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내민해 Jun 14. 2024

500만 원으로 시작된 작은 책방

사장님, 자주 찾아갈게요.

결과적으로 밤에 집을 보러 왔다면, 넓고 전망 좋은 남향집이 실은 아주 허술하게 지어진 걸 알았다면, 이 집도 이 동네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돌이킬 수 없었다. 어찌 됐든 마음을 붙여야만 했다.
그래서 나는 동네를 걷기 시작했다. 메리 올리버의 말을 살짝 바꿔 옮겨보면, 나는 동네를 사랑하기 위해 동네를 걸었다.

우리는 잘 모르는 것을 무서워한다.
순서를 바꾸어 말하면, 우리가 두려워하는 이유는 잘 모르기 때문이다.

<시와 산책> 한정원



나의 서점 여행은 여전히 순항 중이다.

서점을 찾는 순서는 늘 같다. 서점 자체를 목적지로 두기보다는 낯선 동네에 일정이 있을 때마다 그 근처에 위치한 동네(독립)서점을 찾아보고 겸사겸사 방문하곤 한다. 이 매거진에 글이 담기지 않는 동안, 좋은 기억을 간직하고 돌아왔던 서점들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글까지 터져 나오기에는 어딘가 애매했다. 덜 여물었다고 해야 할까.


그러다 최근 한 서점을 만났다. <시행과 착오>라는 이름을 가진 작은 동네 책방이다. 우선 책방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익숙하게 써오던 말인데도, 책방 이름으로 만나니 왠지 모르게 새로웠다. 방문하기에 앞서 이것저것 검색하다가 책방의 이름이 왜 <시행과 착오>로 정해졌는지도 알 수 있었다.



책방 이름을 '시행과 착오'라고 이야기했을 때, 주변 지인들의 반응은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른 이름을 생각했어요.
책방 멍, 뜻밖의 서점, 우연히 책방, 우리끼리 서재, 합 책방...
여러 후보를 나열하고, 하나하나 의미를 만들어 보았어요.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아무리 의미 부여를 해봐도, 이 이름들은 진짜 내가 하고 싶었던 이름이, 진짜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아니야'

저에게 책방은 지금껏 해온 숱한 시행착오의 결과이자, 또 다른 시행착오의 시작이었기에, 정답은 오직 <시행과 착오>뿐임을 깨달았습니다.
'어딘가에는 이런 나의 이야기에 깊이 공감할, 자신만의 시행착오에 고군분투 중인 사람이 분명히 있을 거야'

그 믿음 하나로 책방 이름을 지었습니다.



오늘 이 글에 인용했던 <시와 산책>의 문장처럼, 나는 지금 살고 있는 동네를 좋아하지 않았다. 더 정확히는 무서울 때가 많았다. 여명의 시간에는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웠지만, 그 시간을 제외한 대부분의 시간은 안전하지 못했다. 살면서 이런 동네를 처음 겪어봤던 터라 이곳은 나에게 애증의 장소와도 같았다. 이사를 가고 동네를 떠나도 이 생각만큼은 변함이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동네를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한정원 작가의 말처럼 동네를 걷다 보면 '이 동네를 사랑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서였다. 결과는 만족스럽지 못했지만, 그러다 만난 게 바로 <시행과 착오>다. 생긴 지 세 달도 채 되지 않아 집 근처임에도 눈에 띄지 않았다가 우연한 계기로 만나게 된 것이다.


주말에는 12시 오픈이라 시간을 맞춰갔는데, 아직 불이 꺼져 있었다. 안에서도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실망하지 않고 그 앞에 서서 기다렸다. 보통 이렇게 작은 책방들은 손님 자체가 워낙 적어 문을 여는 시간이 정해져 있음에도 느슨하게 운영되는 경우가 많았기에 그러려니 한 것이다(자주 있는 일이다). 5분 정도가 지났을까. 저 멀리서 사장님이 급하게 걸어오시는 게 보였다. 처음에는 긴가민가 했는데 누가 봐도 저분이 사장님 같았다. 연신 죄송하다는 인사를 하시며 다급하게 서점문을 여시길래, (숨 좀 돌리시라고) 밖에서 조금 기다렸다가 안으로 들어갔다.





