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에 무더위와 습기로 인해 아열대 지방을 여행하는 것은 썩 내키지 않은 일이다. 일단 호찌민에 갈 수 있는 상황에 더 큰 의미를 두기로 했다. 설레는 마음으로 공항에서 대기하던 중 낯익은 학생이 다가와 반갑게 인사를 한다. 엄마, 여동생과 함께 호찌민에서 일하시는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길이라고 수줍게 이야기한다.
늦은 시간, 탄손누트 공항에 도착했지만 800만이 넘는 이 도시의 사람들이 모두 마중 나온 듯 수많은 인파로 북적였다. 그 속을 뚫고 가족을 찾아낸 아버지는 가족을 이끌고 인사하러 다가왔다. 더운 이국땅에서 고생하시는 아버지에게 아들이 학교생활 잘하고 있다고 말씀드렸더니 그간의 염려에 안도하듯 눈가에 촉촉함이 맺힌다. 순간, 교육자의 자리가 갖는 힘을 느끼며, 따뜻한 말 한마디가 무엇보다도 절실한 아이들을 떠올린다.
베트남 여행 거점 지역
베트남은 인도차이나 반도의 동부 해안을 따라 남북으로 길게 이어져있다. 국토 면적이 331,210㎢로 남한의 3.3배 크기이다. 최근 인구는 9,646만 명 수준으로, 행정구역은 하노이, 호찌민 등 5개 직할시와 58개의 주로 되어있다. 1인당 국민소득은 우리나라의 1/10 수준이고, 우리나라 1원이 베트남 돈 20원 정도이다. 베트남에서 쌀국수 가격이 대략 40,000동으로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약 2,000원 수준이다.
다양한 볼거리와 저렴한 물가 덕분에 우리나라 사람들도 베트남을 많이 찾는다. 주로 남부 호찌민, 중부 다낭, 북부 하노이. 그중 아시아의 파리라 불리는 남부 호찌민은 한국인들에게 사랑받는 관광지 중 하나이다.
1945.09.02 베트남 독립을 선언하는 호찌민
1945년 9월 2일 하노이에서 독립을 선언한 베트남은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영토권 주장으로 8년 동안 인도차이나 전쟁을 치렀다. 북위 17도를 기준으로 남북 베트남으로 분리되어 분열이 지속되었다. 미군의 철수 이후 1975년 4월 30일 북부 베트남 공산정권에 의해 통일되었다. 수도는 북부에 자리 잡은 하노이, 최대 도시는 호찌민이다.
이후 캄보디아와 국경문제, 미국의 무역 보복 등 정치 문제와 경제 빈곤을 겪었다.106만 명을 넘어서는 보트피플 난민이 20년 동안 지속되면서 국가는 디폴트 위기에 빠졌다. 1986년 1인당 GDP가 84달러로 당시 북한의 1/10 수준이었던 베트남은 계획 경제 체제의 실패를 인정하고, 자유 경제화 정책 '도이모이'를 채택했다. 이후 베트남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7~8%의 고도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아시아의 파리, 호찌민의 야경
1975년 베트남 통일 전까지 사이공으로 불렸던 호찌민은 프랑스 식민 시절에 정치적, 경제적 중심지였다. 그래서 도시 곳곳에 고풍스러운 프랑스식 건물이 자리 잡고 있어 아시아의 파리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
베트남 빈대떡 반쎄오
볶음 고기 얹어먹는 요리
인파를 뚫고 우리를 찾아낸 친구가 차를 갖고 나와 호찌민 시내 1군에 위치한 호텔로 들어갔다. 늦은 시간임에도 도로에는 차보다 왱왱 지나는 오토바이가 더 많았다. 밤에도 후덥지근했지만 짐을 풀고, 호텔 근처 노천 식당으로 향했다.
