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손경희 Jan 15. 2021

북인도 여행

인도로 가는 길

2019년 1월 25일, 아시아나 비행기에 몸을 싣고 약 9시간을 날아 뉴델리 인디라 간디 공항에 도착한 것은 밤 11시 30분. 우리나라에서 남서쪽으로 지도상 거리 5,000km 떨어져 있다. 표준시는 그리니치 천문대보다 5시간 30분 빠르지만, 우리나라보다 3시간 30분 늦다.      


휴~~ 인도로 가는 길, 몹시 멀고도 험난했다. 외국인 입국 심사를 하는 과정에 걸린 시간이 3시간이 넘었다. 밤이라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여권 기초 데이터를 수작업으로 입력, 돌아가신 부모님의 성함까지 기재하고, 손가락 지문을 남겨야 했다. 비자비용을 직접 지불하고 그 영수증을 제시하여야 입국 게이트의 문이 열리는 인도 공항 시스템. 미리 신청해 온 e-비자 코너도 만만치 않게 줄이 길게 서있다. 다들 녹초가 되어 버린 상황. 입국장 원형의 조형물 속 큼직한 부처님의 손길이 절실히 필요한 곳이었다. 인도라는 두 글자 2 행시를 지으면서 시간을 보내는데, 인내심의 한계를 넘어 도를 깨닫게 하는 곳이 인도 공항이었다.      

드디어 입국 심사가 완료되고 낯익은 가이드 비제이를 만났다. 모 TV 서프라이즈 프로그램에 간간이 출연하는 인도 배우였다. 어쩐지 낯이 익은 비제이는 S대에서 학위 과정을 밟고 있는 똘똘한 인도 청년이었다. 겨울 기간은 인도에 와서 가이드를 하며 학비를 번다고 했다. 인도에서는 그러려니 하고 지내야 한다는 말에 맞아!! 그래서 인도를 왔는데......      

 

 인디라 간디 국제공항 외관
인디라 간디 국제공항 내부


  새벽에 체크인하고 잠깐 머물던 시티파크 호텔. 조식을 먹는데 두부 카레와 시금치 카레를 비롯 다양한 카레요리가 많았다. 난이라는 동그란 밀떡 같은 것에 여러 종류의 카레를 싸 먹거나 찍어먹었다. 그동안 나는 고기와 감자 등의 재료로 만든 카레 요리만 생각했었다. 세상의 모든  식재료가 카레와 함께한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편견과 선입견이 탁 깨졌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맞았다. 경험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으로, 직접 먹어보고 만져보고 느껴보는 여행의 가치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     


꾸뜹 미나르
꾸뜹 미나르 철탑


뉴델리 곳곳에서 1월 26일 인도 독립기념행사 준비로 분주한 가운데 꾸뜹 미나르를 향했다. 꾸뜹 미나르는 델리 최초의 이슬람 족 노예 왕조 꾸뜹 딘 아이바크가 힌두 왕국을 멸망시키고 기념으로 세운 승리 탑이다. 1193년에 건립했으나 175년 뒤 1368년 완공되었다. 아프가니스탄의 잠무 탑을 본떠 만들었으며 각 층 사이에 발코니가 있고, 379개의 나선형 계단이 있다. 흰두문화와 이슬람 문화가 혼합된 73미터, 5층 석탑이다. 4세기에 세워진 높이 7.2m의 철기둥에는 승리의 글이 새겨져 있는데 1000년이 지난 지금도 녹슬지 않고 있다.

 

일투드미쉬 무덤
쿠와트왈 이슬람 모스크


건너편 석탑이 보이는 곳에 위치한 사원의 돌무덤은 꾸뜹딘아이바크의 후계자 일투트미쉬의 이슬람식 무덤이다. 붉은 벽면에 새겨진 기하하적 무늬와 이슬람 건축 구조가 돋보였다. 가장 오래된 이슬람 사원, '이슬람의 힘'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쿠와타 왈 이슬람 모스크를 둘러보았다. 힌두 문화가 엿보이는 양식으로 붉은 사암의 빛깔과 섬세한 조각이 아름다운 곳이다. 곳곳에 작은 이슬람 사원들이 더 있었다. 알라이 다르와자는 대리석이 포함된 붉은 사암 건축물이었다. 이곳 전체가 세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는 델리의 대표적인 유적지다.  창경궁과 종묘를 인도인들에게 보여준다면 인도인들도  이렇게 놀라겠지!!!  우리는 4계절의 변화까지 있으므로 더욱 다양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는 자부심과 함께 말이다.


