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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쉬운 독서모임

시인에서 시인으로

by 지수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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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가장 많이 읽긴 하지만 소설만 읽는 것은 아니다. 에세이도 종종 읽고 인문서도 가끔 읽으며 시집도 한 달에 한 권은 읽으려 하고 있다. 조금 더 많이 읽고 싶지만 아직 내게 시집은 한 달에 한 권이 딱 알맞은 분량 같다. 아무튼, 시집을 조금씩 읽다 보니 좋아하는 시인도 생겼고 궁금한 시인도 자연스레 생겼다. 시집을 읽고 좋았던 시를 필사하는 것만으로도 충만함을 느꼈지만 오히려 더 궁금해지기도 했다. 이 시는 왜, 어떻게 쓰인 걸까? 시인과 함께하는 시 읽기 모임 같은 자리가 있다거나 개인적으로 아는 시인이 있다면 물어보겠으나, 그렇진 않으니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가장 쉬운 방법은 역시나 시인의 북토크에 가는 것이었다.


25년 3월 말에서 4월 초, 김연덕 시인의 세 번째 시집,『오래된 어둠과 하우스의 빛』을 읽고 그 일부를 필사했다. 시인에게는 세 번째 시집이지만 내겐 처음으로 읽은 그녀의 시집이었다. 읽고 옮겨 적으며 궁금한 점이 생겼다. 나와 동갑인 이 시인은 어떤 연유로 이 자전적(으로 느껴지는) 시들을 쓰게 된 걸까? 그리고 왜 이렇게 긴 시를 쓰는 걸까? 때마침 자주 가는 서점에서 이 책을 가지고 북토크가 예정되어 있었기에 신청했다. 사실 기억이 모호하다. 북토크가 예정되어 있다고 하여 이 시집을 사서 읽었던 것일지도...


오래된 어둠과 하우스의 빛』 북토크는 송희지 시인의 사회로 진행됐다. 항상 그렇지만 이번 북토크 자리에도 상당히 일찍 도착했는데, 송희지 시인은 그보다도 더 빨리 도착해 있었다. 참 부지런하시구나, 생각하며 자리에 앉으려니 출판사에서 미리 준비해 놓은 시 문장 스티커가 놓여있었다. 아 부지런해라...


두 젊은 시인은 『오래된 어둠과 하우스의 빛』에 대해 그리고 시 자체에 대해 묻고 답하고 대화했다. 시집 속에 들어간 사진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집 속 계속 등장하는 '집'에 대한 질의응답, 시 쓰기에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리는지에 서로 비교하는 이야기까지. 김연덕 시인은 점점 시를 쓰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린다고 말했고, 송희지 시인은 요즘 어쩔 때에는 한 시를 쓰는 데 세네 달이 걸리기도 했다 말했다. 그러자 김연덕 시인이 자신은 그 정도는 아니라 말하며 선을 그어 웃음이 나왔다. 재밌는 대화로 오갔지만 시를 쓰는 데 걸리는 물리적 시간에 대한 생각을 해보게 하는 이야기였다. 내 짧은 생각으론 한 시를 쓰는 데 하루 이상 걸릴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하나의 시를 쓰는 데 몇 달씩 걸린다니. 문장 하나, 단어 하나를 얼마나 고심해야 시인이 될 수 있는 것일까?

북토크 중간에는 낭독의 시간도 가졌는데, 김연덕 시인은 <다친/작은/나의 당당한 흰색> 등 몇몇 시를 낭독해 주었다. 신기한 점이 있었는데, 글로 쓰인 걸 읽을 때 느껴지는 행과 연의 리듬과 그걸 말하며 읽는 시인의 리듬이 조금 달랐다는 점이다. 송희지 시인도 그걸 포착하고 김연덕 시인에게 글로 쓰인 대로 읽지 않고 자유롭게 낭독하는 게 신기하다고 말했다. 김연덕 시인은 쓰거나 읽을 때의 리듬과 직접 발화하여 읽을 때의 리듬은 다르다고 생각한다고 대답했다. 그럴듯했다. 쓰인 구조에 따라 읽는 걸 당연하게 생각했기에 못해본 발상이었다. 문자와 언어는 엄연히 다른데, 쓰고 읽을 때 쓰는 언어와 말할 때 쓰는 언어가 같은 건 아닌데 왜 갇혀 생각했을까?

