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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민해 Nov 06. 2024

능내역을 아시나요?

회사를 그만뒀을 때 내가 '포기'했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나의 취업을 '도전'으로 여겼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포기한 게 아니었다. 도전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저 선택했고, 취소했던 것일 뿐.

마음가짐이라는 말은 말 그대로 '마음을 어떻게 가지느냐'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누군가가 감히 도전하는 일을 누군가는 그저 선택할 수 있고, 누군가는 어렵게 포기하는 일을 누군가는 쉽게 취소할 수 있다. 마음을 얼마나 어떻게 가졌느냐, 소유하고 있느냐가 또 하나의 자본일 수 있다. 마음을 더 많이 가지고 더 많이 쓰는 사람을 보고, 억울해하지 않았으면 한다. 당신 또한 어떤 일에 있어서는 누군가가 가진 마음보다 더 많은 마음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아무쪼록 도전했다면 포기하지 않기를 바라고, 도전이 아닌 선택이었다면 그 선택을 취소할 수 있음을 알고 있기를 바란다. 너무 많이 힘주어 살고 있지는 않은지, 너무 많이 힘주어 살려고 하지는 않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우리에게는 앞으로도 너무나 많은 일이 있을 테고, 또 우리는 계속 계속 해나갈 테니까.

<빈곤했던 여름이 지나고> 태재



1956년 5월 1일 무배치간이역(역무원이 없는 간이역)으로 영업을 시작했던 능내역은 경기도 남양주시 능내리에 있던 기차역으로 2008년 12월 폐역되었다. 당시 팔당역과 양수역 사이 중앙선역에 위치해 있었고, 지금은 이 역을 대신하여 근처 진중리에 운길산역이 신설되었다고 한다. 현재 이곳은 '능내역 폐역'이라는 명칭을 간직한 채 기념물이 되었고, 일부 철길은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고 한다. 나는 얼마 전 능내역 근처에 있는 작은 서점, 능내책방을 다녀왔다. 숲과 강이 어우러진 동네 '능내'에서 많은 사람이 책 여행을 즐기길 바라는 마음으로 작년 여름, 이곳에 서점을 만들었다고 한다.


책방이 없는 동네는 동네가 아니고
책이 없는 여행은 여행이 아니라고 하죠.
날이 좋아도
날이 좋지 않아도
언제나 좋은 책을 만날 수 있는 곳
능내책방으로 오세요.


능내책방은 여느 책방과 달리 일본 문학이 서가에 꽤 많았는데, 알고 봤더니 이곳 사장님이 일본 만화가인 마스다 미리의 책들을 여러 권 번역한 박정임 번역가였다. 책방을 시작했던 이유도 갑작스러웠는데, 번역가로 10년 넘게 일하면서 단순한 삶의 형태가 지겨워져 다른 방식의 삶을 경험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한참 매너리즘에 빠져 있을 무렵 막연하게 책방을 열고 싶다 생각했고, 때마침 비어 있던 상가를 발견했고, 그렇게 아무 준비 없이 ‘콘셉트 없는 게 콘셉트’인 책방을 무작정 시작하게 된 것이다. 서문에 적어놓았던 태재 작가의 빈곤했던 여름이 지나고의 문장처럼, 그녀의 새로운 발걸음을 응원하고 싶었다. 도전은 누구에게나 열려있고, 취소 또한 언제든 가능한 것이니. 본인이 책임감 있게 일궈갈 자신만 있다면(설령 그 자신감을 다시 회수하게 될지라도) 못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책임은 오롯이 본인의 몫이니 남이 왈가왈부할 일도 아닐 테고 말이다.





다만 무작정 시작했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이 서점, 꽤 괜찮았다. 그동안 차근차근 마음속으로 자신만의 서점을 그려온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말이다. 작은 동네 서점을 찾을 때마다 서가에 진열된 책을 통해 책방지기의 취향을 알아가는 재미가 쏠쏠한데, 능내책방도 그런 점에서 좋았다. 디귿자 구조로 배치된 책장에 주제별로 정갈하게 모여있는 책들, 은은한 조명과 안온한 분위기를 한껏 자아내는 목재 가구들까지 만든 이의 섬세한 손길이 군데군데 묻어나는 듯했다. 개인적인 취향이지만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을 따로 마련해둔 책방들을 좋아하는데, 이곳 또한 그랬다. 엉덩이가 푹 빠져 한 번 앉으면 일어나기 싫을 것만 같은 편안한 의자와 긴 탁자가 창가 쪽에 자리하고 있었고, 탁자에 놓여있는 방명록은 오고 가는 손님들의 귀여운 일기장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다양한 주제의 독서모임도 일주일 간격으로 꾸준히 열리는 것 같았고, 벽 쪽에는 연필과 메모지 등 귀여운 소품도 함께 판매하고 있었다. 이곳은 단순히 책을 파는 공간을 넘어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잠시 들러 안온하게 쉬었다 갈 수 있는 공간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그래, 책방이라고 해서 꼭 책만 있으란 법은 없지. 읽을 책만 사야 한다는 법도 없고, 읽지 않아도 손이 먼저 뻗쳐 사게 되는 책들도 있고. 그 모든 순간들이 차곡차곡 쌓이다 보면 고유한 자신만의 책 취향을 알게 되는 것 아닐까.


