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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흐르는 강물처럼 May 08. 2020


어머니와 냉면

50대 아재가 사는 이야기

   "어디 가서 시원한 냉면이나 먹자" 휴일인 어제였다. 11시쯤 되었을까. 어머니께 뭘 드실 거냐고 묻자 대뜸 냉면을 먹자고 하신다. "냉면이요?" 놀라서 되물었다. 평소에 무얼 먹고 싶다, 뭘 하고 싶다는 얘길 하지 않기 때문이다. 늙으니 입맛이 없다고 하셨다.  어머니는 올해 86세,  연세에 비해 건강하신 편이다. 다만 수년 전부터 담도에 주먹만 한 담석이 있어 병원 치료를 받고 계셨다.  소화기능이 떨어져 죽이나 부드러운 음식을 주로 드시던 터였다. '냉면이라'. 아직 4월이었다. 냉면은 한 여름에만 파는 음식 아닌가?

하지만 사드리고 싶었다. 옛날 어떤 효자는 한 겨울에 딸기 먹고 싶다던 노모를 위해 목숨 걸고 구해 드렸다는데... 스마트 폰 하나면 못하는 것이 없는 요즘 시대에 냉면쯤이야.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냉면 파는 곳이 있었다. 이른 점심이었다. 냉면이 나왔다. 어머니는 작은 접시에 조금 덜고는 내게 냉면그릇을 내밀었다. 모처럼 잘 드시는 모습을 보니 흐뭇했다. 맛있다고 하셨다. 내게 주신 냉면을 덜어 드렸다. 한사코 마다 셨지만, 그것도 다 드셨다. 흐뭇했다. 뿌듯하기까지 했다. 전에는 뭘 드시는지, 뭘 좋아하는지 관심이 없었다. 늘 단단한 어머니였다. 언제부턴가 쇠락해 가는 육신을 힘겹게 추스르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그렇다. 어머니는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불과 몇 해 전까지도 텃밭에 콩이며 참깨를 심고 밤늦도록 일하셨던 분이다. '제발 그만하시라' VS '있는 땅을 어떻게 놀리느냐' 나와 어머니의 오래된 다툼이었다. 양보할 수 없는 접점이었다. 내가 주변 선배들에게 조언을 구하면 십중팔구,  "노인이 소일거리라도 있어야지'라든가,  '아직은 하실만하니 그러니 그냥 내버려 둬' 한다. 말이 쉽지. 그런 조언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내 사정을 몰라서 그렇다.


  어머니가 하시는 일은 결코 '소일거리'가 아니었다. '하실 만한 일'도 아니었다. 텃밭이라고 하지만 다 합하면 600여 평 정도 되는 땅이다. 일철이면 밤늦도록 일하신다. 일에 파묻히신다. 그렇게 일을 하고 나면 넋이 빠진 사람 같다. 힘들어서 밥도 못 드신다. "그러게 내가 뭐라고 했어요? 제발 일 좀 그만 하시라니까요" 짜증을 내며 타박한다. 어머니는 가만히 계신다. 아무 말 없이. 잘못한 것도 아닌데 꾸중 듣는 아이가 된다. 어머니가 안쓰럽기도 했지만 사실은 내가 힘들어서 그랬다. 참깨를 심고 풀을 뽑는 것은 어머니가 하시지만 땅을 갈고 비닐을 치고 거두고 들이는 일들은 늘 내 몫이다. 직장 다니고 있을 때였다. 휴일에는 나도 쉬고 싶었다. 하지만 빤히 보이는 일을 두고 쉴 수가 없다. 아~ 언제쯤 이 농사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기약이 없었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날이 왔다! 어머니가 농사일을 그만둘 수밖에 없는 일이.  고향 집이 있는 곳에 산업단지가 들어서게 되었던 것이다. 아들은 이겨도 국가를 이길 순 없었다고 판단하셨을까.  50여 년간 근속했던, 정년이 없는 농사일에서 어머니는 그렇게 강제 퇴직당했다. 대부분 마을 주민들은 인근 아파트 단지에 입주했다. 고향을 멀리 떠날 수 없어서였을 것이다. 처음엔 내가 있는 곳에 같이 살자고 강권했다. 하지만 어머니 고집이랴.. 혼자가 편하시단다. 그렇게 어머니의 아파트 살림이 시작되었다. 