작은 의자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사람들이 노래도 하고, 맥주도 마시는 식당이었다. 새우 짜조, 빈대떡과 비슷한 반세오, 볶음밥 같은 음식에 고기가 올려진 껌 치엔, 베트남 누들 샐러드 분보 싸오 등을 시키고, 시원한 사이공 333 맥주로 건배하면서 반가움을 나눴다. 후덥지근 끈적이는 더위 때문인지 시원한 맛이 일품이었다. 호찌민에서 만들어지는 333 맥주는 베트남어로 바-바-바로 불린다. 1893년 프랑스 식민지 시절 독일 원료로 만들어져 33으로 불리다가 100년이 지난 1975년에 3을 하나 더 붙여 333 맥주가 되었다고 한다.
호찌민 대통령궁
통일궁 전면 정원
센트럴 팰리스 호텔 조식 후 바로 옆에 위치한 대통령궁을 찾았다. 프랑스 식민통치에서 독립을 기념한 독립궁, 대통령 집무실에 이어 베트남 통일궁으로 이어진 역사를 갖고 있다. 많은 사람들로 붐볐고, 베트남인들은 호찌민의 동상에 절을 하고 지나갔다. 대통령 집무실과 회담장소 등을 둘러보고, 베트남 자료들을 들여다보았다. 6층으로 구성된 이곳 지하에 아직도 치열했던 전쟁 상황을 보존하고 있다. 내부의 시설을 둘러본 후 카페에서 더위를 식힌 뒤 전쟁기념관으로 향했다.
호찌민 전쟁기념관
근처에 있는 전쟁기념관은 전쟁의 상처로 수많은 사람들이 당한 피해를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는 취지를 보여주는 곳이다. 순박하고 따뜻한 사람들을 향해 자행된 처참하고 잔인한 기록들, 사진 한 장 한 장에 담긴 공포와 불안에 휩싸인 모습들에서 절로 느껴지는 비극! 분단국가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낯설거나 새롭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처참함을 마주 보게 된다.
프랑스에서 독립한 이후 1960~1975년까지 남북으로 갈라져 내전을 치렀던 호찌민의 1순위 방문지 전쟁기념관은 현대사의 비극을 간직한 곳이라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었다. 이곳은 당시 미국 정보부로 사용되었던 건물로, 통일 이후 전쟁 박물관이 되었다. 박물관 정원에는 탱크, 헬리콥터 등이 전시되어 있고, 내부 전시실은 3층으로 되어 있다.
첫 전시실에는 침략 전쟁 범죄라는 주제로 베트남 국민들에게 자유와 생명을 빼앗는 억압과 고통을 보여주었다. 민간인 학살과 죽어간 사람들을 보고, 평화를 지켜야 한다는 동질의 이유에 공감했다.
종군기자의 사진-Napalm girl 사진 자료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사진 중의 하나로 퓰리처상을 받은 종군 기자의 'Napalm girl'이 눈에 들어왔다. 겁에 질린 소녀는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하고 거리로 내몰렸다. 총을 든 군인들 사이에서 울면서 나오고 있었다.
전쟁 중 300만 명의 베트남인이 죽었고, 그중 민간인이 200만 명이었다. 200만 명이 부상당하고 30만 명이 행방불명되는 너무도 큰 인명피해가 있었다.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을 비교한 표를 보니 한국전쟁 비용의 12배가 들었고, 2차 대전에 참전한 군인의 절반이 베트남에 투입되었으며, 투하된 폭탄은 2차 대전의 3배, 한국전쟁의 5배라고 한다. 무엇이 이런 역사적 사실을 만들어냈을까?
미군의 고엽제 살포 장면 사진 자료
폭탄 파편으로 만든 엄마라는 이름의 조각상 앞에서는 가슴이 짠했다. 주황색으로 꾸며진 어전트 오렌지는 8천만 리터의 독성 화학물질 사용과 다이옥신을 함유하고 있는 고엽제 이야기였다. 고엽제를 가득 실은 트럭과 비행기에서 살포하는 모습, 그로 인해 태어난 기형아들의 사체도 눈 뜨고 볼 수 없었다. 미군 및 한국군인에게도 씻을 수 없는 참상을 가져왔던 고엽제, 한국군 30만 명의 참전자 중 10만 명이 고엽제 희생자이고 그중 2만 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이런 비극의 책임을 어디에 물을 수 있는가?