쿠와트왈 모스크에서 인도 학생들과


쿠와트왈 이슬람 모스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는데 인도의 초중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푸른 윗옷과 흰색 바지가 교복인 듯했다. 모두들 하얀 스카프를 두르고 낯선 이국인에게 호기심을 보였다. 소녀들에게 미소를 띠며 바라보자, 천진함으로 다가오는 학생들은 활짝 웃으며 스스럼없이 말을 건네고, 사진 찍자고 모였다. 여학생들과 함께 유쾌한 기념샷을 남겼다.  
  

인디아 게이트
대통령 관저와 간디공원


 인도 뉴델리의 중앙 교차로에 서 있는 인디아 게이트, 영국 식민 시절, 영국의 독립 약속을 믿고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약 9만여 명 인도 병사의 넋을 추모하는 위령탑이다. 뉴델리 설계를 주도한 영국인 건축가 에드윈 루티엔스가 설계를 맡아 1921년에 착공하고 10년 만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매년 1월 26일 열병 의식이 열리는 독립 기념행사를 크게 할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곳곳의 도로를 통제하기 시작했다. 건너편에  정치인과 공무원 경찰과 군인들이 모여 사는 거주 구역은 무척 넓고 화려하다. 대통령 궁을 비롯한 외교부 건물들이 모여있는 라즈파트 지역은 넓은 정원에 나무들이 가득하고, 도로도 넓고 깨끗하게 정비되어 있다.  대통령 관저는 340칸의 본관 건물과 접견실, 객실, 사무실이 있다. 또한 거대한 정원과 경호원 및 직원들이 머물 수 있는 거주지와 편의시설, 기타 사무실을 포함하고 있어 면적 면에서 세계 각국의 대통령 가옥 중 가장 큰 곳이라고 할 수 있다. 국회의사당은 영국이 인도를 위한 새로운 행정 수도를 건설하는 과정 중에 인디아 게이트 설계한 건축가 에드인 루텐스에 의해 설계, 1927년에 완성되었다.      


간디의 화장터 자르가트


  간디 박물관은 마하트마 간디가 1948년 1월 30일 암살되기 전까지 생전 144일을 보낸 공간이다. 간디의 마지막을 함께했던 물레, 간디의 조각상 등이 있다. 극우파 힌두 청년에게 암살당한 간디의 유해를 화장한 곳이 자르가트. 가트란 원래 갠지스 강가와 맞닿아 있는 계단을 뜻하지만 이제는 화장터를 뜻하는 말이 되었다.  원래 천계에 흐르던 강이 쉬바 신의 도움을 받아 지상에 내려온 갠지스 강. 갠지즈에 목욕을 하면 죄가 씻겨 나가고, 간절한 소원도 성취된다고 힌두교도들은 믿고 있다. 자르 가트는 추모 공원으로 조성된 간디의 화장터로 연 1,000만 명의 참배객이 방문하는 곳이다. 1년 내내 꺼지지 않는 불꽃이 타오르고 검은색 대리석과 그 위 간디의 마지막 말이라는 "헤이람(오 신이여!)"이 새겨져 있다. 직접 참배는 못했지만 간디공원은 꽤 넓어 부러운 공간이었다.  


아그라센 키 바올리


라즈파트 지역 우아한 레스토랑에서 카레로 점심을 먹고 근처에 위치한 계단식 우물 아그라센 키 바올리를 찾았다. 아마도 아그라센왕이 지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계단식으로 연결된 깊은 우물을 바올리라고 한다. 건조한 지역에서 물이 금방 증발하므로 우물을 깊게 파서 계단으로 연결하는 구조를 만들었다. 점차 우물을 꾸미기 시작했는데 이곳은 전형적인 이슬람 형식의 우물로 기하학적 무늬가 인상적인 곳이다. 길이 60m, 폭 15m의 우물 깊숙이 내려가면 냄새가 심하고 지저분하지만 핫 스폿 지역이다. 금세 올라와 계단에 앉아서 산들바람, 푸른 나무에 몸을 기대고 잠시 쉬었다. 독특한 건조지역의 우물을 들여다보면서 기후가 인간에 미치는 다양한 영향을 떠올렸다.  뉴델리를 뒤로하고 5시간을 달려 무굴 제국의 수도 아그라로 향했다.

