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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인트 May 14. 2020

아무튼, 청소

학교 생활의 자잘한 기쁨과 슬픔

   작은 사회에서 청소 문화는 많은 것을 내포한다. 학교도 마찬가지이다. 학창시절 우리가 수업과 식사 다음으로 많이 한 일이 청소일지도 모른다. 학생들은 기본적으로 자신이 속한 반의 교실과 그 앞에 딸린 복도 부지를 청소할 책임을 지닌다. 또한, 어떤 반에도 속하지 않은 교내의 수많은 공간과 주요 시설들을 반별로 할당받게 된다. 각 층 사이드와 중앙의 계단 및 현관에서부터 음악실, 과학실, 컴퓨터실 등 각종 특수 교실, 선생님들이 대거 근무하는 교무실과 그 하위시설*, 마지막으로 최고 기피대상인 화장실까지 모두 각 반에 분배된다. 어떤 논의 과정을 거쳐서 반별 담당 구역이 할당되는지 알 수 없지만, 각 반이 어떤 청소구역을 맡게 되느냐에 따라서 학교생활의 자잘한 기쁨과 슬픔이 결정된다. [주* 내가 다니던 중학교에서는, 교육정보부 소속 선생님들은 컴퓨터가 비치되고 인터넷이 가능한 공간이 따로 있어 교무실 대신 그곳에서 근무했다. 중3, 고3 등 최고학년 담임 선생님들만 따로 교무 공간을 쓰는 예도 있다.]


   일단 학교 차원에서 반별 청소 구역을 할당하면, 각 반에서는 선생님이 주도하여 청소 당번을 정하게 된다. 이때, ‘청소의 룰’, 즉, 청소 당번을 어떤 방식으로 정하고 어떤 단위로 순환시키는가는 담임 선생님의 중요한 교육 철학 중 하나이다. 

   보통 하나의 반에는 자리를 기반으로 ‘분단’이나 ‘조’ 단위 편제가 이미 존재하므로, 이를 기준 삼으면 보다 수월하다. 자리 기준으로 정하는 청소 당번은 교실 청소의 로테이션을 위해서 활용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 공정을 위해 교실의 자리를 자주 바꿔주는 것이 상례이기에, 청소 로테이션에 맞춰서 자리를 바꿔주면 적절하다. 꼭 자리를 기준으로 할 필요는 없어서, 어떤 선생님은 번호에 기반해서 담당을 정하기도 한다. 더불어, 하루씩 돌아가면서 할지, 혹은 일주일씩 할지, 2~3일이라는 애매한 단위로 정할지도 룰의 구성 요소 중 하나이다. 요일별로 할당하는 방법도 고려할 법하지만, 요일별로 청소 난이도 편차가 너무 심하기 때문에 좋은 방법이 아니다. 예컨대, 체육 수업을 하는 날은 난이도가 급격히 올라간다. 그 외에 자잘한 팁이 있다. 이를테면 토요일은 다 같이 대충 하는 식으로 퉁치면 편하다. 


   교실 청소는 대부분 선생님이나 반장(또는 임원이나, 그에 준하는 담당자로 담임 선생님에 의해 임명된 자)이 최종 검사를 한다. 나의 초등학교 5학년 담임 선생님은 ‘청소 반장’ 직함을 두고 주기적으로 교체했다. 나는 1998년 11월 3일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나는 서기 1998년 11월 2일부로 제 5-3반 청소반장에 올랐다.”  


   지나치게 거창한 문장이긴 해도, 나는 이 감투를 자랑스럽게 여겼던 모양이다. 기록에 따르면, 청소 반장인 나는 급우들의 청소를 지휘하고 완료 여부를 컨펌하는 권한을 가졌고, 그들의 성실성을 A~D 스케일로 등급을 매겼다. 이게 선생님이 시켜서 한 것인지, 아니면 일기의 전개를 위해 자체적으로 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도망간 학생에게 D등급을 부여했는데, 예외로 차라리 도망가는 게 더 나은 학생에게도 D를 주었다.

“청소 반장도 어찌할 수 없이 놀고만 있거나 청소 다 한 것을 망치는 경우도 D다.” 

   나는 일기장에 이들의 실명을 거론하면서 “빨리 갔으면 좋겠다”라고 언급했다. 일기장을 담임 선생님이 보시기 때문에 고발하려는 심산이었다. 여러 사람이 함께하는 교실 청소는 학생마다 청소 속도에 대한 간절함이 달라 갈등이 생기곤 한다. 청소를 가능한 한 빨리 마치고 집으로 가고 싶어 부지런히 하는 학생도 있지만, 반대로 딱히 빨리 학교를 빠져나가야 할 이유를 못 느끼는 학생은 늑장을 부릴 수밖에 없다. 서로 이해하고 협력하기 위한 마음 폭이 그렇게 넓지 않았던 시절이었기에. 



   외부 공간 청소는 소수의 담당자를 뽑는 방식이 일반적이다. 공간의 특성에 맞는 청소 방법을 익혀야 하므로 아예 별동대 한 조를 따로 편성해서 일정 기간 계속 맡기는 편이 낫다. 따라서 로테이션을 돌리기 어렵다. 

   담당자를 선발할 때 고려해야 할 다양한 변수가 있다. 우선, 해당 청소 구역이 선호되는 곳인지 기피되는 곳인지에 따라 다르다. 만약 청소 구역의 난도가 높아 기피된다면, 자원을 받아서 반이나 학교에서 통용되는 상표를 제공하는 등 어드밴티지를 보장해주거나, 주번을 비롯한 반 구성원으로서의 의무를 일부 면제해주기도 한다. 반대로 선호도가 높은 청소 구역은 가위바위보나 제비뽑기 등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공정한 선정 과정이 중요하다.  


