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리뷰
기아타이거즈가 우승을 앞둔 시점, 인터넷 서점에서 압도하라 타이거즈를 예약판매를 하는 걸 보고 냉큼 구매해 버린 것은 팬심 때문이었다. 대만 여행을 다녀오자 현관문 앞에서 나를 맞이한 건 바로 이 책, 압도하라 타이거즈였다. 대만 자전거 여행 중에도 유료서비스까지 결재해 가며 한국시리즈를 챙겨봤다. 마지막, 우승을 확정하는 경기만 병원에 머물며 보지 못했을 뿐이다. 친구가 여행 중 쓰러졌고 나는 야구에 관심 둘 여력이 없었다. 그래서 한국에 돌아온 뒤에도 한참 지난 후에야 압도하라 타이거즈를 읽을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이 책은 사지 말았어야 할 책이었다. 좋은 책, 나쁜 책이 따로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좋은 책을 읽어도 남는 게 없을 수도 있고, 안 좋은 책이라고 소문난 책이라도 비판적 독서를 한다면 얻는 게 생기기 마련. 결국 좋은 책이 아니라 좋은 독서가 존재할 뿐이다. 그런데 이건 다 책일 경우에 그렇다. 문제는, 이 책은 책이 아니라 굿즈라고 보는 편이 더 맞는 거 같다는 점이다. 굿즈라면 꽤나 훌륭하다. 이범호 감독과 주축 선수들의 인터뷰를 모아놨고 올 시즌 전체를 조망하고 있으니. 그런데 책이라고 생각하면 비판적 독서를 하기에도 내용이 너무 없다. 나처럼 시즌 내내 야구 기사와 분석글과 유튜브 영상을 챙겨본 팬들이라면 전혀 새로울 것 없는 이야기만이 피상적으로 나열되었을 뿐이다. 이 인터뷰를 데이터 분석과 함께 했더라면 정말 좋은 책이 되었을 텐데, 이런 아쉬움이 짙게 남는다.
잘되는 집안은 왜 잘되는지를 분석하고 싶어서, 일종의 자기계발서 읽는 느낌으로 읽어볼까 했지만 그런 것도 건질 게 없었다. 뭐 어쩌겠나. 책의 외피를 쓴 굿즈인 걸 내 모르고 책을 기대하며 샀으니. 다 내 잘못이다.
그래도 인상 깊었던 내용이 아예 없는 건 아니어서 그거라도 기록해 본다. 주로 이범호 감독의 리더십에 대한 이야기다. 10개 구단 감독 중 가장 젊은 감독이고, 올초 전임 감독이 비리사건에 휘말리면서 불명예 퇴진한 자리에 갑작스럽게 발탁되었다. 신인급 감독으로서 패기 넘치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창의적인 리더십을 보여줄 수도 있지만 그만큼 경험부족을 노출할 수도 있는 일. 우승 후보이자 인기팀을 맡게 된 초보 감독은 팬들과 언론의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 선수를 제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제가 그 선수의 플레이에 들어가야 해요. 그 선수의 뇌 속에 제가 들어가는 거죠. (중략) 선수가 감독의 뇌로 들어오게 하면 그 선수는 좋은 성적을 만들지도 못하고 성장도 하지 못하는 경우를 자주 봤어요. 왜냐하면 선수마다 가진 장점이 각기 다르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모든 선수를 한 명의 감독이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할 수 있겠습니까(42~43쪽)
꼭 야구팀이 아니더라도 조직의 리더들은 자신의 색깔, 자신의 철학을 내세우는 경우가 많다. 이게 나쁜 것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무런 철학이 없는 사람이 리더인 조직은 결국 제대로 항해도 해보지 못하고 좌초하곤 하니까. 최악의 리더는 고집불통이 아니라, 고집도 없고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고 책임질 능력도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철학에 입각해서 어떤 방식으로 조직을 이끌어갈지를 설명하고 구성원들을 설득하려 노력한다면, 리더의 고집은 책임감의 일부이기도 하니까.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함정에 빠지기도 하는 게 아닐까. 강한 책임감은 때로는 권력의 민주적인 분배를 가로막는다. 책임감 강한 리더는 혼자서 모든 것을 책임지려 하고 그러면 결국 다른 이들은 책임을 지지 않게 되는데, 권력(힘)은 책임에서 나온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혼자 책임지는 리더는 힘을 다른 구성원들에게 나눠주지 않고 혼자서만 행사하는 사람이 되어 버리고 만다.
그런 면에서 감독(리더)의 뇌에 선수들이 들어오게 하는 게 아니라 반대로 선수들의 뇌에 감독(리서)이 들어가야 한다는 이범호 감독의 이야기가 무척 신선하게 들렸다. 큰 책임을 갖게 된 누구라도 그 책임을 다하고자 열심히 자신의 비전과 철학을 조직에 이식하려고 하기 마련일 텐데 반대로 생각한 거니까. 결국 우승까지 했으니 자신의 색깔이 아니라 선수 개개인의 색깔을 살리는 것이 조직의 성장으로 연결된다는 것을 결과로 증명했다. 문득 나는, 전쟁없는세상은 이런 측면에서 잘하고 있는지 되묻게 되었다. 과연 우리는 이범호의 기아만큼 전쟁없는세상의 다양한 구성원들의 특징과 장점을 잘 이해하고 살리고 있는지, 전쟁없는세상은 구성원들의 성장을 촉진하고 있는지를 말이다.
제가 현역 시절에 전 경기를 4~5년 뛰었잖아요. 그때 가장 힘들었던 게 뭔지 아세요? (중략) 무관심이었어요. 당연히 전 경기를 뛸 거라는 그 생각이 사람을 더 지치게 만들더라고요. (중략) 젊은 나이였지만 그래도 힘든 건 힘들었어요. 근데 그보다 그때 감독이나 코치가 '미안하다. 고생했다. 힘들었지?' 이 한마디를 건네면 다시 내일 경기도 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루 이틀 휴식을 받는 것보다 고생했다는 그 한마디가 전 경기를 뛰는데 더 위안이었어요. (62쪽)
또 하나, 바로 이 구절이 인상 깊었다. 어쩌면 요즘의 내 마음을 잘 표현해 주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들이 실은 굉장히 소중한 것이고 그에 대해서 특별하게 반응해 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이범호의 인터뷰를 통해 새삼 깨닫게 된다. 그러니 나부터 먼저 내 동료들이 당연하게 잘 해내는 일들을 칭찬하고 그들의 노고와, 당연하게 보이게끔 해내는 능력을 아끼자고 다짐해 본다. 물론 나 또한 무관심이 아니라 그런 인정과 응답을 받고 싶은 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