처음엔 평생 직업이 '농사'인데 그만두고 어떻게 사실까 염려했다. 하지만 기우였다. 교회도 다니고 아파트 경로당에도 다니면서 잘 지내고 계셨다. 그런 이웃이 있어 다행이다 싶었다. 그러다가 이번 코로나 때문에 교회도, 경로당도 갈 수 없는 처리가 되었다. 무엇보다 식사와 생활이 걱정되었다.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 거의 반강제로 모시고 왔다. 어린 손자가 집에 있으니 와서 봐달라는 명분을 세웠다. 그렇게 한 달이 다 되어간다. 작은 방에 계시면서 성경책도 보고 산책도 하며 하루를 소일하신다. 

<할머니와 늦둥이 손자의 산책 - 내가 찍고>


  요즘 나는 어머니와 지내는 것이 참 좋다. 옛날이야기도 나누고 같이 산책도 나간다. 젊은 날엔 어머니와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며 지냈던 기억이 없다. 살기 바빠서였을까. 뭔지 모르겠다. 내 나이 50이 넘고 귀밑머리가 하얗게 바래면서 어머니가 보였다. 살아계셔서 감사하다는 것. 함께 할 날이 머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일까.  세월은 나같은 사람도 철들게 하는 뭐가 있나 보다.

얼마 전, 갑자기 쑥게떡이 먹고 싶다고 하셨다. "쑥게떡?" 이름도 참 소박하다. 대휴를 내고 다음 날 논산 시장에 나갔다. 요즘 사람들이 찾는 떡이 아니라서 그런지 만드는 곳이 없었다. 어렵게 수소문 한 끝에  몇 조각 겨우 구했다. 어머니는 맛나게 드셨다. 틀니에 오물오물... 잘 씹지도 못하지만 행복해하셨다. 그 행복은 나에게 몇곱으로 되돌아왔다. 쑥게떡이 뭐라고.


 떨어져 살 때는 늘 염려가 되다가 옆에 계시니까 마음도 편안하다. 점심 때는 코로나 때문에 학교에 가지 않는 어린 손자 밥도 챙겨 주신다. 아이 때문에 자주 웃으신다. 웃는 어머니를 보면 기쁘다. 어머니를 웃게 한 늦둥이 아들이 고맙다. 

이것이 쑥게떡~~

  냉면을 다 드시고 어머니는 주머니에서 만 원짜리 한 장을 꺼내 주셨다. 그걸로 계산하란다. "됐어요 어머니. 제가 계산할게요." 아무리 말해도 한사코 주신다. 나는 안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부담 주고 싶지 않으신 게다. 어머니란 그런 존재인가 싶다.


40여 년 전 어느 날, 눈이 푹푹 빠지는 한 겨울이었다. 유난히 추웠다. 자취방에 연탄불은 꺼졌고 방바닥은 얼음장이다. 해는 지고 누나는 돌아오지 않았다.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엄마다. 기적처럼 엄마가 왔다. 엄마는 말없이 곤로에 밥을 짓고, 꽁치와 김치를 넣어 찌개를 만드셨다. 뚝딱~ 엄마는 마술사다. 냄비 속 푹 익은 묵은 김치를 찢어 하얀 쌀 밥에 올렸다. 이렇게 맛있을 수가. 허기진 배를 채우느라 정신없이 없었다. 문득 고개를 들었다. 엄마는... 그런 나를 지켜보고 계셨다. "천천히 많이 먹어"  잊을 수가 없다. 그 겨울에 먹었던 밥 한 끼.


 "어머니, 그 집 냉면 맛있던데, 우리 다음 주에 또 먹으러 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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