한국군 베트남 철수 사진 1973년 3월-매일경제
레퀴엠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곳에서는 인도차이나 전쟁으로 죽어간 종군기자들의 사진도 있었다. 그리고, 역사적 진실 공간에서는 미군 다음으로 많은 군인을 파견한 우리의 백호부대와 천마부대 5개 사단이 있었고, 우리 군인의 범죄행위로 피해 입은 사람들이 아직 살아있다고 한다. 진실된 사과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틀렸다. 끔찍하게 틀렸다. 우리는 미래 세대에게 그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 마지막에 만난 이 문구가 가슴에 남았다. 어렸을 때 베트남 전쟁 이야기를 들었을 때와 지금은 베트남 전쟁에 대한 판단의 기준부터 너무 다르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이제는 뭐든 숨길 수 없는 세상이다.
자동차와 오토바이가 엉킨 도로
호찌민 시내 관광 시클로
오토바이 행렬을 바라보니 신속함이 느껴졌다. 베트남 사람들은 시위와 집회에 참여할 때 5만 이상의 군중들이 모이는 시간도 흩어지는 시간도 30분 채 안 된다는 말에 공감되었다. 오토바이, 자동차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대로 질서가 있는 도시 호찌민, 역동적이고 다이내믹한 느낌이다. 수도 하노이에 비해 훨씬 부유하고 규모도 베트남 최대 도시이다.
후덥지근한 이곳의 더위를 피해 관광지 내에서 운영되는 뚜껑 있는 자전거 택시 시클로를 타기로 했다. 시클로는 자전거의 앞바퀴가 있던 자리에 손님용 의자를 설치하고 뒤에서 페달을 밟아 움직이는 삼륜 자전거다. 이런 구조 때문에 우리가 직접 운전한 듯한 착각을 느낄 정도였다. 순간순간 후덥지근하다 갑자기 비가 쏟아지는 이곳 날씨에 딱 맞는 교통수단이다. 더구나 여름, 후덥지근하다 갑자기 비가 내리자 비닐커튼이 빗물을 막아주었다. 시클로는 스콜이라는 소나기에 대비한 반자동 시스템인 듯하다.
호찌민 노트르담 성당 앞부분
호찌민 노트르담 성당 뒤쪽
호찌민 1군에는 프랑스 풍의 건물들과 많은 빌딩이 들어서 있다. 프랑스에서 가져온 자재로 1863년부터 1880년 사이에 지은 노트르담 성당이 도로 중앙에 서있다. 성모 마리아 대성당이라고도 하는데 빛바랜 붉은 벽돌에 아치형 창문이 달려있고 지붕에 뻗어있는 두 개의 첨탑 위에는 십자가가 세워져 있다. 단아한 건축미를 갖춘 명소로 손꼽히며, 성모 마리아 상이 실제로 눈물을 흘렸다고 하여 명성이 높다. 성당의 뒤쪽으로 돌아 외관을 살펴보니 역시 프랑스 영향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중앙우체국 외관
중앙우체국 내부
아직도 실제 업무를 하고 있는 중앙우체국은 노트르담 성당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다. 역시 프랑스의 영향이 담긴 노란 빛깔의 건축물이었다. 입구 따라 안으로 들어가니 아치형의 높은 천장이 인상적이다. 호찌민 초상화와 식민지 시기에 완성된 인도차이나 지도가 눈에 띄며, 다양한 가게들이 줄지어 있어 기념품을 살 수 있다. 현재도 국제 우편 업무를 진행하고 있어 국제택배 혹은 전화, 여행 엽서나 편지를 보낼 수 있다.
노트르담 성당과 중앙우체국을 둘러보고 옆쪽에 자리한 넓은 공원에 들어가 잠시 쉬었다. 공원을 가로지르는 곳에 현대적인 대형 쇼핑센터가 들어서 있다.
