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님, 자주 찾아갈게요.
결과적으로 밤에 집을 보러 왔다면, 넓고 전망 좋은 남향집이 실은 아주 허술하게 지어진 걸 알았다면, 이 집도 이 동네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돌이킬 수 없었다. 어찌 됐든 마음을 붙여야만 했다.
그래서 나는 동네를 걷기 시작했다. 메리 올리버의 말을 살짝 바꿔 옮겨보면, 나는 동네를 사랑하기 위해 동네를 걸었다.
우리는 잘 모르는 것을 무서워한다.
순서를 바꾸어 말하면, 우리가 두려워하는 이유는 잘 모르기 때문이다.
<시와 산책> 한정원
나의 서점 여행은 여전히 순항 중이다.
서점을 찾는 순서는 늘 같다. 서점 자체를 목적지로 두기보다는 낯선 동네에 일정이 있을 때마다 그 근처에 위치한 동네(독립)서점을 찾아보고 겸사겸사 방문하곤 한다. 이 매거진에 글이 담기지 않는 동안, 좋은 기억을 간직하고 돌아왔던 서점들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글까지 터져 나오기에는 어딘가 애매했다. 덜 여물었다고 해야 할까.
그러다 최근 한 서점을 만났다. <시행과 착오>라는 이름을 가진 작은 동네 책방이다. 우선 책방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익숙하게 써오던 말인데도, 책방 이름으로 만나니 왠지 모르게 새로웠다. 방문하기에 앞서 이것저것 검색하다가 책방의 이름이 왜 <시행과 착오>로 정해졌는지도 알 수 있었다.
책방 이름을 '시행과 착오'라고 이야기했을 때, 주변 지인들의 반응은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른 이름을 생각했어요.
책방 멍, 뜻밖의 서점, 우연히 책방, 우리끼리 서재, 합 책방...
여러 후보를 나열하고, 하나하나 의미를 만들어 보았어요.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아무리 의미 부여를 해봐도, 이 이름들은 진짜 내가 하고 싶었던 이름이, 진짜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아니야'
저에게 책방은 지금껏 해온 숱한 시행착오의 결과이자, 또 다른 시행착오의 시작이었기에, 정답은 오직 <시행과 착오>뿐임을 깨달았습니다.
'어딘가에는 이런 나의 이야기에 깊이 공감할, 자신만의 시행착오에 고군분투 중인 사람이 분명히 있을 거야'
그 믿음 하나로 책방 이름을 지었습니다.
오늘 이 글에 인용했던 <시와 산책>의 문장처럼, 나는 지금 살고 있는 동네를 좋아하지 않았다. 더 정확히는 무서울 때가 많았다. 여명의 시간에는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웠지만, 그 시간을 제외한 대부분의 시간은 안전하지 못했다. 살면서 이런 동네를 처음 겪어봤던 터라 이곳은 나에게 애증의 장소와도 같았다. 이사를 가고 동네를 떠나도 이 생각만큼은 변함이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동네를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한정원 작가의 말처럼 동네를 걷다 보면 '이 동네를 사랑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서였다. 결과는 만족스럽지 못했지만, 그러다 만난 게 바로 <시행과 착오>다. 생긴 지 세 달도 채 되지 않아 집 근처임에도 눈에 띄지 않았다가 우연한 계기로 만나게 된 것이다.
주말에는 12시 오픈이라 시간을 맞춰갔는데, 아직 불이 꺼져 있었다. 안에서도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실망하지 않고 그 앞에 서서 기다렸다. 보통 이렇게 작은 책방들은 손님 자체가 워낙 적어 문을 여는 시간이 정해져 있음에도 느슨하게 운영되는 경우가 많았기에 그러려니 한 것이다(자주 있는 일이다). 5분 정도가 지났을까. 저 멀리서 사장님이 급하게 걸어오시는 게 보였다. 처음에는 긴가민가 했는데 누가 봐도 저분이 사장님 같았다. 연신 죄송하다는 인사를 하시며 다급하게 서점문을 여시길래, (숨 좀 돌리시라고) 밖에서 조금 기다렸다가 안으로 들어갔다.