나는 서가를 한참 둘러보다 김화진 작가의 『공룡의 이동 경로』라는 책을 샀다. 올여름 『동경』이라는 책을 통해, 김화진 작가를 처음 알게 됐는데, 그 책이 꽤 좋았던 터라 이 책도 눈에 들어온 것이다. 처음에는 제목만 보고 SF 장르인가 싶었는데, 책 소개를 보니 친구와 관계에 대한 이야기였다. 내가 『동경』을 읽고 좋았던 이유도 김화진 작가 특유의 세밀한 감정 묘사 덕분이었는데, 그 중심에 세 친구가 있었다. 얽히고설킨 삼각형 구조 속 관계의 실타래를 한 올 한 올 풀어가는 이야기였다. 서술 시점을 차례로 오가며 서로를 천천히 이해하는 과정을 밀도 있게 담아낸 그녀의 잔잔한 문체가 좋았다. 이 책도 같은 기대감을 품으며 골랐다. 잠깐이었지만 책방에 있는 푹신한 의자에 앉아 책 속으로 폭 빠져들었다. 한참 그렇게 책을 읽고 있었는데, "커피 한 잔 드릴까요?"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장님이셨다. 너무 감사하지만 돌아갈 길이 멀어 곧 일어나야 해서 괜찮다고 말씀드렸다. 이 공간의 따뜻함처럼, 손님을 향한 마음 씀씀이도 다정한 분이셨다. 책방을 떠나기 전, 책방 안에 위치한 화장실을 다녀왔는데, 이점도 좋았다. 서울에 있는 작은 책방들은 책방 하나만으로도 공간이 협소해 화장실은커녕 책을 둘 공간도 부족해 탑처럼 책을 쌓아 올린 곳도 많았는데, 이곳은 달랐다. 오랫동안 머물며 책의 향기를 마음껏 느낄 수 있도록 사장님의 정성이 곳곳에 담겨 있었다.


지난 달이던가. 서촌에 위치한 <책방오늘>이라는 서점을 다녀왔던 기억이 난다. 그때만 해도 그곳이 한강 작가님이 운영하시는 서점인지 모르고 방문했었다. 공간 자체는 협소했지만 '작가들의 서가'라는 코너가 운영되고 있어 신선하다는 생각을 하며 찬찬히 둘러봤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곳을 방문할 수 없게 됐다. 한강 작가님이 한국 최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이 서점까지 덩달아 유명해진 것이다. <책방오늘>이 한강 작가님이 운영하고 계신 서점이라는 사실이 세간에 알려지면서 사람들의 발길은 연일 끊이지 않았고 결국 임시 휴업에 돌입했다고. 쏟아지는 기사에 뒤늦게 이곳의 정체를 알게 된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그럼 그때 계산대에서 책을 계산해주시던 남자분이 한강 작가님의 아드님이셨을까. 그분과 나름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하나 있었는데, 이건 괜히 말해봤자 좋을 게 없을 듯싶어 혼자만 간직해야겠다. 꽤 생경했던 경험이라 지금도 웃음이 난다.


다시 능내책방으로 돌아가 본다. 능내책방 사장님은 "책방 어때요?”라는 질문에 요즘은 자신 있게 “재밌어요”라고 답한다고 한다. 뭐가 재밌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냥 기분이 좋다고.


띄엄띄엄 있는 집들 사이에 자리한 동네책방을 매개로 주민들의 교류가 늘어나는 모습이 흐뭇하고, 책을 잊고 지내던 지인들이 다시 책에 빠져드는 모습에 뿌듯해진다. 책을 대하는 모두의 마음이 편하고 즐겁고 가벼웠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래서 책방도 편안하고 유쾌하고 다정한 공간으로 만들어가고 싶다.

<황량한 기차역 한편에 자리한 유쾌한 책방 [책&생각]> 우리 책방은요 l 능내책방


사장님의 글을 읽으며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서울뿐만 아니라 국내 곳곳의 서점들을 한 곳 한 곳 열심히 돌아다니며 차근차근 배우고, 알게 된 것들이 많다. 나는 그곳에서 단순히 책만을 구입하지 않았다. 책방지기님들과의 소소한 에피소드가 덤으로 쌓여갔다. 여기에 차마 다 풀어놓지 못한 재미난 이야기들도 많은데, 지극히 사적이라 혼자만 마음속에 고이 간직하련다. 언젠가 내가 방문했던 작은 서점의 사장님들을 한 분 한 분 인터뷰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잔잔히 기대하며, 앞으로도 나의 서점 여행은 계속될 것이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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