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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인트 Apr 15. 2020

처음의 기록

기억하지는 못해도, 기록된 시간

   가수 레이 찰스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레이(Ray)”의 한 장면이다. 동네에서 놀던 어린 레이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를 따라 한 가게로 들어갔다. 그곳에서는 어떤 할아버지가 낡은 피아노를 연주 중이었다. 레이가 호기심 넘치는 눈으로 쳐다보자 할아버지는 레이를 옆에 앉히고 따라 쳐보라고 하면서 기본 코드를 가르쳐준다. 전설적인 뮤지션이 평생을 함께할 도구가 되는 피아노를 처음 만나는 운명의 순간을 회상한 것이다. 

   이 장면이 진짜인지 영화의 전개를 위한 창작인지 모르겠지만, 산발적으로 남은 나의 어린 시절 기억 중에도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중요한 순간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내가 소장 중인 기억 필름의 보존 상태가 양호한지, 아니면 세월에 의한 변색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어떤 부분은 부모님의 증언으로 보완이 가능하지만, 아무리 부모님이라고 해도 완벽하게 기억할 수는 없으니까. 


나의 인생 영화 중 하나인 <레이>의 예고편. 23초쯤 해당 장면이 잠깐 나온다.


   기억에 의하면, 나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처음 컴퓨터를 배웠다. 아직 우리 집에 컴퓨터가 없었을 때, 컴퓨터가 있는 친구 집에 종종 놀러 가서 게임을 했다. 친구가 컴퓨터를 능숙히 다루는 게 신기하고 부러웠던 나는 그 친구가 다니는 컴퓨터 학원에 보내 달라고 부모님께 부탁해서 다니게 되었다. 

   처음 학원에 간 날은 엄밀히 말하면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학원에 다니던 초반의 느낌은 기억난다. 신문물을 익히면서 경험하는 놀라움과 성취감, 별로 의미 없었을지도 모르는 선생님의 격려(“손이 커서 타자를 빨리 익히나 보다”와 같은 말을 해주셨다) 등이 다소 어두칙칙했던 학원의 조명과 뒤섞여 머릿속 한 켠에 남아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당시는 학원을 등록하면 타자 연습부터 시작했다. 정부 시책으로 ‘국민PC’가 보급되기 전까지는 컴퓨터가 워낙 비쌌기 때문에 집에 컴퓨터가 없는 상태로 학원에 다니는 경우도 있었고, 이후에 워드프로세서 등을 배우려면 빠른 타이핑이 필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먼 훗날 나의 전기를 집필할 누군가(?)에게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3학년의 나는 이 중요한 날을 일기에 담아두었다. 


1996년 9월 2일 월요일 날씨 맑음 
제목 : 컴퓨터 
   오늘부터 컴퓨터학원을 다닌다. 성민이도 다니고있다. 처음이라서 자판연습부터 시작됐다. 먼저 기본자리 왼, 오른, 전부를 익혔다. 왼쪽은 ㅁㄴㅇㄹㅎ키 오른쪽은 ㅗㅓㅏㅣ;’키를 익혔다. 차츰 배우면 배울수록 실력도 늘어가고 수준도 높아질것이다. 자판연습을 다 끝내면 무엇에 들어갈까? 


    뒤, 기억이 아닌 ‘기록’에 의하면, 나는 4주 만에 타자 연습을 마치고 한글 2.5를 배우기 시작했다. 컴퓨터 배우는 것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거의 1주일에 한 번꼴로 학원 이야기를 일기에 썼다. 그러나 아쉽게도 집이 금방 이사를 했기 때문에 4학년으로 올라가면서 학원을 옮기게 되었다. 


   새로 옮긴 학원에서 워드 프로세서 자격증을 따기 위해 열중하던 4학년 여름, 일생일대의 전환점이 찾아왔다. 학원에서 나를 프로그래밍 경시대회반에 넣으면 어떻겠냐고 제안한 것이다. 아, 물론 내가 아닌 엄마에게 제안을 했다.  

   다소 허무하게도 프로그래밍 언어를 처음 배운 날의 상세한 느낌이나 기억은 전혀 없다. 이제 컴퓨터 학원을 1년 가까이 다녔으니 특별함보다는 자연스럽게 일상의 루틴으로 녹아들었을 테고, 나에게 이날은 학원에서 새로운 반으로 옮기는 정도의 의미였을 테다. 

   하지만 이 역사적인 날은 어김없이 일기장에 기록되어 1차 사료가 되었다. 일기를 쓴 나는 물론이고, 부모님도, 선생님도 몰랐을 것이다. 이 아이가 자라서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되리라는 사실을. 


7월 28일 월요일 
제목 : GW BASIC 
   오늘 컴퓨터 학원에서 GW BASIC을 했다. 나는 베이직을 처음 한다. 그러나 쉬운 것이기 때문에 잘 했다. 프린트(PRINT=Alt+P)문을 배웠다. PRINT는 화면에 출력하라는 뜻이다. 만약에 A=4 B=5 C=A+B라고 하고 PRINT A;B;C라고 하면 RUN(런=F2)하면 이렇게 나온다. 4 5 9 
방학 일기는 바로 검사 받을 필요가 없으니 컴퓨터로 작성한 뒤 출력해서 제출했다.


   해리 포터가 처음 지팡이를 잡은 순간처럼 엄청난 운명 같은 걸 느끼지는 않았어도, 호기롭게 “잘 했다”라고 쓰고 단축키까지 깨알같이 적어 놓은 세밀함을 보면 꽤 좋은 인상을 받긴 했나 보다. 놀랍게도 나는 이날 이후로 신입 개발자로 입사하기까지 한 달 이상 프로그래밍을 쉬어본 적이 없다. 호기심 많은 성격이어서 늘 다른 길이 없나 두리번거리며 걸어왔지만, 프로그래밍만큼 내가 잘하는 일은 없다는 것을 나는 안다. 


   가끔은 일기장 속으로 들어가서 그 꼬마의 얼굴을 보고 싶다. 학원에서 처음 만나는 검은 배경과 흰색 글씨로 된 낯선 코드를 볼 때 어떤 눈빛이었는지, 집에 와서 일기를 쓸 때 어떤 마음이었는지 궁금하다. 그 어린 시절 나에게 참으로 고맙다. 프로그래밍을 흥미롭게 여겨주어서, 그날의 나를 솔직하게 기록해주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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