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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린 Feb 07. 2020

영화 기생충과 스탕달의 적과 흑을 함께 보며

1. <기생충>의 전반부는 많은 부분이 스탕달의 <적과 흑>을 닮았다. <적과 흑>의 주인공 쥘리엥 소렐처럼 기우는 상류 계급 자녀의 가정 교사 자리를 꿰차게 된다. 그리고 찬찬히 상류 사회로의 이동을 꾀한다. 그 과정에서 쥘리엥이 마틸드에게 그러했듯, 기우 또한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인 다혜와의 결혼이라는 더 단단하고 확실한 동아줄을 꿈꾼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가 블랙코미디로서는 두말할 것 없이 훌륭하다고 여기면서도 결국은 이 계급 의식이라는 주제와 그것을 풀어가는 방식이 너무나 진부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이미 두 세기 전 쥘리엥 소렐이라는 청년이 계급 투쟁의 욕망을 담아 총성을 울리지 않았던가. 게다가 미안하지만, 이 기우라는 인물은 쥘리엥만큼 매력적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영화 내에서 총포소리처럼 천둥이 울려 퍼지고 나의 생각 역시 완전히 뒤바뀌게 된다. 



2.  쥘리엥 소렐은 남들의 눈을 피해 보나파르트의 초상을 숨겨두고 혼자 있게 되는 밤이면 그것을 꺼내 눈을 반짝인다. 기생충에도 초상이 등장한다. 바로 근세가 벽에 붙여놓은 박사장의 사진이다. 쥘리엥이 찬미하던 대상은 자신과 같은 평범한 계층으로 태어나, 모든 역경을 이겨내고 끝끝내 황제의 자리에 오름으로써 계급 역전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던 인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이다. 쥘리엥은 그 역시 또 다른 보나파르트가 되기를 꿈꾸며 소중하게 나폴레옹의 초상을 간직한다. 그가 품은 경배심은 결국 보나파르트라는 인물 자체보다도 그가 보여주었던  '가능성'에 있다. 하지만  쥘리엥이 계급을 이탈하고 말겠다는 의지를 보나파르트라를 통해 되새겼던 것에 반해 근세는 맹목적으로 박사장을 숭배한다. 근세가 박사장의 사진을 걸어두고 괴기한 목소리로 리스펙!을 외치며 이마로 스위치를 들이박는 장면은 이미 공포감을 조성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진정한 공포는 그 이후에 있다. 

쥘리엥은 드 레날 부인을 쏘고 난 후, 당당하게 잡혀들어간다. 그리고 자신을 빼내어주겠다는 마틸드의 제안조차 거절한다. 그리고 그 유명한 법정에서의 연설을 마지막으로 시체가 되기를 자처한다. 그의 육신은 고깃덩어리가 될지언정  그가 품었던 계급 이탈에 대한 욕망은 결코 사그라들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쥘리엥은 죽음으로써 불멸을 획득한다. 그러나 쥘리엥처럼 충동적으로 박사장을 난도질 한 기택은 거실에서 벌어졌던 술자리에서의 농담처럼 바퀴벌레처럼 지하실로 숨어들어 목숨을 연명한다. 근세를 대신해 지하실을 차지하게 된 기택은 박사장의 사진 밑에서 눈물을 흘리며 그를 경배한다. 나는 기택이 흘리는 그 눈물이 공포스럽다. 그의 눈물은 이 신계급주의 사회에서 더 이상 개인은 쥘리엥처럼 위대해질 수 없으며 결코 자본주의가 세운 벽을 깨부술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인정하라고 말하는 듯하다.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패러다임 안에서 개인은 전복의 가능성을 거세당한 채 그저 기생할 수밖에 없는가. 봉준호 감독은 엔딩씬에서 기우의 망상을 통해 그 대답을 대신한다.


 

3. 영화를 보고 난 후에 밀려오는 찝찝함은 결국 우리가 무력하다는 사실을 인식함에서 온다.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게 고작해야 우리의 무력함을 마주하는 것이라니, 그야말로 절망이며 지극히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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