'와!'하고 작은 탄성이 나올 만큼 아기자기하게 잘 갖춰진 곳이었다. 7평의 작은 공간을 어찌나 알차고, 아기자기하게 가꿔놓으셨던지. 큐레이팅 되어있는 책들의 결도 좋았고, 카페처럼 커피도 판매하고 있었다. 홀로 혹은 나란히 앉아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 필사와 메모를 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었다. 판매하는 책과 책방에서 읽을 수 있는 책이 구분되어 있는 점도 좋았다. 나는 그곳의 서가를 오랫동안 둘러보며, 한 땀 한 땀 사장님의 정성스러운 손글씨가 담겨있는 소개 글도 읽어가기 시작했다.


요즘 들어 시에도 부쩍 관심이 많아져 필사를 이어가고 있는데(필사모임도 운영하고 있고), 사장님의 메모를 통해 "파도시집선"이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파도시집선은 등단한 시인이 아니라도 매 분기 제시되는 주제에 맞춰 누구나 시를 투고할 수 있는 프로젝트다. 심사과정을 거쳐 당선되면 시집으로 엮어내는데, 참여 작가들의 인세는 매년 기부하고 있다고 한다.





<시행과 착오>를 방문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좋은 취지의 프로젝트가 있다는 것도 몰랐을 텐데, 더욱 놀라운 사실이 하나 더 기다리고 있었다. 이 프로젝트를 알게 된 날, 내가 운영하고 있는 필사방의 모임원 중 한 분이 이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시인이라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된 것이다. 우리 두 사람은 이건 운명이라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는데, 역시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닿아있다는 걸, 다시금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이곳에서는 평일 저녁과 주말 오전, 독서모임도 운영하고 있었다. 평일 저녁 모임은 한 권의 책을 4주에 걸쳐 눅진~하게 읽는 모임이었고, 주말 오전 모임은 계절감에 따라 운영되는 제철 모임이었다. <시행과 착오>를 가만히 둘러보며 느꼈던 건, 이곳은 서점의 역할뿐만 아니라 동네의 쉼터이자 사랑방, 만남의 장소 등 여러 가지의 다정한 수식어가 가능한 공간이라는 점이다.


천천히 책방 탐방을 마치면서 마음에 콕 들어왔던 두 권의 책을 구입했다. 한 권은 작가 여섯 명의 산문을 엮어 만든 《아무도 없는 곳에서, 모두가 있는 곳으로》라는 책이다. 이 책의 저자 중 세 명의 작가(최진영, 한정원, 안미옥)는 익히 알고, 그분들의 글결을 좋아하고 있었던 터라 책을 발견하자마자 반가운 마음에 집어 들었다. 이곳에서 만나지 않았더라면 존재조차 몰랐을 책이라 망설임 없이 고른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한 권은 이번 달, 우리 모임에서 지정도서로 선정된 최진영 작가의 《겨울방학》이라는 책이다. 최근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는데, 내가 알게 모르게 최진영 작가의 글을 좋아하고, 그분의 작품을 많이 읽어왔다는 것이다. 가장 최근에 읽은 책이 《원더》였고, 《겨울방학》도 읽고 싶은 책 리스트에 포함시켜 놓았던 책 중 한 권이었다. 그래서 나와 함께 독서모임을 운영하고 계시는 모임장님이 이 책을 이번 달 지정도서로 선정했다는(매달 번갈아가며 책을 선정하고 모임을 운영하고 있다) 카톡을 보내셨을 때, 어찌나 놀랐던지.

물론 반가운 마음에서 말이다.


누군가에게는 고작 책방 한 번 다녀온 일이 이렇게나 대단한 일인가, 싶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에게 그날의 경험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충만함을 안겨준 소중한 시간이었다. 책 세계에 한 걸음 더 깊이 다가간 느낌이었으니까. 내가 속한 이 세계가 조금 더 확장되어 가는 걸 눈으로 확인한 것만 같았으니까. 사장님은 직접 쓴 손글씨로 쿠폰을 채워주시며 모임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주셨다. 평일 오후는 어렵겠지만, 주말 오전이라면 가능할 것 같았던 나는 다시 뵙겠다는 인사를 끝으로 그곳을 나섰다. 이 작고 소중한 공간이 오래오래 이 골목을 밝혀줬으면 하는 마음을 조심스레 안고서 말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