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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소록 Nov 27. 2024

어둠이 오면 나를 불러줘

욘 아이비데 린드크비스트 『렛미인』1, 2

*『렛미인』1, 2권과 이 책을 원작으로 한 스웨덴 영화를 보고 썼습니다.(영화는 미국판도 있습니다.) 


사랑은 구원일 수 없어도, 이 공고한 지옥, 세상이라는 이름의 진창 속에서 우리가 부여잡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일지도 모른다. (옮긴이의 말 中)     


『렛미인』1, 2 / 욘 아이비데 린드크비스트 / 문학동네


열두 살 소년 오스카르는 혼자다. 그가 두 살 때 이혼한 엄마, 아빠는 자신들의 삶에 치여 어린 아들의 내면을 응시할 여력이 없다. 또래 사이에 섞이지 못한 채 괴롭힘 당하는 왕따 소년은 혼자 분노를 키운다. 잔인한 살인사건 기사를 스크랩하고, 나무에 칼을 꽂으며 복수를 꿈꾼다.     

    

자신의 나이가 열두 살 쯤이라고 말하는 엘리는 소녀의 외모로 이백 년을 살아온 뱀파이어다. 낮의 밝은 볕을 못 견디고, 피를 마셔야만 생존할 수 있는 존재. 피를 구하기 위한 투쟁은 엘리의 삶을 인간과는 다른 잔혹한 비밀 속에 가둔다.(인간이 살기 위해 출근하듯 뱀파이어는 피를 구해야 살 수 있다.)    


불볕더위라는 말이 올해처럼 실감 난 적이 또 있을까. 한낮의 거리에 서면 폭염의 민낯에 노출된 몸이 달아올랐다. 그 거리에서 문득, 엘리의 피부를 태우던 볕을 떠올렸다. 어둠 속에 잠긴 채 자신을 드러낼 수 없었던 존재. 엘리가 맞설 수 없었던 그 따가운 볕은, ‘다름’을 향해 쏟아지는 세상의 편견은 아니었을지.


열두 살 소녀로 보이는 엘리는 혼자가 아니다. 그에겐 조력자가 있다. 호칸 벵츠손. 마흔 네 살로 고등학교 국어교사 출신인 그는 지극히 피로해 보인다. 엘리의 생존을 위한 피를 구하느라 악전고투하는 그의 몰골은 피로에 찌들었다. 피를 구하기 위한 그의 어설픈 살인 행각은 힘겹게 예정된 끝을 향해 간다. 살인미수로 붙잡히기 전 엘리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얼굴에 염산을 들이붓는 장면은 서늘하다. 염산으로 무너진 육체로 엘리에게 자신의 피를 내어준 후 까마득한 높이에서 눈밭으로 추락하는 그의 모습은 처절하다. 사랑을 위해 헌신하는 자의 슬픈 모습이다. 


영화는 호칸에 대한 이야기를 여기에서 그친다. 그러나 이 영화의 원전인 ‘욘 아이비데 린드크비스트’의 소설에는 영화에서 생략한 뒷부분이 있다. 호칸은 추락 후 죽지 않고 엘리를 찾아간다.(소설에서 가장 잔혹한 장면이라 느껴지는 부분이다.) 그리고 그가 생전에 갈급했던 엘리의 사랑을 강제로 채우려 든다. 


영화에서 표현된 호칸이 사랑에 헌신하는 자였다면, 소설에서의 호칸은 욕망에 집착하는 자로 보인다. 염산으로 뭉그러진 호칸의 얼굴은 더 이상 사회적 관계를 형성할 수 없는 무너진 주체, 대면관계에서 최소한의 도덕적 보호막조차 뚫린 격발된 존재의 상징으로 느껴진다. 심각하게 훼손된 외형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꼿꼿이 발기한 성기를 드러낸 소설 속 호칸은 인간의 근원적 욕망을 보여주며, 그것은 엘리를 향한 격렬한 성(性)적 공격으로 표현된다. 호칸이 소아성애자로 암시되며 피를 구해오는 대가로 엘리에게 육체적 보상을 요구하는 모습에서도 둘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소설 속 엘리는 오스카르의 이웃인 톰미의 피를 돈을 주고 산다. 면도칼로 톰미의 팔을 그어 피를 빨고 상처에 반창고를 붙여준다. 인간을 죽여서 피를 빨아야만 사는 존재. 살인이라는 무거운 행위는 보통의 삶을 저해하는 심각한 삶의 조건이다. 톰미의 피를 사고 상처를 갈무리해 주는 행위는 살인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피를 조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시사한 건 아닌지. 더구나 돈을 받고 엘리에게 일 리터의 피를 판 톰미가 나중에 호칸을 제압하는 모습은 나름의 희망(새로운 방식의 삶에 대한)을 제시한 것이란 생각도 든다.       


소년은 자신이 뭘 해야 할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만약 스테판이 그 정도 짐을 가지고 앉아 있었다면 저만큼 행복한 표정을 짓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어릴 때는 다를 수도 있지 않은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는 엘리가 들었음직한 커다란 상자와 함께 열차를 타고 떠나는 오스카르의 모습이 보인다. 위 인용문은 그 열차의 차장인 스테판의 눈에 비친 오스카르의 모습을 표현한 소설의 마지막 문단이다. 


영화를 본 많은 이들이 엘리가 호칸을 대신할 새로운 조력자로 오스카르를 선택한 것이라 짐작한다. 그러나 이 마지막 문단을 읽은 나는 그 의견에 동의할 수 없다. 필요를 위한 도구로 서로를 이용하는 관계와, 피하려 애써도 벗어날 수 없는 운명적인 이끌림으로 맺어진 관계는 다르지 않을까. 


어마어마한 삶의 짐을 짊어지더라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관계. 예정된 불행으로 발걸음을 내딛는 일도 혹은 절망 속에 자신을 부리는 일도 그게 나와 함께 할 한 사람, 그 한 사람이 곁에 있기에 가능한 선택일 것이다. 이 영화가 슬픈 사랑 이야기로 읽히는 지점이다. 그리고 소설의 맨 마지막 문장은, 아마도 오스카르가 어리기 때문에 그런 선택을 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그래서, 젊음은 힘이 세다.)     


상대의 초대를 받아야만 그의 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존재. 밝은 볕 아래에선 볼 수 없으며 내 영혼이 개인 날은 결코 만날 수 없는 존재. 내가 어둠에 떨어졌을 때, 내 앞에서 자신의 초대를 기다리는 존재. 뱀파이어는 인간이 허락해야만 문을 넘어설 수 있다. 이름을 불러줘야만 곁에 다가설 수 있는 존재. 그것이 행이든 불행이든 그것은 언제나 나의 부름에 의해 다가든 것이다. 내가 허락한 그것들의 존재는 영원히 나의 몫이다. 


(*표지 이미지는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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