잊지 말아야 하는 사람들의 노고들이 있다는 것을!!!


향산사


이하를 건너 대만의 초대 대통령인 장제스의 별장이 있어 유명한 향산사를 찾아 좁고 가파른 계단을 올라야 했다. 헉헉 숨이 턱까지 찼지만 향산사 마당에서 바라보는 이하강 건너편 서산 석굴은 고요한 풍경으로 다가왔다. 향산사 위쪽에 장송별장이라 불리는 장제스 별장이 있지만 방과 복도마다 중국 혁명 지도자 쑨원 사진이 걸려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천자가륙박물관 입구


 13개 왕조의 통치를 받으며 변화한 뤄양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은 뤄양 박물관이다. 국가 3A급 관광구역이 이곳에는 석기시대부터 명청시대까지 이 곳에서 출토된 유물 40만 점이 전시되어 있다.

마차를 끄는 커다란 여섯 마리의 말 동상 옆 지하로 연결된 천자가륙박물관 입구가 나온다. 호경에서 뤄양으로 도읍을 옮긴 이후의 동주시대 대형 순장 거마갱을 볼 수 있는 곳으로 발굴할 당시 모습을 그대로 두고 그 위에 박물관이 건립되었다. 이 거마갱의 발견은 중국 역사서에 적힌 '천자가륙' 황제 또는 동급의 황족이 출행할 때는 말 6마리를 묶어 끌고 다녔다는 기록을 증명해 준 의미가 있는 곳이다. 입구로 들어가면 제1전시실과 발굴 현장이 보존된 제2전시실로 나뉜다.


천자가류거마갱처


박물관을 대표하는 제2 전시실은 '천자가륙'이라고 쓰인 거마갱으로 길이 42.6m, 폭 7.4m의 구덩이 안에 순장거 26대와 말 70마리가 있다. 이곳은 동주 시대의 왕이 죽으면서 그와 함께 지내던 애마 6마리와 부장품, 마부, 개 등을 모두 생매장한 무덤이다. 마차 앞에 말이 각 2마리, 4마리, 6마리 등 3가지 등급으로 나뉘어 있던 동주시대 마차 사용 제도를 그대로 보여주는 곳이라 했다. 또한 거마를 두는 모양은 마차를 타고 가는 모습 그대로 두었고, 마차를 2줄을 두어 남북 방향으로 순서를 지켜 나아가는 순장의 풍속이 담긴 흔적이 있었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절 백마사


백마사는 후한 명제 때 불교의 중국 전래와 관련된 사찰로 낙양 교외 12km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총면적은 4만여㎡에 달한다. 문헌으로 확인되는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절이다. 두 인도 승려가 후한의 사신을 따라 하얀 말에 불경과 불상을 싣고 뤄양에 왔다는 전설에 따라 백마사라는 이름이 붙었다. 사찰의 입구 양쪽에 두 마리의 백마상이 있고, 3개의 아치형 대문으로 이루어져 한나라 시대의 건축 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붉은 담장과 지붕 위의 석상들이 익숙한 느낌이었다.


운대산의 홍석협


1,308m 높이의 운대산은 항상 봉우리가 구름과 안개에 싸여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삼보일천, 오보일폭, 십보일담이라는 말이 있듯 세 발자국 가면 샘이 있고, 다섯 발자국 가면 폭포가 나오고, 열 발자국 가면 깊은 못이 나온다고 한다. 그만큼 물이 많고, 계곡이 깊고, 폭포가 곳곳에 있다. 중국의 그랜드 캐니언이라고 불릴 만큼 붉은 협곡이 아름다운 곳이다. 중국 최초로 세계 지질공원, 국가 5A급 여유구로 지정될 정도로 근사한 곳이다. 붉은 협곡 사이로 푸른 물이 하얗게 흘러내리는 모습은 한 폭의 그림이다. 층층이 쌓인 협곡 중간에 보행로를 만들었다. 너무도 멋진 풍경, 자연이 만들어낸 작품에 매료되었다. 필름 카메라로 찍은 사진에 겹겹이 늘어선 붉은 협곡과 두 협곡을 이어주는 석교가 제법 잘 표현되어 있다.


홍석협 폭포
홍석협의 자연교각


매표소를 통과해 협곡 아래 이어진 길을 따라 걷다 협곡을 이어주는 다리를 건너면서 언뜻 보이는 풍경에 매료되었다. 겨울에 이 정도인데 봄가을에 오면 참 좋겠다. 수백 미터 낭떠러지 양 옆으로 층층이 쌓여있는 붉은 사암, 초록의 호수와 물길을 이어주는 자연 교각이 너무도 멋진 곳이었다. 홍석협은 먼 옛날 2,300만 년 전에 생겼는데,  붉은색의 절벽이 장관을 이루고 있어 중국 제일 기묘한 협곡, 유네스코 문화유산이 되었다.  

홍석협 가는 길에 만났던 파흔석, 바위에 담긴 파도의 연흔들이 가득했던 암석을 만났다. 이 곳은 과거 지각변동으로 바다였던 땅이 육지로 솟구치는 조산 운동을 짐작할 수 있다.  