   청소 구역 선호도를 가르는 중요한 기준 중 하나는 유동 인구이다. 현관과 계단은 수많은 학생이 수시로 이용할 뿐 아니라 청소를 하는 그 시간에도 계속해서 인적이 붐비는 곳으로, 특히 현관은 내가 경험했던 모든 청소 구역 중 가장 어려운 곳이었다. 현관 청소를 열심히 하는 사람은 그 성실성을 널리 인정받아, 초등학생 때 내가 몇몇 친구들과 만든 <ㅇㅇ초를 빛낸 100명의 학생들>이라는 노래*에 “현관 청소 잘하는 AA와 BB”라는 가사를 넣어 그들의 업적과 이름을 언급해주었다. 물론 중앙현관 담당은 괜찮다. 학생은 접근이 금지된 공간이기 때문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지만. [주*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을 개사했는데, 이 가사는 아직도 내 컴퓨터에 저장되어 있다. 지금 보니 일부 PC하지 않은 요소가 드러나 부끄럽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기준은 해당 구역의 청소를 감리하는 선생님이다. 만약 음악실 청소를 할당받았는데 음악 선생님이 까다롭고 무섭기로 소문이 났다면 그 구역은 기피된다. 반대로 아주 너그러운 선생님이라면 공간이 조금 넓어도 선호도가 높다. 어떤 날에는 청소를 면제해주시기도 한다. 아주 특수하게는, 청소를 성실히 수행하다 보면 간식이나 현물 제공 이벤트가 활성화되는 기쁨을 누린다. 나는 상담실을 청소하다 담당 선생님의 총애를 받아 방학식 때 도서상품권을 선물로 받았던 적이 있다. 

   교무실은 농땡이를 피울 수 없는 공간이라 절대적 선호도는 높지 않지만, 선생님과 친하게 지내기 좋아하는 몇몇 인싸 학생들은 교무실 청소를 꺼리지 않는다. 선생님 간에 오가는 사적인 대화를 주워들어 고급 정보(?)를 입수하거나, 선생님들이 자신의 자리를 어떻게 꾸미는지를 관찰하는 것도 소소한 재미이다. 교무실은 청소 인력이 많이 필요해서 아예 교실 청소 조 편성과 연계해서 로테이션을 돌리기도 한다. 시험을 앞두고는 청소가 면제되는 구역이다. 

   그 밖에 과학실이나 컴퓨터실처럼 공간 자체가 청소하기 까다롭게 구성된 곳은 선호도가 낮다. 이 모든 조건을 떠나, 연모하는 선생님이 계신 곳이라면 나만의 1픽이 된다. 화장실은 따로 언급하지 않겠다. 다행히 나는 한 번도 화장실을 담당해본 적이 없었다. 


   한편 어떤 청소 구역은 선호도와 무관하게 엄격한 신원 조회를 거쳐야 한다. 교장실, 교감실 등 높으신 분이 집무하시는 장소가 그렇다. 이런 구역은 선호도 자체도 높지 않지만, 어지간히 성실하고 예의 바르며 복장 규정을 모범적으로 준수하는 학생이 아니면 시키지도 않는다. 담당자가 한두 명에 그치는 워낙 희귀한 보직이라 경험담도 들어보지 못했다. 하긴, 청소는커녕 12년간 학교에 다니면서 교장실을 한 번도 구경해보지 못한 학생이 대다수다. 



   이상의 내용은 내가 청소년이던 먼 과거의 이야기로, 학교마다, 선생님마다, 세대마다 조금씩 경험이 다를 수 있다. 지금의 학교는 어떤지 구체적으로 알지는 못하지만, 예전과는 많이 달라진 듯하다. 교무실이나 화장실을 학생이 청소하는 학교는 줄었다고 한다. 

   사회 전반적으로 권위주의가 옅어질수록, 학생들이 성숙한 시민의식을 가질수록 청소는 주된 논쟁거리였다. “왜 학생이 교무실을 청소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납득할만한 대답을 내려준 선생님은 기억나지 않는다. 청소하기 싫은 불성실한 학생들이 잔머리 굴리고 반항하는 단골 레퍼토리로 인식되던 시절도 있었겠지만, 꾸준한 질문은 청소하는 학생의 처우에 분명히 영향을 미쳐왔다. 이런 단순한 물음이 쌓이고 쌓이면서 선생님들이 청소하는 학생에게 관대해지고, 간식이나 선물을 주시기도 하고, 결국 학교의 뿌리 깊은 문화를 바꾸는 데까지 이르렀다고 생각하면 참 멋지지 않은가.

   다만, 청소가 학생들의 손을 떠난다면 그 일을 대신 수행하는 사람들의 여건도 생각해볼 일이다. 만일 청소 노동자들의 고용으로 문제를 풀었는데 그들이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거나, 학교 구성원들에게서 존중 받지 못한다면 결국 더 약한 누군가에게 불합리를 전가하도록 룰을 변경한 것에 불과하니 말이다. (사실 그런 사례는 그다지 멀리 있지 않다. 몇몇 대학교를 보라.)


   아무튼, 단체 생활에서 청소는 결코 피할 수 없다. 청소를 둘러싼 룰들은 보기보다 그 작은 사회의 단면을 많이 드러낸다. 그곳이 가정이든, 동아리든, 학교든, 직장이든, 군대든. 한 번쯤은 진지하게 고찰하면서 더 즐겁고, 더 인간적인 활동으로 바꿔나간다면 더 나은 세상이 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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