핑크 핑크 한 떤딘 성당
핑크빛 떤딘 성당 내부
빗속 호찌민의 스콜 광경이 삶의 일부분인 듯 너무나 자연스럽다. 노트르담 성당에서 시클로 타고 약 7분 거리에 위치한 핑크 핑크 한 떤딘 성당을 찾아갔다. 외관의 빛깔과 아름다운 구조물로 인해 핫스폿으로 알려진 곳이다. 고딕 양식으로 설계하고, 르네상스 양식과 로마네스크 양식을 가미하여 1860년대 완성한 성당이다. 제단에는 이탈리아에서 공수한 보석으로 꾸며놓았다. 어떻게 건물 전체를 화사하고 밝은 핑크빛으로 꾸며놓을 생각을 했을까? 떤딘 성당은 색채와 구조가 몹시 아름답고, 특별한 감각을 갖는 예쁜 건물이다. 11시부터 오후 2시까지 성당문을 닫는데 다행히 우리는 2시에 도착하여 성당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역시, 동화 속에 들어온 듯한 착각이 일 정도로 성당 내부의 핑크 핑크 빛깔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복해사 옥황전
옥황상제를 모신 제단
띤딘 성당에서 시클로 타고 6분 거리에 위치한 복해사 옥황전으로 향했다. 이곳은 1909년 중국인이 건설한 사원으로 국가문화재로 지정된 곳이다. 부처와 옥황상제 등 불교와 도교의 신을 모두 모시는 곳이다. 신상이 사원의 가운데에 자리 잡고 곳곳에 신들의 형상을 조각하여 모시고 있는데 그 섬세함이 대단하다. 규모는 작은 곳이나 미국 오바마 대통령이 방문했다고 소개하는 곳이니 나름 의미가 깊은 곳이라 할 수 있다. 다섯 부처의 어머니상, 염라대왕, 불상 등은 백단향으로 조각되었고, 연못에 자라들이 조용히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었다.
복잡한 벤탄시장
벤탄시장 외관
시클로 여행을 끝내고 노변 카페에서 아이스커피를 마시는데 그 시원함이 대단했다. 오후에는 숙소에서 편히 쉬다 걸어서 벤탄시장을 다녀왔다. 시장 입구에 시계탑과 기마동상이 서 있어 호찌민의 이정표 역할을 하고 있다.
원래 벤탄 시장은 벽돌과 목재로 건설되었고, 벤응애강을 따라 배들이 묶여 있는 수상 도시 형태로 당시 10만 명의 인구가 붐볐던 곳이다. 프랑스의 쟈딘 공격과 베트남군의 반격으로 잿더미가 되었던 곳에 다시 시장을 세우게 되었다. 중국, 인도, 그리고 프랑스 사람들로 많이 붐볐으나 시장이 낡았고, 프랑스인들은 새로운 시장을 원했다. 1914년 3월 미토 역 근처에 새로운 벤탄 시장이 들어섰으며, 1985년 대규모 개보수가 진행되었다. 호찌민 시내에서 가장 큰 벤탄시장이 이렇게 탄생했다. 시장 안으로 들어가면 갖가지 물건들에 대한 흥정이 넘쳐나고, 칠기와 수공예품 등 기념품을 사려는 외국인들로 붐볐다. 반팔 티셔츠와 섬세한 수공예품 몇 가지를 구입했다.
호찌민 인민위원회 청사
사이공 시청사 건물은 원래 1898년 프랑스 건축가 페만도 가르디스에 의해 드 빌데 사이공이라는 호텔로 지어진 건물이다. 파리의 시청 디자인을 본뜬 콜로니얼 스타일로 건축되었으며, 100년이 지난 지금도 호찌민시의 시청으로 활용되고 있다. 1954년부터 1975년까지 사이공 시청으로 불리다 1975년 호찌민시 인민 위원회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 건물의 정면은 80m, 옥상, 타워가 있는 건물의 높이는 5층짜리 높이와 비슷하다. 200개가 넘는 방, 큰 홀, 넓은 복도가 있어 800명의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다. 건물 앞에는 베트남의 유명한 조각가 DiepMinhChau가 아이들과 함께 만든 꽃과 푸른 식물들로 꾸며진 넓은 정원이 자리하고 있다.