  

아바네리 찬드 바오리  간이시장
찬드 바오리 아치형 회랑
아바네리 찬드 바오리


 아그라 가는 중간에 들른 아바네리 찬드 바오리. 입구에 관광객을 위한 작은 시장이 들어서 있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명소라는 의미인데, 피부가 가무잡잡한 인도인들이 흙먼지 날리는 곳에 천막을 치고 과일과 기념품, 스카프 등을 팔고 있었다.

철문 안으로 들어가니 아치형의 긴 회랑이 연결되어있고  옆에 네모난 모양의 거대한 석조형 우물이 있었다. 지그재그로 이어진 13단계의 계단식 바오리는 그 자체가 독특한 구조를 보여주었다. 이 곳은 영화 '더 폴'에 나왔던 곳으로 섬세한 조각과 신기한 구조가 눈길을 끌었던 곳이다. 계단은 무려 3,500개, 지하 7층의 깊이를 자랑하는 거대한 규모의 바오리이다. 건조한 지역에서 귀중한 자원인 물을 정치권력에 이용하는 권력자들의 모습이 그려졌다. 사진으로는 그 규모가 잘 느껴지지 않지만 실제로는 정말 크다. 중간 부근에 통치자가 시원한 공간을 마련하여 시원한 우물 속에서 더운 여름을 보냈던 별궁이 자리 잡고 있다. 세계 여러 지역의 우물을 찾아다니는 여행도 나름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바네리 힌두사원과 유채꽃
인도인과 힌두사원


 계단식 우물 바오리 바로 옆에 자리 잡은 힌두교 사원을 들렀다. 사원은 규모가 작았지만 소박하고 정갈했다. 신발을 벗고 사원에 올라 내려다보니 노란 유채꽃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노란 꽃밭 사이 듬성듬성 서있는 키 큰 나무들이 푸른 경치를 선사하던 풍경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사원에 참배를 하던 인도인의 모습도 우리네 이웃과 다르지 않았다. 다만 피부가 검고 턱수염이 길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평범한 우리의 일상이었다.
 

네루와 간디-신문자료
인도 서부 구자라트 파텔 동상-신문자료


 최근 인도 서부 구자라트주 사두벳섬에 높이 182m의 세계 최대 통합의 상이 세워졌다. 간디 혹은 네루처럼 인도를 상징하는 인물이 아닌  파텔 인도 초대 부총리이다. 파텔은 간디의 오랜 동지이자 벗이었고, 초대 부총리를 지낸 인물이다.  파텔은 간디·네루와 더불어 인도 독립을 주도한 정치 지도자다. 셋의 성향은 달랐다. 파텔은 힌두 민족주의자였던 반면 간디는 힌두교-이슬람교 간 화합을 강조했고, 네루는 사회주의자인 동시에 정교분리를 중시했다. 인도의 역사도 우리의 역사와 많이 닮아있다. 인도 여행을 하면서 곳곳에 남겨진 이슬람의 파괴 현장을 느끼고, 영국의 지배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영국과 이슬람에 결탁한 인도의 권력자들은 지금까지도 막대한 부를 누리고 있고, 수많은 인도 국민들은 여전히 어려움 속에 살아간다. 공화정 형태의 인도 현 대통령은 상징적 존재이고, 실질적 권한은 힌두교도 모디 총리에게 있다. 모디는 파텔의 힌두교 민족주의를 내세우며 정치를 하고 있다. 국민의 80%는 힌두교도이고, 이슬람교도는 14% 정도이다. 파텔의 동상이 인도 정치에 어떻게 등장하는지는 선거를 보면 알 수 있다.

파텔의 동상은 2013년부터 시작하여 5년 정도 걸렸고, 비용은 우리 돈으로 약 5,000억 원이 들었다. 2018년 모 언론보도에 의하면 힌두교 국가 인도에서 이슬람 문화가 융합된 타지마할을 주요 관광지 소개에서 제외하고 간디와 네루에 대한 교과서 내용도 삭제한다는 내용도 있었다. 후대를 먹여 살리는 귀중한 재원은 정치보다 문화유산에 우위에 있다고 생각했다.