전동차로 내려와 지질박물관을 관람하고 연못, 폭포, 협곡을 만날 수 있는 담폭협에 도착했는데 겨울이라 폭포가 얼어 있었다. 용사담, 청심담, 금담, 청련지 등의 연못과 연인폭포, 커튼폭포, Y자형 폭포 등 많은 폭포와 협곡, 사층리를 관찰할 수 있었다. 땅이 넓어서인지 독특한 지형과 자연유산이 많은가보다. 많이 부럽다.


개봉부


인구 457만개봉은 춘추전국 시대 위나라,  5대 10국, 북송의 수도였던 곳이다. 황하강 주변 평원에 위치하여 운하와 교통의 중심이 되었지만, 반면 외부 침략에 방어가 어려워 진시황의 통일 과정에서 파괴되었다. 이후 수당시대 만들어진 대운하로 인해 수운 중심의 상업도시로 성장했다.

당의 멸망 이후 5대 10국 및 북송의 수도로 불야성이라는 단어의 어원이 된 도시로 알려져 있다.  북송 시대 경제력이 극에 달해 전성기를 맞이한 도시를 보고 사람들이 밤이 없는 도시로, 대낮같이 밝은 곳이라는 뜻이다. 송나라 시대 개봉은 변경이라고 불렸고, 당시의 중심 청사를 복원한 곳이 개봉부이다.


1234년 개봉이 도읍인 금나라가 몽골과 남송의 군대에 의해 멸망하게 되고, 1279년에는 남송 역시 몽골에게 지배를 받게 되었다. 1368년 명나라가 건국되면서 허난 성을 설치하였고, 개봉은 허난 성의 성도가 되었다. 명나라 말기 이자성의 난과 황하 물줄기를 이용한 전쟁으로 3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사망하였으며, 도시는 황폐화되었다. 청나라 강희제 이후 개봉은 재건되었지만 홍수가 일어나 1843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다시 재건되었다.



포청천의 포공사


 포공사는 우리나라 TV에서도 방영되었던 개작두를 대령하라고 호령하던 포증을 기리는 사당이다. 포증을 중국인들은 포공이라고 하고 그 이름을 딴 사당이 포공사이다. 공정함이 밝음을 낳는다와 같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공정하게 일 처리하던 포공, 15개월 남짓 근무한 포공을 기리는 도시이다. 그래서 공직자들의 청렴과 공정함이 귀감이 되는 곳이다. 철면무사, 얼굴에 철면을 쓰고 사사로움을 없애야 한다는 모 항공사에서 '중원에서 답을 얻다'라는 광고가 떠오르는 곳이다. 포공호라는 호수 주변에 위치하고 있어서 포공사 전체가 마치 정원 같은 느낌이 든다.



개봉 종루


천파양부는 북송의 양업 장군 가옥으로 개봉 서북쪽 성문 천파문 옆에 위치해 천파양부라 이름 지어졌다. 양씨 집안은 대대로 나라를 위해 충성을 바쳐 태종의 총애를 받았으며, 황제의 명에 따라 궁중 문무관이 천파양부 앞을 지날 경우 반드시 말과 가마에서 내려 예의를 갖추었다. 충신 양씨 집안의 양가장 이야기를 통해 중국인에게 널리 알려졌으며, 삼국지나 수호전 만큼 친숙하게 얄려져있다고 한다. 천파양부는 대문, 조벽, 종루, 천파루, 동서배전, 후전 등으로 구성되어있다.


천파양부 내부 정원
동경몽화 공연


개봉 서북부에 위치한 청명상하원은 시내 유일한 5A급 관광지로 중국 역사상 압도적인 경제력을 배경으로 높은 문화의 꽃을 피운 북송 시대를 재현한 관광지이다. 북송 화가 장택단의 작품인 <청명상하도> 속에 나오는 경치를 1대 1 비율로 복원한 곳이다.

 우리나라 민속촌과 같이 관광지 안에 1천여 명 직원이 송나라 복장을 하고 이곳저곳에서 전통혼례 등 당시 생활 풍경을 재현하고 있다. 관광객이 북송의 문화를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체험행사도 많이 진행하고 있다. 당시 중국의 정원과 건축물의 아름다운 조화를 만날 수 있는 곳이다.

관광객에게 음악극 형식으로 북송의 역사를 보여주는 야외 공연인 <대송-동경몽화>를  진행하는데 엄청난 규모로 진행하고 있다. 약 700명의 배우와 수십 필의 말이 동원되어 한 편의 뮤지컬 처럼 보여주는 공연이다.


예전, 학생들과 중국 역사 수업할 때가 떠올랐다. 3-4명의 학생들이 조를 편성하여 PPT로 발표했던 방식으로 발표수업 위주로 진행했다. 수업 과제가 몹시 힘들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수업이었다는 학생들의 이야기를 종종 들었다.  중국의 오랜 역사와 왕조의 이야기들을  재미나게 만들었던 학생들은 스스로 문제와 답을 찾고 친구들을 쉽게 이해시키는 과정에서 본인들이 더 공부되었다고 하였다. 이러한 학습 방법이 바로 자기주도학습이었나 보다. 입시위주의 교육이 아닌 스스로 문제를 찾고 해결책을 세워보는 활동은 교육에만 국한되지는 않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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