내부 출입은 불가능하지만, 건물 외부에서의 관람이 가능하다. 시청 앞 동상을 기준으로 사진 촬영이 허용되며, 밤이 되면 시청을 비추는 LED 조명들이 불을 밝혀 멋진 모습을 볼 수 있다.
호찌민 렉스호텔
호찌민 시립극장 오페라하우스
광장 동쪽에는 1927년 프랑스가 지은 렉스 호텔이 있는데, 베트남 전쟁 당시 군인, 외교관, 전시 특파원 등이 자주 모인 장소였다. 해 질 녘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이곳의 전망은 정말 일품이다. 파리의 우아한 건축물들을 다시 만난 느낌이 들었다.
동쪽으로 한 블록만 걸어가면 19세기 말에 프랑스가 지은 사이공 오페라 하우스가 있다. 베트남 전쟁 때는 난민 피난처로 사용되었던 이 화려한 극장은 호찌민시의 오케스트라와 공연이 열리는 곳이다.
호찌민 시립극장은 호찌민에 정착한 프랑스인을 위해 1900년에 완성된 800석 규모의 극장이었으나, 역사적 과정을 거치며 1998년 사이공 300주년을 기념해 복원, 현재는 500석 규모를 갖고 있다. 비문, 장식, 가구의 디자인은 모두 프랑스에 있는 프랑스 예술가들부터 공수된 것으로 같은 해 프랑스에서 건축된 쁘띠 팔레와 유사하다. 샹젤리제 거리 바로 옆에 위치한 쁘띠 팔레는 1900년 파리 만국 박람회를 위해 지어진 곳으로, 마네, 모네, 귀스타브 쿠르베를 포함해 다양한 화가의 예술품을 볼 수 있다.
건물들 사이에 들어선 스카이 테크
스카이 테크에서 바라본모습
호찌민에서 가장 높은 전망대 사이공 스카이텍은 68층의 비텍스코 파이낸셜 타워의 2/3 높이 지점인 49층에 위치한다. 전망대에서 360 빙 둘러 호찌민의 전경을 살펴볼 수 있다. 호찌민에서 가장 높은 빌딩이며 베트남에서는 두 번째 높이이다. 전망대 입장료는 1인당 한화로 만원 정도, 야경이 아름다워 토요일은 평일보다 한 시간 연장하여 밤 10시까지 영업시간이다. 입장은 45분 전까지이다.
자잘한 건물 사이에 서있는 260미터의 비텍스코 건물을 아래에서 목을 뒤로 젖혀 사진을 찍어도 각도가 잘 나오지 않았다. 스카이 테크 부분이 공중에 뜬 둥근 접시처럼 보였다. 하늘색과 구름으로 꾸며진 별도의 입구로 들어가 초고속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연중 쉬는 날 없이 개방하는 이곳에 외국인 관광객들이 꽤 많이 방문하고 있었고, 아마 현대 건설에서 수주하고, 2010년 완성한 건물이라 그런지 우리나라 사람도 꽤 많았다.
