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조조전 온라인>을 떠나보내며
* 이 글은 <삼국지 조조전 온라인> 서비스 종료 전에 쓴 글입니다.
어디서부터 얘기를 시작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초등학생 때부터 굉장히 좋아했던 게임이 있었고,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에 가서도 좋아했다. 정말 재밌었지만 싱글플레이라는 단점이 아쉬웠다. 그래서 이 게임을 다른 사람과 대결하면서 함께 즐기면 얼마나 재밌을까 하는 상상을 하곤 했다. 어느 날 기적처럼 꿈은 이뤄졌다. 2016년 가을, 이 게임이 모바일로 리메이크되어 출시된 것이다. 출시할 때부터 지금까지 3년 8개월의 시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즐겼다. 그리고 다가오는 6월 11일, 이 게임은 서비스를 종료한다.
초등학교 3학년 겨울방학 때 ㅡ일기장에 의하면 1월 6일ㅡ 책을 열심히 읽으라며 엄마가 속독학원이라는 데를 잠시 보낸 적이 있다. 그러나 나는 그 학원에서 활자 위주의 책에 흥미를 갖지 않고 대신 다른 책에 푹 빠져버렸다. 바로 60권짜리 <만화 전략 삼국지>였다. 처음 학원에 간 날, 수업 시작을 기다리며 우연히도 책장에 꽂힌 60권 중 31권 정도 되는 부분을 꺼내 읽었다. 이 날의 일기에서 삼국지 언급은 단순했다.
1996년 1월 6일 월요일 (사실 1997년인데 잘못 썼다)
주제 : 속독학원
오늘부터 한샘학원에서 하는 속독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시간이 되지 않아서 수업시간이 될 때까지 삼국지 책을 보고있었다. 그런다음에 수업을 했다. 속독법에서 '속'은 눈으로 보기(빠르게), '독'은 이해도, '법'은 방법이라는 뜻이다. 조금 지루했지만 재미있었다.
그러나 이 단조로운 서술과는 달리 나와 삼국지와의 인연은 갈수록 깊어졌다. 며칠 뒤부터 일기가 끊겨 내가 얼마나 삼국지에 빠졌는지 기록은 없지만, 기억이 워낙 생생하게 남아있다. 내용이 흥미진진해서 하루에 네댓 권씩 책을 빌렸고, 연휴라도 생기면 한 번에 10권씩을 빌려 갔다. 안 그래도 우리나라 위인전이나 역사책을 좋아했던 나였기에, 중국 역사를 통틀어도 필적할만한 서사가 별로 없을 정도로 큰 스케일과 위용을 자랑하는 삼국지 이야기에 거침없이 빠져들었다. 삼국지의 인물들은 꿈에서도 나를 놓지 않았고, 아파서 악몽을 꿀 때도 항상 삼국지의 내용이었다. 만화 삼국지를 다 뗀 뒤에는 책으로 된 삼국지를 읽으며 지식을 쌓아갔다.
자연스럽게 삼국지를 배경으로 한 PC 게임도 좋아하게 되었다. 특히 초등학교 6학년 때 대단한 일을 하나 해내서 부모님께 게임을 선물로 받을 기회를 얻었는데, 1999년 8월 4일 종로 영풍문고에 입점한 소프트웨어 매장에서 정가 39,000원인 <삼국지조조전>이라는 게임과 만나게 되었다. 이 만남 역시 나의 인생에 중요한 장면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다행히 일기장에 잘 기록되어 있었다.
8월 4일 목요일 주제 : 영풍문고
오늘은 원래 교보문고에 가려고 했으나 아빠가 영풍문고도 가보라고 해서 영풍문고로 갔다. 종각역 앞에서 아빠를 만나서 영풍문고로 갔다. (중략) FIFA99, NBA Live 99, NFL Madden 9, 니드 포 스피드 4, 코만도스, 히어로즈 오브 마이트 앤 매직 3, 삼국지 6 파워 업 키트 등의 게임이 있었지만 내가 고른 것은 KOEI사의 영걸전 시리즈의 결정판 삼국지 조조전이다. 당초 KOI99에서 입상하면 Game 하나를 사준다는 아빠의 약속에 따라 39000원에 조조전을 손에 넣었다(?). (후략)
요즘은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된 삼국지 책이나 드라마가 많지만, 당시 어린이가 접할만한 삼국지 이야기는 유비와 제갈량이 진주인공이고, 그들이 세운 촉한이 독자가 감정이입 해야 할 선한 세력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조조가 주인공인 이 게임의 삼국지 해석은 굉장히 파격적으로 다가왔다. 또한 게임 속 시나리오 분기 중에는 ‘마왕’이라는 존재가 유비의 몸에 침투해 조종하려는 모략을 막기 위해 제갈량이 스스로 마왕을 받아들여 흑화된다는 판타지 같은 스토리가 있었는데, 어린 나에게 이 내용이 퍽 충격이었는지 그해 겨울방학 일기에 ‘마왕 각성’ 시나리오의 후기를 쓰기도 했다.
