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오후 2시가 되자 하던 일을 멈추고 TV 채널을 고정한다. 높은 곳에서 카메라가 푸른 그라운드 전경을 비추고 몇몇 선수들은 몸을 풀고 있다. 따사로운 햇살 아래 경기 시작을 기다리는 관중들이 비춰진다. 햇빛을 가리기 위해 종이로 된 모자를 쓴 관중이 많고, 선글라스를 낀 관중도 더러 보인다. 물이나 탄산음료, 또는 맥주 따위를 들고 있기도 하고, 응원 도구로 쓰이는 풍선 막대도 많이 발견된다. 가족 단위로 온 관중이나, 어린이 회원 유니폼을 입은 아이도 눈에 띈다. 이 광경과 함께 캐스터와 해설자가 시청자에게 인사를 건네며, 그날 경기에 출전하는 양 팀의 선발 라인업이 공개된다. 짧은 시간 사이에 지나가는 장면이지만 정말 오래도록 기억의 중심부에 남아 있는, 어린 시절의 강렬한 설렘 중 하나이다.
주말에 지상파 방송국을 통해서만 볼 수 있는 TV 생중계는 채널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내가 응원하는 팀의 중계가 잡히기를 기대해야 했다. 8개 구단에 채널이 최대 4개이지만 방송국으로 따지면 3개이고, 이들 방송국도 모든 주말마다 프로야구 중계를 편성할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TV로 중계되지 못하는 경기가 더 많았다. 다행히 라디오 중계를 하는 채널은 조금 더 다양해서 원하는 경기 중계를 들을 가능성이 높았다. 어쩔 수 없이 TV로는 다른 팀 경기를 틀어놓고, 라디오로는 내가 응원하는 팀 경기를 틀어놓기도 했다.
주중에는 야간 경기가 펼쳐지므로 집에서 라디오 중계를 들었다. 경기가 끝나면 9시 45분이 되기를 기다렸다. 지상파 메인 뉴스가 끝나고 스포츠 뉴스가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 스포츠 뉴스는 야구 전문 방송도 아닌 데다 10분 남짓한 짧은 시간 방영이 되었기 때문에 야구 하이라이트는 아주 일부만 틀어주었다. 물론 야구 시즌에는 축구 외에 다른 스포츠 리그가 거의 진행되지 않으므로 주로 야구가 톱뉴스로 나오긴 했지만.
다행히 어느 시점부터 KBS 2TV에서 10시 45분에 <스포츠 중계석>이라는 심층적인 스포츠 방송을 새로 런칭하면서 갈증을 해소할 수 있었다. 이 방송은 비단 득점 장면뿐 아니라 좀 더 긴 하이라이트를 보여주었고, 무엇보다 장기전으로 진행되어 9시 45분 스포츠 뉴스 때 아직 끝나지 않았던 경기도 이 시각에는 어지간하면 끝나기 마련이라 경기 결과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도 장점이었다.
TV와 라디오 외에 내가 야구 소식을 얻는 통로는 바로 신문이었다. 매일 집에 배달되는 조간신문 스포츠 기사를 통해 간략한 정보를 얻었고, 저녁에는 아빠가 퇴근길에 사오는 스포츠 신문을 통해 더 넓고 깊은 정보를 습득했다. 유년기 시절 “아빠” 하면 내게 떠오르는 이미지는 국민학교 2학년 때까지 살던 역곡의 다세대 주택 복도를 걸어오면서, 부엌 창문을 통해 스포츠 신문이 들린 손을 흔드는 아빠의 퇴근이다.
프로야구 시즌에는 다른 특별한 스포츠 이벤트가 없는 한 프로야구 소식이 1~4면에 배치되었다. 아빠가 돌아오면 신문을 받아 들고 한 글자도 놓치지 않고 탐독을 시작했다. 신문은 온갖 데이터베이스를 담은 지식의 보고였다. TV로는 자세히 보여줄 수 없는 모든 경기의 약식 기록지(땅표)가 실렸고, 경기 분석, 각종 스탯과 순위, 감독과 선수의 인터뷰도 소중했다. 또한 요즘 말로 'TMI’ 정도에 해당하는 ‘이모저모’나 ‘말말말’ 같은 코너도 쏠쏠한 재미였다.
PC통신도 할 줄 몰랐고, 혼자서는 야구장을 갈 수도 없고, 야구용품도 살 수 없던 어린이 시절, 나는 오로지 TV, 라디오, 신문, 굳이 추가하자면 팬북에 의지하여 야구 세계를 파고들었다. 또한 다행히도 나에게 야구 규칙을 알려주고, 야구장에 데리고 가고, 캐치볼을 하는 아빠가 있었다. 이 정도면 입덕하기에 충분한 요건이 아닌가. 그땐 그런 말이 없었지만, 아마도 야구는 내 인생 최초의 ‘덕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