타지마할 연극 공연


아그라에 도착하니 부슬부슬 비가 내린다. 인도 영화 대신 타지마할 뮤지컬 쇼를 관람했다. 한글로 번역이 되어 설명을 들을 수 있으니 이해는 쉬웠다.  샤자한 왕과 뭄타즈 마할의 사랑이야기를 다룬 내용이다. 화려한 쇼가 끝나고 기념품 집에서 대리석으로 만든 타지마할 묘당 조각품을 하나 장만했다. 타지마할은 언젠가 꼭 한번 보고 싶었던 건축물이다. 하얀 대리석에 알알이 박힌 보석과 아름다운 아라베스크가 새겨진 불가사의한 건축물. 정치와 종교의 문제를 떠나 타지마할은 세계의 불가사의한 건축 문화유산이며, 세계인을 인도로 불러들이는 문화유산이다.
  

타지마할 입구에서
수면에 비친 타지마할 묘당


 다음날, 타지마할 묘당을 만나기 위해 아침 일찍 나섰다. 타지마할은 1983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인도의 대표적 인도이슬람 건축물이다. 무굴제국의 왕 샤 자한(Shah Jahan)이 아이를 낳다가 세상을 떠난 부인 뭄타즈를 추모하며 만든 무덤이다. 1,631년에 짓기 시작하여 22년 만인 1,653년에야 완공된 순백의 대리석 건축물은 완벽한 좌우 대칭을 이루었다. 무늬를 박아 넣는 피에뜨라 두라 기법을 활용하여 보석과 준보석으로 정교하게 장식되어 있다. 하얀 대리석으로 만든 순백의 아름다운 건축물이 수면에 비출 때 똑같은 디자인이 나오지 않도록 디자이너의 손목을 자른 이야기. 왕비의 죽음을 슬퍼하여 정사를 돌보지 않고 대규모 공사 추진으로 침체된 정권. 쿠데타에 의하여 권력을 차지한 아들에 의해 유폐된 황제의 이야기, 건너편 왕궁 감옥에 갇혀 강 건너 타지마할을 바라보던 샤자한 왕의 마음속에 백성은 아예 없었을까? 너무도 아름다운 건물에 담긴 역사의 한 페이지를 바라보며, 힌두 국가 인도에 남겨진 이슬람 문화의 영향과 운명을 추론해보았다.  
  

붉은 아그라성 외부
아그라성 내부 정원
타지마할을 바라보던 포로의 탑


 아그라 성은 1,565년 무굴 제국 제3대 황제인 악바르에 의해 만들어졌다. 무굴제국 전성기를 누리던 악바르의 손자가 바로 타지마할을 지은 샤 자한 왕이다. 그는 아그라성에 대리석으로 보강하고 규모도 증축하였다.  길이 2.5km에 달하는 붉은빛의 사암 성벽은 견고하여 현재도 일부는 군사 시설로 사용되고 있다. 아그라 성에 있는 '무삼만 버즈(포로의 탑)' 은 샤 자한이 말년에 아들에 의해 유폐되어 살았던 곳이다. 이 곳 테라스에서 건너편 타지마할을 바라보며 쓸쓸히 죽어갔다고 전해진다. 감옥이라 여겼던 장소는 아름다운 건축물이며, 모자이크와 아라베스크의 수려함이 하얀 대리석에서 빛나고 있었다. 왕의 시신을 수습한 공주에 의하여 강을 건너 간 이동 경로가 눈에 들어왔다. 아름답고 슬퍼도 권력을 누렸던 지배자들의 이야기다. 왕의 사랑은 타지마할 묘당에 순백의 스토리로 빛났지만 민중의 마음은 아그라성의 붉은빛으로 타오르지 않았을까? 생각을 해보았다.     


암베르 성과 정원 앞 거울 궁전
암베르 성 입구 광장
아라베스크 문양 벽면


 궁전이 있는 호수를 지나 암베르 성 입구에 당도. 성 위까지 코끼리를 타고 가는 방법도 있지만 다소 위험성이 있다고 판단, 지프를 타고 암베르 성에 올라갔다. 암베르 성은 인도의 만리장성이라 하며, 인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곳이다. 자이푸르 시내에서 11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암베르 성은 1,592년 마하라 자만 싱 왕이 건축하여 약 150년에 걸쳐 보수되고 확장되며, 18세기 스와이 자이싱 왕에 의해 현재의 모습으로 완성되었다고 한다.