49층 전망대에서 호찌민 시가지를 빙 둘러 살펴보는데 스콜이 세차게 내렸다가 금세 환해졌다. 커피와 케이크를 먹으며 높은 곳에서 도시를 바라보는 것은 시선의 권력이라는 건축가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도시를 가로지르는 강줄기와 건물이 모여있는 곳, 역사적 유적지가 밀집한 곳이나 도로망 등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렇게 도시를 바라보는 것이 그 도시를 이해하는 가장 빠르고 쉬운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토로 가는 배
코코넛 사탕
다음날 아침, 전날 예약해 둔 여행자 거리에 위치한 신투어를 찾아 미토 매콩강 투어를 시작했다. 호찌민 시내 호텔에서 픽업 후 남쪽 160km 떨어진 메콩강 하류에 위치한 미토를 찾아갔다. 미토는 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입구에 만들어진 삼각주 4개의 섬으로 되어있다.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며 두 개의 섬을 들러보려고 큰 배를 타고 마을로 들어갔다. 지류 양쪽으로 펼쳐진 정글을 구경하며 중간중간에 코코넛 과자 공장이나 꿀벌 농장, 난초 정원 등을 탐방했다.
특히 코코넛 사탕은 코코넛 열매에서 과즙을 추출하는 과정부터 천천히 시범을 보여주었다. 뜨거운 불에서 푹 익힌 후 기계를 이용하여 끈적거리는 과정을 거친 후 식힌 다음에 길게 만들고, 잘게 나눠서 포장하면 완성되었다. 마치 우리나라 엿 만드는 과정과 같았다. 가내수공업의 형태로 코코넛 향기가 담긴 사탕을 만드는 과정이 전통 방법으로 만들어져 두 봉지 사 와서 냉동실에 보관하여 두고두고 먹었다.
전통가요 공연
수박과 망고 열대과일
유니콘 아일랜드라 불리는 '터이썬섬'에 가서 베트남 전통악기와 노래 공연을 감상했다. 그들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했지만 리듬은 가슴에 와닿았다. 현지인들이 직접 들려주는 흥겨운 음악을 감상하고, 달콤한 열대 과일들을 맛보았다. 공연을 마친 후 거대한 뱀을 목에 두르고 사진을 찍어주는 이벤트 행사에 참여하는데 느낌도 그렇고 자신이 없어서 구경만 했다. 지금 생각하면 한번 둘러볼 걸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섬에서 이동하던 중 말 달구지를 타기도 하고, 전동자를 타기도 했다. 바나나 나무와 신기하고 다양한 열대나무들이 많았다. 소박하고도 순진한 눈빛의 사람들이 삶을 일구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는 기회였다.
손님을 태운 나룻배
황토빛깔의 메콩강
티베트 산맥에서 시작된 동남아의 젖줄 메콩강이 중국, 미얀마를 거쳐 베트남에 도착한 마지막 종착지 델타 메콩이다. 9개의 지류로 나뉜 강하구로 구룡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다. 인도차이나 반도를 굽이굽이 돌아온 메콩강이 베트남 남부에 모여 오랜 세월 비옥한 삼각지를 이루고 있다. 평균 해발 2m의 매우 평탄한 지형을 보여주는 이곳은 매년 매콩강의 범람으로 홍수가 발행되기도 하지만 수량과 일조량이 풍부해 동식물이 잘 자라는 비옥한 땅의 대명사이기도 하다. 메콩의 강물은 온통 황톳빛으로 흐르고 있다.
호찌민 여행자 거리
호찌민에 도착한 후, 저녁을 먹고 밤에 여행자 거리로 나섰다. 호찌민 중심거리 1군에 위치한 데탐 거리에서부터 부이 비엔 거리까지를 부르는 말이다. 외국인이 많이 모여들고, 좁은 골목을 비롯하여 곳곳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몹시 붐볐다. 호찌민의 모든 여행자들이 모이는 핫한 거리. 주말에는 19시부터 새벽 02시까지 차 없는 거리로 더욱 인산인해를 이루는 곳이다.
통로를 기준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볼 수 있도록 의자가 배치되어 있다. 음식점, 게스트 하우스, 여행사 등이 즐비한 여행자 거리는 로컬 스타일과 백패커의 문화가 혼재된 자유로운 분위기다. 복잡한 거리에는 펍에서 나오는 음악 소리, 시끄러운 오토바이 소리까지 더해져 정신이 하나도 없다. 그럼에도시원한 맥주 한잔과 함께 신나는 호찌민의 밤을 보내고 싶다면 여행자 거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