중학생 때도 종종 했고, 고2 때는 어찌 된 일인지 반 친구들 사이에서 갑자기 이 게임이 유행을 타는 바람에 친구들과 서로의 덕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몇몇 능력자 친구들은 게임 장면을 패러디한 플래시 동영상을 제작해 ‘학급주관발표회’라는 교내 행사 때 상영하며 좌중에 커다란 웃음을 선사했다.
대학교 시절에는 종강하면 가장 먼저 한 일이 바로 조조전이었다. 어릴 때와는 달리 플레이가 익숙해져서 3일 정도 집중해서 하면 클리어를 했다. 이토록 오랜 시간이 지나도 딱히 지겹지 않았던 데는 나름의 게임성이 좋았기 때문이었고, 그래서 이 게임으로 다른 사람들과 대결한다면 좋겠다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가능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간절히 바라지도 않았건만, 우주는 이런 나를 도와주었다. 다름 아닌 넥슨에서 원제작사와 저작권 계약을 맺고 <삼국지조조전 온라인>이라는 모바일 게임으로 새롭게 만들어 낸 것이다. 나를 비롯해 그 옛날 이 게임을 좋아했던 매니아들이 이제 과금력을 장착한 3~40대가 되어 추억 여행을 시작했다. 원작과 다른 점도 많아서 어떤 이들은 금방 떠나기도 했지만, 나는 그런 변화가 싫지 않았다. 요즘 게임 치곤 현질이 많이 강제되지도 않아 적당한 과금으로도 크게 뒤처지지 않고 운용이 가능했다.
세상일이라는 게 다 그렇듯이 운영 과정에서 여러 우여곡절도 겪었고 버그도 많았다. 그래서 때론 답답하기도 하고 개발사를 원망하기도 했지만, 마음을 조금 가다듬어보면 실은 조조전을 모바일로 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로도 행운이고 감사한 일이었다. 한때 긴 슬럼프에 빠지나 싶었던 개발진이 어느 시점부터 제대로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해 게임 내의 산적한 이슈들을 성공적으로 해결해나가기 시작했고, 밝은 미래만 기다린다고 믿었다.
하지만 무엇이 문제였을까. 슬픔은 한순간에 찾아왔다. 2020년 2월 중순부터 유저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조조전 온라인의 서비스 종료가 다가온다는 암시가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갑작스러운 해외 서버 종료와 과금 상품 축소로 불안한 기운이 감지되었고, 평소 유튜브를 통해 소통에 앞장서던 디렉터를 비롯한 주요 개발진의 퇴사 사실이 알려졌다. 불과 두어 달 전인 12월 초에 오프라인 행사를 성대하게 열고 2020년의 주요 개발 계획을 공개했기 때문에 전혀 예상 못 한 전개에 유저들은 좌절에 휩싸였다. 코로나19로 어수선하던 2~3월을 지나며 빗발치는 문의에 묵묵부답이었던 운영진은 4월 9일에 서비스 종료 소식을 정식으로 공지했다.
“2016년 10월 6일(목) 정식 출시된 이후 약 3년 8개월 동안 군주님의 사랑을 받은 삼국지조조전 ONLINE이 2020년 6월 11일(목) 서비스를 종료하게 되었습니다. 군주님의 사랑에 보답하고자 다양한 방안을 모색하였으나, 더 이상 서비스 유지가 어렵다고 판단하여 어려운 결정을...”
예견된 미래였지만, 막상 글로 확인하니 참담한 심경이었다. 유저들은 순욱이 조조로부터 빈 찬합을 받는 장면, 검각에서 최후까지 항전하던 강유와 부하들이 황제가 항복했다는 소식에 울부짖으며 칼을 바위에 내려치는 장면, 오장원에서 제갈량이 실낱같은 희망을 걸고 생명 연장 기도를 올리는 중 촛불이 꺼지는 장면 등 삼국지에서 본 슬픈 장면에 자신들의 심경을 빗대었다.