'와!'하고 작은 탄성이 나올 만큼 아기자기하게 잘 갖춰진 곳이었다. 7평의 작은 공간을 어찌나 알차고, 아기자기하게 가꿔놓으셨던지. 큐레이팅 되어있는 책들의 결도 좋았고, 카페처럼 커피도 판매하고 있었다. 홀로 혹은 나란히 앉아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 필사와 메모를 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었다. 판매하는 책과 책방에서 읽을 수 있는 책이 구분되어 있는 점도 좋았다. 나는 그곳의 서가를 오랫동안 둘러보며, 한 땀 한 땀 사장님의 정성스러운 손글씨가 담겨있는 소개 글도 읽어가기 시작했다.
요즘 들어 시에도 부쩍 관심이 많아져 필사를 이어가고 있는데(필사모임도 운영하고 있고), 사장님의 메모를 통해 "파도시집선"이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파도시집선은 등단한 시인이 아니라도 매 분기 제시되는 주제에 맞춰 누구나 시를 투고할 수 있는 프로젝트다. 심사과정을 거쳐 당선되면 시집으로 엮어내는데, 참여 작가들의 인세는 매년 기부하고 있다고 한다.
<시행과 착오>를 방문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좋은 취지의 프로젝트가 있다는 것도 몰랐을 텐데, 더욱 놀라운 사실이 하나 더 기다리고 있었다. 이 프로젝트를 알게 된 날, 내가 운영하고 있는 필사방의 모임원 중 한 분이 이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시인이라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된 것이다. 우리 두 사람은 이건 운명이라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는데, 역시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닿아있다는 걸, 다시금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이곳에서는 평일 저녁과 주말 오전, 독서모임도 운영하고 있었다. 평일 저녁 모임은 한 권의 책을 4주에 걸쳐 눅진~하게 읽는 모임이었고, 주말 오전 모임은 계절감에 따라 운영되는 제철 모임이었다. <시행과 착오>를 가만히 둘러보며 느꼈던 건, 이곳은 서점의 역할뿐만 아니라 동네의 쉼터이자 사랑방, 만남의 장소 등 여러 가지의 다정한 수식어가 가능한 공간이라는 점이다.
천천히 책방 탐방을 마치면서 마음에 콕 들어왔던 두 권의 책을 구입했다. 한 권은 작가 여섯 명의 산문을 엮어 만든 《아무도 없는 곳에서, 모두가 있는 곳으로》라는 책이다. 이 책의 저자 중 세 명의 작가(최진영, 한정원, 안미옥)는 익히 알고, 그분들의 글결을 좋아하고 있었던 터라 책을 발견하자마자 반가운 마음에 집어 들었다. 이곳에서 만나지 않았더라면 존재조차 몰랐을 책이라 망설임 없이 고른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한 권은 이번 달, 우리 모임에서 지정도서로 선정된 최진영 작가의 《겨울방학》이라는 책이다. 최근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는데, 내가 알게 모르게 최진영 작가의 글을 좋아하고, 그분의 작품을 많이 읽어왔다는 것이다. 가장 최근에 읽은 책이 《원더》였고, 《겨울방학》도 읽고 싶은 책 리스트에 포함시켜 놓았던 책 중 한 권이었다. 그래서 나와 함께 독서모임을 운영하고 계시는 모임장님이 이 책을 이번 달 지정도서로 선정했다는(매달 번갈아가며 책을 선정하고 모임을 운영하고 있다) 카톡을 보내셨을 때, 어찌나 놀랐던지.
물론 반가운 마음에서 말이다.
누군가에게는 고작 책방 한 번 다녀온 일이 이렇게나 대단한 일인가, 싶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에게 그날의 경험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충만함을 안겨준 소중한 시간이었다. 책 세계에 한 걸음 더 깊이 다가간 느낌이었으니까. 내가 속한 이 세계가 조금 더 확장되어 가는 걸 눈으로 확인한 것만 같았으니까. 사장님은 직접 쓴 손글씨로 쿠폰을 채워주시며 모임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주셨다. 평일 오후는 어렵겠지만, 주말 오전이라면 가능할 것 같았던 나는 다시 뵙겠다는 인사를 끝으로 그곳을 나섰다. 이 작고 소중한 공간이 오래오래 이 골목을 밝혀줬으면 하는 마음을 조심스레 안고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