 '하늘의 성'이란 뜻을 가진 암베르 성은 붉은 사암과 대리석을 이용해 힌두와 이슬람 양식에 의해 건축되었다. 아래 문을 통과하면 쟈이갈 요새가 나온다. 정교하고 튼튼하게 지어진 암베르 성은  아그라 성이나 델리의 붉은 요새보다 훨씬 웅장하고 화려하며. 위로 자하 가르 성이 보인다.  암베르 성이나 자하가르 성은 가파른 암벽 위에 세워져 함락하기가 쉽지 않았고,  암베르 성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산등성이를  에워싸고 있었다.


왕의 거처 가네샤
왕비의 거처 쉬시마할


암베르 성 안에 조성된 정원은 이슬람의 영향을 많이 받아 기하학적 평면 형태를 띠고 있다. 정원과 광장을 지나면 오른쪽에 보이는 '태양의 문'이 나온다. 태양의 문은  왕이 출입하는 곳이고 달의 문은 신하나 일반인들이 사용했다.  왕들의 거처로 사용됐던 '가네샤' , 왕비의 거처 '쉬시마할 ', 거울 궁전으로 통하는 복도는 미로처럼 복잡했다. 쉬시마할은 거울과 장식이 묘하게 어우러져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을 연상하게 했다. 각도를 달리하여 거울에 비친 모습을 사진으로 찍으니 재미있다. 왕비의 거처에는 경비병이 보이지 않도록 문살의 각도를 이용하여 조정했고 이동 통로는 매우 좁았으며,  벽면을 아름답게 모자이크 해 놓았다. 창문은 나무로 조각하여 밖이 내다보였고, 스테인드 그라스로 만들어졌다. 성 안 곳곳을 돌아다녀 봤는데 각각의 이야기와 건축 공간, 벽면 구조의 아름다움이 대단한 곳이었다.

     

핑크시티 게이트
바람의 궁전 내부에서


자이푸르는  인도 라자스탄주의 주도로, 도로와 철도 등 교통망이 정비된 상공업 도시이다.  2011년 기준 인구가 305만이었으나 성장이 빠른 곳으로 매년 3%의 인구가 증가하고 있는 곳이다.  2018년에는 약 180만 명의 관광객들이 찾아왔다고 한다. 사각형의 계획도시로 거리 전체가 분홍색이라 ‘핑크도시’로도 알려져 있는 곳이다. 18세기 초 무굴 제국 쇠퇴 시기,  자이 싱 2세에 의해 세워진 자이푸르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도 등재되어 있다. 고대 힌두교의 연구서, 실파 샤스타를 따라 설계한 자이푸르는 직선 방사형의 거리와 길과 도로, 가옥이 늘어선 격자 시스템으로 설계되었다. 성벽 밖 정글의 맹수와 외국군대의 침입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7개의 대문을 가진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1876년 에드워드 7세로 등극하는 웨일스 왕자의 방문으로  귀한 손님을 맞기 위해 새로 페인트칠을 하려는데, 계약을 맺은 업자가 다양한 페인트를 확보할 수 없자 모든 벽을 핑크빛으로 칠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 핑크빛은 라자스탄 문화에서 환영의 의미로 정하고, 1877년 분홍색 외관을 칠하는 법을 정하고 있다.


바람의 궁전 외부에서
핑크시티 상가거리


사방 5km 반경으로 이루어진 자이푸르의 심장부, 상가네리 게이트를 따라 들어가면 핑크시티. 바람의 궁전이 수많은 상가들과 줄지어 서있다. 바람의 궁전, 하와 마할은  1799년에 왕궁 확장 과정에서 새롭게 생긴 곳이다. 붉은색과 분홍색 사암으로 지어져 있는데 건물 전체에 900개가 넘는 창문이 달려 있다. 창문을 모두 열면 내부에서는 한여름에도 시원한 바람을 맞을 수 있어 '바람의 궁전'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햇빛을 받으면  창문과 테라스가 화려하게 빛나고, 찬란한 빛들이 궁전 내부를 채운다. 바람의 궁전은 애초 밖으로 나가지 못한 여인들이 창문을 통해 시장을 구경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밖을 향한 수많은 창문과 테라스를 통해 시장의 활기와 세상 사는 이야기에 귀기울였을 이 곳 여인들을 떠올리며 한 편의 드라마를 상상해보았다.


라씨 왈라의 라씨
헤나 문신


 핑크시티 구시가지 재래시장 구경도 재미가 쏠쏠했다. 여러 종류의 기념품들이 즐비하여 그냥 지나치기가 어렵다. 아름다운 무늬로 디자인된 타일 수건걸이, 마그네틱과 수제 인형, 치약과 립밤 등을 장만했다. 가죽 가방, 신발, 스카프와 도자기 등 사고 싶은 값싼 물건들이 많았다. 이렇게 아름답고 값싼 물건이 천지에 널린 시장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의 핑크시티였다.  