자신이 현질을 더 했다면 서비스를 유지하지 않았을까 자책하는 유저도 있었고, 다시는 넥슨 게임을 안 하겠다는 유저도 있었고, 조조전과 비슷한 게임을 추천해달라는 유저도 있었고, 사과나무를 심는 심정으로 끝까지 담담하게 게임을 즐기겠다는 유저도 있었다. 게임 하나를 떠나보내는 일이 이토록 어려운 일이었구나.
오리지널 조조전은 아직도 할 수 있으니 영영 조조전을 못하는 것도 아니고, 유저들이 제작한 모드(MOD)들도 많이 있지만(고등학교 친구 중에 모드 제작자가 있었지만 공식판이 아니면 손이 잘 안가서 한 번도 안 해보지 않았다) 조조전 온라인이 한번 출시된 이상 예전의 PC 게임하던 느낌으로 돌아가기엔 아쉬울 테니까.
남은 시간이 줄어들면서 나도 작별을 준비하고 있다. 나중에 기억을 되감고 싶을 때를 위해 플레이 장면을 녹화해두고, 애정을 갖고 키웠던 장수(캐릭터)들의 용맹스러운 모습을 캡처해 스크린샷으로 남기고, 마음먹고 한 주간의 모든 여가를 다 쏟아 플레이한 결과 여태 한 번도 도달하지 못한 주간 순위 목표를 달성하기도 했다. 즐거운 기억을 남긴 채 헤어지고 싶어서.
이제 마지막으로, 아직 플레이하지 못한 연의(싱글플레이 시나리오)를 하나씩 진행 중이다. 패키지 게임 시절의 조조전을 복각한 연의 모드야말로 어린 시절 우리를 사로잡았던 이 게임의 근간임에도, 모바일 버전에 들어와서는 바쁘다는 핑계로 뒤로 미루기 일쑤였다. 싱글플레이보다 다른 사람과 겨루는 치열한 두뇌 싸움이 더 재밌기도 했고.
그래서 서비스 종료를 코앞에 둔 지금에서야 집중해서 시나리오를 따라가게 되었다. 한 장면 한 글자도 놓치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주인공의 서사에 이입하고, 그들이 뱉는 대사 하나하나를 곱씹으니 기분이 묘했다. 그러고 보면 ‘삼국지’라는 게, 역사로 치면 후한 황조가 무너지고 위진남북조 시대로 넘어가는 찰나의 순간이지만, 인물 중심으로 보면 결국 수많은 영웅들이 떠올랐다가 역사의 뒤안길로 쓸쓸히 퇴장하기까지의 여정을 조합해서 재구성한 이야기가 아니던가.
특히 각 연의의 주인공이 최후를 맞이하는 장면들이 입체적으로 다가왔다. 분노와 방심으로 대군을 잃고 백제성에서 힘없이 생을 마감한 유비, 한때 중원의 최강자로 군림했으나 부족한 결단력과 자만심으로 순식간에 몰락하고 길에서 숨을 거둔 원소, 따라올 자가 없는 용맹을 지녔고 그 용맹만큼 한바탕 호쾌하게 마지막 항전을 벌이고 당당히 죽음을 받아들인 여포, 주군을 살리기 위해 죽을 운명을 알면서도 몸을 던진 방통, 자신이 따르던 이의 유지를 가슴에 품고 한실 부흥을 꿈꿨지만 끝내 이루지 못하고 명을 다한 제갈량과 강유 등. 비록 게임상에서 짧게 압축되어 묘사된 인생이지만, 저마다의 최후에서 저마다의 가치와 무게를 느꼈다. 이제 조조전 온라인 유저로서의 나 역시 서비스 종료와 함께 최후를 기다린다.
6월 12일부터의 나는 어떤 모습일까. 그 모든 습관은 어디로 갈까. 0시가 지나면 매일 들어오는 게임 속 재화를 수급하고, 보물상자를 열고, 월요일과 수요일에 주간 랭킹을 결산하던 습관. 출근길에, 퇴근길에, 휴식 중에, 자기 전에 도전했던 여러 컨텐츠와, 핸드폰 너머로 얼굴을 알 수 없는 유저와 겨뤘던 숱한 승부. 공식 카페에 접속해 공지를 확인하고 갤러리에 올라오는 공략을 확인하던 일. 나름대로 전략을 연구하며 에버노트를 갱신하던 열정. 그리고 영웅들의 뜨거운 이야기. 아직은 무엇도 상상할 수 없다. 그저 두렵고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