가장 궁금했던 이 시집이 자전적 시들로 구성된 것인가? 하는 내 생각은 정답이었다. 시 속의 인물(가족)들이나 집이 실제 시인의 것에서 가져온 것이기 때문이었다. 어느 작가든 물론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기반으로 글을 쓸 수밖에 없지만 시에도 그것이 이렇게 강렬히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은 처음 알았다. 시에는 시인의 경험 그 자체보단 거기서 나온 사고나 감정 위주로 담길 거라 생각했는데 『오래된 어둠과 하우스의 빛』에는 그 경험의 장면과 거기서 나온 여러 요소가 함께 담긴 느낌이었다. 아직 시가 쉽지 않은 내게는 오히려 그래서 더 쉽고 깊게 다가오지 않았을까 싶다.


북토크를 마치고 사인받는 시간을 갖기 전, 김연덕 시인은 가지고 온 캐리어를 바닥에 펼치고는 주섬주섬 무언가를 끊임없이 꺼내기 시작했다. LED양초와 미니어처 가구였다. 오래된 집, 공간이란 시집의 콘셉트에 맞춰 독자들에게 줄 선물을 가져온 것이다. 북토크 가서 작가에게 선물 준 적은 여럿 있었지만 작가에게 선물을 받아보기는 처음이었다. 두 물건은 서재에 고이 모셔두었으며 꽤 좋은 기억으로도 남아 있다.



김연덕 시인에 대해 아주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으나 한 가지 더 궁금증이 생겼다. 사회를 본 송희지 시인에 대한 궁금함이었다. 나보다도 어린 이 시인은 어떤 사람일까? 그의 첫 시집 『싱크로나이즈드 스위밍』을 미리 읽고 가면서 조금이나마 이런 시를 쓰는 사람이구나 생각하긴 했지만 아직 아리송했다. 곧 새로운 시집이 나온다고 하였기에 그 시집을 기다리며, 북토크도 하기를 바랐다.

그즈음, 문학과지성사 출판사에서 운영하는 북클럽, 문지기를 신청하였고 두 달에 한 번씩 한 권의 시집을 받아 읽고 있었다. 두 번째로 받은 북클럽 시집이 마침 송희지 시인의 『잉걸 설탕』이었고 북토크 역시 예정되어 있었다. 궁금했던 시인이었기에 시집을 읽으며 북토크를 기다렸다.

북토크 공지가 나오자마자 바로 신청했다. 신청 며칠 후, 문학과지성사의 지하에 있는 카페 겸 복합 문화 공간, 문지살롱에서 진행되기로 한 북토크가 신청자가 많아 6층 강연장으로 장소를 옮겼다는 문자를 받았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꽤 많은 독자들의 기대를 받는 시인이었다.


북토크는 1부와 2부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1부는 『잉걸 설탕』 담당 편집자의 사회로, 2부는 강동호 문학평론가의 사회로 진행됐다. 본래 강동호 문학평론가의 사회로만 진행될 예정이었지만 행사 당일 변경되었다. 두 사람으로 나눠 진행된 것이 내게는 오히려 좋게 다가왔다. 1부는 편안하고 일상적인 분위기로, 2부는 조금 더 작품과 작가에 깊이 들어가는 느낌으로 구성되어서인지 북토크의 흐름에 흠뻑 빠져들 수 있었다.

북토크의 시작은 10대 때부터 활동한 시인이 지금까지 창작의 과정에서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에 대한 질문이었다. 첫 시집 이후, 두 번째 시집을 엮으며 생긴 변화 그리고 10대와 20대에 시를 쓰며 달라진 점에 대한 질문이 나왔다. 송희지 시인은 이번에 첫 시집보다 좀 더 내밀한 얘기를 쓰기 위해 노력했다고 답했다. 10대 때와 달라진 점에 대해선 조금 웃픈 대답을 내놓았다. 짧고 굵게 쓰고 요절하고픈 마음에서 오래오래 길게 쓰고 싶은 마음으로 변했다고. 참 다행이다.

이 시집에 대해, 북토크에서 나온 질문들을 몇몇 키워드로 요약해 적어보자면 장소, 몸, 사랑 그리고 퀴어일 것이다.