라씨는 냉장고에 넣어두거나 얼음과 함께 갈아 시원하게 하여 마시는 요구르트의 일종이다. 날씨가 무덥기 때문에 인도인들이 일상적으로 즐겨 먹는다. 또 지역에 따라 선호하는 맛이 다르다. 전통적인 라씨는 짠맛이 강하며, 커민이나 칠리 고추 등을 갈아 넣어 맛을 낸다. 시장에서 라씨를 마시고 토기로 만든 그릇은 깨트려 쓰레기통에 버렸다. 인도의 전통이 그리 한다. 라씨를 마시는 중에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간다. 시내버스가 달려오자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 타려고 아우성을 치는 모습이 우리나라 60년대와 흡사하다. 권력자들의 이야기보다 시장에서 사람 사는 모습이 훨씬 재미있다. 시장을 나와  헤나 염색으로 나비모양의 문신을 해봤다. 자연 염색으로 보름 후에 지워진다고 하여 재미 삼아해 보았다.


태양의 그림자로 만든 해시계
잔타르만타르


 그리고 인도의 첨성대라고 할 수 있는 잔타르 만타르를 찾아갔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는 곳이다.

 잔타르 만타르는 자이푸르를 세운 마하라자 자이 싱 2세에 의해 이 지역의 돌과 대리석으로 만들었다. 왕은 천문학에 매우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직접 설계한 천문학 관측소를 자이푸르와 델리, 바라나시 등에 만들었다. 자이푸르 관측소는 아직도 건재하며, 16개의 관측장비를 가지고 있다. 30m 높이의 삼랏 얀트라(Samrat Yantra)는 세계에서 가장 큰 해시계이다. 삼랏 얀트라의 면은 자이푸르의 위도인 27도만큼 기울어져 있다.  꼭대기에 있는 작은 돔 모양의 전망대는 달과 별, 계절풍이 오는 것 등을 관측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1901년 완전 복구가 이루어졌고, 1948년 잔타르 만타르는 국가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자이푸르 박물관 전면
인도 복장의 커플


 자이푸르 박물관은 아름다운 외관을 가진 건물로 관광객들에게 인기 있는 곳이다. 낮에 봤을 때의 화려한 외관은 밤에 색색의 조명으로 아름답게 빛난다. 건물은 19세기에 지어졌으며, 무굴제국의 유물들이 전시되고 있었다. 건축가 스윈튼 자콥이 설계한 인도-사라센 양식의 건축물 ‘앨버트 홀’을 전시관으로 사용 중이었다. 건물 위층에는 자이푸르 왕가의 초상화들이 전시돼 있으며, 미니어처 회화, 장식품, 금속류, 조각, 카펫, 장난감, 무기, 직물 등 지역의 문화와 역사를 표현하는 유물들을 많았다. 박물관의 매력 가운데 하나는 음악과 춤만을 위해 만든 중앙 전시관. 이곳에는 민속 고전 악기들이 전시되고 있었다. 이 곳의 역사를 지켜봤을 박물관 뜰, 앞에는 비둘기가 하염없이 먹이를 찾아 날아다니고 있다.


물 위의 궁전
항아리를 든 인도 여인


 지프차를 타고 나하르가르 성에 일몰 감상을 하러 가는 길에 호수 안에 세워진 물의 궁전을 보았다. 물의 궁전은 왕의 가족들이 더운 여름을 보내기 위하여 호수 안에 만든 여름 궁전이다. 18세기에 마하라자 자이 싱 2세가 지은 5층 규모의 아름다운 궁전으로 만 사가르 호수 가운데 있어 '물의 궁전'이라고 불린다. 과거에는 궁전까지 이어진 인도를 따라 들어갈 수가 있었으나 현재는 물에 잠겨 있어 입장을 할 수 없다. 무굴 양식과 라자스탄 타입의 건축이 혼재된 건물로서 네 귀퉁이의 8각형 챠트리(우산)가 있다. 만 사가르 호수는 철새 도래지라 그런지 호수 위를 날아다니는 새들이 많았다. 인도의 전통 복장을 한 여인이 사진을 찍자고 다가온다.  독특한 복장과 차림새를 보니 관광객과 함께 사진 찍고 용돈을 버는 듯했다.


