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수 『언젠가, 아마도』
언젠가, 아마도. 누군가를 만나게 되리라는 것. 그게 나의 여행이라는 것.
(작가의 말 중)
『언젠가, 아마도』, 김연수, 컬처그라퍼
여행에 관한 책을 읽어보자고 책장을 훑어봤을 때 두 권의 책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한 권은 김영하 작가의 <여행의 이유>, 또 한 권은 김연수 작가의 <언젠가, 아마도>였다. 김영하 작가의 책은 이미 읽었기에, 읽지 않은 채 책장에 꽂아둔 김연수 작가의 책을 읽기 시작했다. 우선 소설을 쓰기 위해 여러 나라를 부지런히 여행한 작가의 활동력과 의지가 부러웠다.(나의 게으름을 잠시 한탄했다.)
여행에서 두 번 다시란 없으니까. 다시 왔을 때 나는 그때의 그 사람이 아닐 테니까.(p31)
여행지의 모든 것들과 미련없이 헤어지며 삶의 비정한 원리를 깨우쳤다는 작가의 말이 와닿는다. 여행지에서 좋았던 사람, 좋았던 풍경, 좋았던 모든 것들을 우리는 무엇 하나도 내 것으로 가져오지 못한 채 작별을 고한다.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을 알면서.(그러나 모든 것을 이국의 배경 위에 고스란히 놓아둔 채 돌아온다 해도, 내가 들고 온 게 아무 것도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저자가 소설가이기에 읽기와 쓰기에 대한 단상도 자주 보인다. 깊이 공감되는 내용이 많다.
자유는 남들이 바라보는 세계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한다. 더 많은 사람의 관점에서 이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을 때, 나는 더욱더 자유로워진다. 그런 점에서 나는 모든 사람이 되고 싶지만, 그게 가능할 리가 없다. 그래서 세상에는 이토록 많은 책이 있는 게 아닐까? 원한다면 나는 어떤 사람이라도 될 수 있다. 이 자유를 만끽하고 싶다.(p75)
글을 잘 쓴다는 말은 사실적으로 쓴다는 말이고, 그건 그 작가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사실을 알고 있다는 의미다. 경험이 많다는 뜻일 수도 있지만, 관찰을 잘한다는 뜻이기도 하다.(p184)
관찰을 잘하는 사람이 좋은 작가가 될 수 있다던 오래 전 교수님 말씀이 떠오른다.(사물을 디테일이 아닌 이미지로 기억하는 나는 이 얘기를 듣고 깊이 좌절했었다.)
크리스 보티의 음악을 들으며, 마크 밴호네커의 『비행의 발견』을 읽고 있다. 이 책에서 거론된 것들이다. 작가의 여행기에는 책 관련 정보가 많아서 즐겁다. 이 책에서 발견한 몇 권의 책 제목을 더 적어놨다. 『시인의 집』(전영애)은 인용된 카프카의 이야기가 너무 아름다워 꼭 읽어보고 싶다.(아끼던 인형을 잃어버리고 우는 어린 소녀를 위해 카프카가 삼십여 통의 편지를 썼다는 일화) 헨리 페트로스키의 『연필』과 세노 갓파의 『작업실 탐닉』도 읽고 싶다.(페트로스키의 작품은 『연필 + 책이 사는 세계 + 물리적 힘』 3종 세트로 읽는 게 좋을 것 같다. 『작업실 탐닉』은 절판되었지만, 우리 동네 도서관에는 있다는 기쁜 사실!)
(*이 책의 뒤에는 '김연수의 여행에 함께한 책과 영화, 그리고 음악'이 부록으로 붙어있다. 이 책에서 거론된 작품들의 목록이다. 작가들은 어떤 책을 읽는지 궁금한 나는 이 목록이 고맙다.)
이 책이 여행 산문집이니만큼 여행에 관한 작가의 말도 기억해 봄직하다.
... 어떤 곳이든 나무가 있다. 그리고 내가 떠나온 곳과 다름없이 그 나뭇잎으로 하오의 햇살이 비춘다. 바로 이 순간이 '여기는 어디이며 나는 누구인가?'라는 의문이 드는 때다. 대개 여행의 목적은 그런 의문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데 있으니까, 비로소 나는 목적지에 다다른 셈이다.(p193)
낯선 곳에서 나는 바로소 나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나마저도 낯설게 하는 곳이 여행지다. 지금껏 볼 수 없었고, 어쩌면 보지 않았던 내 안의 정체가 낯선 배경 위에 펼쳐지고 나는 그것에 지긋이 눈을 준다. 결국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나를 만난다. 마치 그 만남을 위해 먼 길을 떠나온 듯이. 여행은 비로소 여행이 된다.
세상이란 어디까지 나빠질 수 있을까? 하지만 그건 별로 궁금하지 않다. 내가 궁금한 건 인간이란 어디까지 긍정적일 수 있느냐는 점이다. 그건 아마도 지옥도 정겨워질 때까지가 아닐까.(p115)
나가사키나 샌프란시스코, 코타키나발루나 베르겐(노르웨이) 등의 맑고 파란 지역을 그리워하며 숨 쉴 곳을 찾아서 떠나지만 결국 우리는 여기로 돌아온다. 이 정겨운 지옥 속으로. 한국이 싫어서 떠났으면서도 미국 캘리포니아의 화창한 날에 비내리는 서울을 그리워하는 어리석은 마음처럼. 지옥이 정겨워질 정도로 그토록 내가 긍정적인(?) 사람이라는 걸 처음 깨달은 것은 그렇게 낯선 땅으로 떠나있을 때였다.
나를 둘러싼 세계가 달라지면 내가 달라진다는 건 확실했다. 그게 바로 여행의 목적이었다.(p257)
이전의 나와 다른 내가 되고 싶다면 여행을 떠나라. 풍경이 바뀌면 나도 바뀐다. 그게 여의치 않다면 여행자의 시선으로 세계를 바라보라. 이전과 다른 시선으로 일상을 바라볼 수 있다면, 나는 이전과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 진짜 여행은 여행이 끝난 후 시작된다,는 말로 작가의 여행론을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게으름쟁이 쫄보인 나도 용기를 내어 낯선 땅으로 훌쩍 떠나보고픈 의지가 솟구친다. 책이란 이토록 위험한 물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