장소에 대해서는 여러 질문이 나왔다. <금정포> <후쯔> 같이 시 속의 허구의 장소가 진짜라고 느껴지는데 시 쓰기에서 '장소'가 어떻게 다가오는지에 대한 질문에 대해 시인은 '가상의 공간을 설정한 후 그 안의 인물에 대해 쓰는 걸 좋아한다. 가상의 공간이 실제 있는지 미리 검색해 본다. 회상하는 시를 좋아하는데 우리가 정말 거길 갔다 온 게 맞나? 진짜 있는 장소인가? 생각 드는 시를 쓰고 싶었다.'라고 답했다. 소설 속에서 가상의 장소가 등장하는 경우는 종종 보았지만 시에서 그런 공간이 설정된 경우는 처음 접해 새로웠다. 이어서 시 속 장소 중에 각별히 중요한 공간이 있는지 물었다, 송희지 시인은 금정포를 꼽았다. 그는 첫 금정포는 사실 중국집이었고 이걸로 연작시를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각기 다른 금정포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답했다. 그 외에도 수영장이나 첫 시집(『싱크로나이즈드 스위밍』)에서의 목욕탕도 꼽을 수 있겠다고 말했다. 두 공간 모두 몸의 공간이란 점에서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이 답변에 '몸이란 것이 육체이면서 시적 공간이며 소통의 공간이기도 한데 시인에게 몸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이어졌다. 시인은 '어릴 때부터 몸을 타자로 느껴졌다. 어색한 친구 같은 존재. 몸과의 불화가 나의 퀴어성과 어떻게 연관되나? 고민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친해질 수 있을까 가까워질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하고 있다.'고 말했다. 몸을 타자로 느끼는 것은 어떤 감각일지 궁금해졌다. 돌이켜보면 나 역시 몸을 완전히 내 것이라 여기지는 않은 듯했다. 나 역시 몸과의 불화가 있었기 때문에. 동시에 아는 것과 감각하는 것은 다르다는 걸 배웠다. 알고 있더라도 감각하지는 못할 수 있다. 나 스스로 몸과의 불화가 있음은 알았지만 깊게 감각하지는 못한 것처럼.

몸에 대한 질문은 퀴어 시에 대한 것으로 나아갔다. '퀴어'시에 묶이는 것에 대해, 그런 렌즈로 바라보는 것이 틀에 갇혔다는 느낌을 주진 않는지 물었다. 당연하게도 '그렇다'는 대답이 나올 거라 예상했다. 예상은 단번에 빗나갔다. 송희지 시인은 '오히려 더 많이 퀴어적으로 읽히기를 바란다. 퀴어라는 정체성이 바탕되어 있기에 글쓰기에 그런 '나'가 반영될 수밖에 없다. 아직까지는 그렇게 더 많이 읽히기를 바란다.'고 답했다. 내가 얼마나 편협한 생각을 했는지, 머리를 세게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이후로도 수많은 질의응답이 이어졌다. 마지막엔 역시나 독자 질문을 받았다. 나 역시 하나의 질문을 하였고 만족스러운 답을 얻었다. 세 번째 독자 질문은 다음 시집에 대한 스포일러 요청이었다. 송희지 시인은 괴물성을 안고 떠나는 모험에 대한 시가 될 것이라고 말하며 4-5편으로 구성된 장시집이 될 예정인데 편집부의 동의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개인적으로 흥미가 가는, 기다려지는 시집이지만 편집부 입장에선 고민이 될 법해서 두 입장 모두에 공감이 갔다. 이 시집이 꼭 나올 수 있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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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 책으로 넘어간 적은 여러 번 있었다. 읽고 있는 책에서 언급된 도서에 대한 흥미가 생기는 경우가 더러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시인에 대한 관심이 다른 시인에 대한 궁금함으로 이어진 것은 처음이었다. 두 시인이 하나의 시나 책으로 엮어있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같은 북토크 자리에 있었다는 이유로 이어졌다는 것이 새로웠다. 생각해 보니 이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서이제 소설가의 북토크 자리였다. 박혜진 평론가가 사회를 맡았기에 그녀의 평론집까지 읽어본 것이다. 태어나 처음 읽어본 평론집이었다. 물론 작가에 집중하는 독서모임이기에 사회자의 책까지 읽을 필요까지는 없다. 하지만 새로운 작가를, 책을 알게 되는 건 언제나 기쁜 일이다. 이 또한 북토크의, 독서모임의 묘미일 것이다. 그 자리를 통해 좋아하는 작가의 알지 못했던 책, 나아가 접하지 못했던 작가의 새로운 책을 만날 수 있다는 것 말이다. 한 작가를 깊게 파고드는 일 역시 독서의 즐거움이지만 새로운 작가의 발견 역시 크나큰 기쁨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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