나하르 가르 성 전망대 풍경


호수 속에 세워진 물의 궁전에서 출발, 지프차를 타고 구불구불한 길을 약 20분 정도 올라갔다. 나하르가르는 현지인들에게는 호랑이의 성으로 이름이 알려진 곳으로, 방어의 목적으로 지어진 성이었다. 1857년 세포이 항쟁 때 이 근방 폭도들이 일으킨 폭력 사태로부터 도망쳐 온 유럽인들의 피난처가 되기도 했다. 1880년에는 사와이 마도 싱 왕의 여름 별장이기도 했으며 아홉 명의 아내를 위해 별궁을 배치하였다. 암베르 성이 여성적인 우아함을 지니고 있다면 나하르가르는 남성적인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나하르가르 성에 올라가는 지프차 안에서 신나는 인도 음악을 듣고 같이 다니는 언니들과 국민체조로 신나게 흔들어대니 어깨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마음이 통하고, 같은 방을 쓰는 언니들과 함께 다니니 재미있었다.

인도 음악이나 우리 음악이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지금은 자이푸르의 야경과 일몰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포인트 지역으로 주민들의 사랑받는 곳이 있다. 바로 나하르가르 성 전망대이다. 산 아래 자이푸르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오고, 산 위에 노을빛 받은 성벽이 화려하게 피어나고 있었다. 성벽 전망대에 올라 일몰을 감상하며, 인도 맥주 킹피셔를 한잔 마셨다. 석양에 물들어가는 자이푸르의 모습은 평온하고 여유로운 느낌이었다. 높이에 따른 통제의 시선은 권력이라는 건축가들의 이야기에 공감한다. 높은 곳에서 바라보니 자이푸르 시가지가 한눈에 다 보였다.


낡은 비행기 타고 로 바라나시로


다음날 새벽 아주 낡은 비행기를 타고, 바라나시로 향했다. 바라나시는 인도의 색깔이 분명한 곳이다. 빛의 도시라는 뜻의 카시(Kashī)로 불렸으나. 갠지스 중류 바루나와 이사강 사이에 위치하여 바라나시라 한다.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이자 힌두교에서 가장 신성한 도시로 간주된다. 또 불교에서도 중요한 성지로 꼽힌다. 기원전 6세기 무렵 카시왕국의 수도로 번성했다가 11세기경부터는 이슬람 침략자들에게 약탈당하기 시작해 무굴제국 아우랑제브 황제 때 도시 대부분과 힌두교 사원이 파괴되었다.
 연간 100만 명인 넘는 순례자들이 방문하여 성스러운 갠지스강에서 목욕을 하고 전생과 이생에 쌓은 업이 씻겨 내려가길 기원한다. 그들 순례자를 위해 갠지스 강변에는 길이 약 4km에 걸쳐 '가트)'라는 계단상의 목욕장 시설과 화장터도 있다. 인도 여행에서 가장 기대가 큰 곳이다.  
  

저녁 갠지스강
가트에서 화장하는 모습


 호텔에서 늦은 저녁, 배를 타고 갠지스 강으로 나가는데 길거리는 온통 아수라장이다. 자동차와 오토바이, 릭샤와 소들이 뒤엉켜 오가는 사람들로 복잡하고 이리저리 빵빵 대는 소리에 정신이 없다. 사람들도 엄청나게 몰려드는데 매일이 이렇단다. 갠지스강은 몇 년 전부터 총리가 직접 발 벗고 나서서 정화작업을 한 결과 지금은 깨끗하게 정비되어 있다.

보트를 타고 갠지스강 가트에 마련된 화장터를 방문하는데 죽은 시신 위에 나무를 얹고 불을 지펴 태우는 곳은 냄새와 연기가 자욱했다. 장작으로 불태우는 시간은 세 시간 정도, 재산 정도에 따라 향나무를 사용하거나 장작을 충분히 구하지 못하면 시체를 강에 버리기도 한다. 망고나무 땔감에 콩기름을 사용하여 냄새가 많이 나지 않았다. 바라나시에서 화장을 하면 윤회를 멈출 수 있다는 믿음으로 전기 화장을 하지 않고, 바라나시로 오는 노인들이 많단다. 카스트 제도가 사라졌다지만, 빈부의 격차는 생의 마무리까지 계속되는 것이다. 보트의 시동을 끄고 화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다 강의 아래쪽으로 가보니 신성한 의식이 행해진다. 화장터에 여성은 출입금지. 너무 울어서 망자가 세상을 쉽게 떠나지 못해서라 한다.


힌두교 뿌자 의식 바라보는 관람객
갠지스강의 아침 모습


 바라나시는 시바 신이 만들었다고 전해지며, 시바는 바라나시의 수호신이다. 시바 신을 사랑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오고, 갠지스강의 여신에게 바치는 뿌자 의식에 동참한다. 황금색 옷을 입은 7명의 브라만 청년이 제단에 올라 갠지스강의 여신 ‘강가’를 위한 기도를 올리자 신도들의 표정이 사뭇 비장했다. 끊임없이 윤회를 거듭하는 인간들이 갠지스강에서 목욕하고 세상을 뜨면 윤회의 사슬을 끊어버리고 해탈할 수 있다는 믿음이 바라나시를 성지로 만든 것이다. 이 의식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3,000년 이상 하루도 빠짐없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고 했다. 인도를 다시 방문한다면 다시 오고 싶은 곳. 삶과 죽음이 하나인 곳. 활활 타오르는 장작더미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이름 모를 이의 죽음에 알게 모르게 저지른 잘못을 용서받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배에서 바라본 갠지스강
강 위에 둥둥 떠있는 꽃 등잔들


 다음날, 새벽 갠지스강을 다시 찾으니 지난밤의 화려했던 의식은 사라지고, 평온한 갠지스강이다. 일출을 보러 배를 타고 강으로 나가는데 한쪽에서 빨래하는 여인, 다른 족에서 목욕하는 남자들이 보였다. 이들의 문화에서 결국 삶과 죽음이 하나라는 것을 생각해보았다. 꽃 등잔에 피워 낸 작은 촛불을 강에 띄우고 가족의 안녕을 빌었다. 꽃 등잔 불은 너울대며 강을 따라가고, 새들이 여기저기 날아다니는 갠지스의 아침 풍경은 신성함으로 가득했다.  

  

사르나트 수트파


 도시 북쪽으로 10km 지점에는 불타가 처음 설법한 장소인 사르나트 녹야원이 있다. 석가모니 부처가 깨달음을 얻은 후 최초로 가르침을 편 곳, 5명의 비구에게 사성제와 팔정도를 설한 곳이다. 4대 불교 성지의 하나로 필수 성지 순례를 가는 곳이다. 녹야원은 사슴의 동산이란 뜻으로 실제로 지금도 사슴들이 뛰어논다. 오랫동안 인도의 문화와 종교, 학문의 중심지로서 많은 철학자와 시인, 음악가를 배출한 전통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스투파를 한 바퀴 돌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하여 돌다 보니, 아름다운 돌 장식들이 눈에 띄었다. 안개가 많이 끼어 선명한 사진을 얻을 수 없어 안타까운 맘을 접어두었다. 마음에 남기면 되는 것을!!!



힌두교와 이슬람교에 의하여 많이 파괴된 때문인지 고고학 박물관에 들어갈 때 검색이 철저하다. 사진 촬영은 당연하게 금지였다. 검색대에 통과된 가방을 보관함에 넣고서야 입장이 가능했다. 보안을 이렇게 철저히 한 이유는 아마도 힌두교와 이슬람교에 대한 경계심인 듯했다. 안으로 들어가니 고대 불교 관련 유적물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카왕 유적이 발견되기도 하는데 석주 머리에 서로 등을 댄 4마리 사자상은 현재 인도 국장으로 사용된다. 아소카왕의 석주를 실제로 보게 되는 굉장한 시간들이었다. 외에도 불교 관련 국보급 자료들이 많이 있었다.
  

바라나시 영혼의 여행-엽서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게 한 인도 여행, 이번 여행은 특히 끊임없이 담았다가 비워 내는 여행이다. 비워야 채워지는 법이고, 채우면 또 비어야 하는 것이 인생. 이러한  과정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사는 것이 인생인가 보다.
 카레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바꾼 이번 여행, 무엇이든 카레의 재료가 된다는 것, 난에 음식을 싸 먹어야 하므로 손으로 음식을 먹는 문화가 만들어진 듯했다. 경험하지 않으면 터득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 불과 몇 km 거리를 두고 과거와 현대가 공존하는 곳, 인도에서 인생 여행을 제대로 한 셈이다.



        




작가의 이전글 중국 속 우리 역사를 찾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